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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평점 :
개인과 공동체, 나아가 전세계의 역사는 갈수록 확장되면서 멋지게 비상하는 곡선을 그리는 게 아니라, 자오선에 도달한 뒤 암흑으로 하강하는 궤도를 따른다. 모호함 속으로의 사라짐을 파고든 브라운의 학문은 종말의 날에 모든 변혁이 완성되면 마치 극장에서처럼 모든 배우들이 다시 한번 무대에 나타나서 이 위대한 극작품의 파국을 완성하고 완결한다는 믿음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p/34)
신문에서 이른바 고실업지역에 대한 기사를 읽는 것은 불빛을 잃은 저녀에 흉하게 변한 앞면과 그로떼스끄한 앞마당을 드러낸 연립주택이 늘어선 거리를 걷는 것, 그리고 마침내 도시의 중심가에 도착하여 도박장과 빙고 홀, 마권 판매소, 비디오 가게, 열린 문 안쪽 어두운 실내에서 맥주의 신냄새가 퍼져나오는 펍, 싸구려 가게들, 그리고 바다의 여명, 해변의 수집가, 밸모럴, 앨비언, 레일라 로레인과 같은 이름을 내건 미심쩍은 숙박업체들 외에는 아무것도 더 볼 것이 없음을 확인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일이기 때문이었다. (p.56)
마음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날 떄 이런 기억의 파편이 떠오르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기억을 되살려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물론 실제로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너무 많은 건물이 무너졌고, 너무 많은 잔해가 그 위에 쌓였으며, 퇴적물과 빙퇴석 또한 극복할 수 없다. (p.208)
불행히도 저는 근본적으로 실제적이지 못한, 언제나 생각에 잠겨 있는 유형의 인간이에요. 우리 가족은 모두 실생활에 능력이 없는 몽상가들이지요. 아이들이나 저나 똑같아요. 때때로 우리는 이 지구에서 사는 데 결코 적응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들이고, 삶이란 끝없이 진행되는,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실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p.259)
하지만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이 될까? 우리는 가장 단순한 생각조차 정리하지 못할 것이고, 풍부한 감정을 지닌 심장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애착을 느끼지 못할 것이며, 우리의 존재는 무의미한 순간들의 끝없는 연쇄에 불과할 것이고, 과거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이란 얼마나 비참한가! (p/.299)
여러 차례 글을 쓰고 다시 지웠습니다. 가끔은 이렇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만족할 만한 글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더라구요. 정말로 감명 깊게 이 책을 읽어서 어떻게든 이 느낌을 표현하려 하다 보니 그런가봅니다. 제발트는 졸라 이후 저의 인생 두 번째의 최애 작가가 되었습니다. 성장과 번영이 아닌 침체와 쇠락을 이야기하는 작가는 많지 않습니다. 어느 독자가 이런 것을 읽고 싶어할까요? 물론 ‘부정’의 텍스트 그 자체를 매력으로 여기고 글을 쓰고 이를 읽는 사람들은 존재합니다. 허나 이는 결국 봄 벚꽃이 결국 흐드러지는 것과 같이 한 때의 기억으로 남을 뿐입니다. 파국과 파멸의 흔적을 좇아가가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기 때문에, 이 사유에는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시대와 역사의 과오를 성찰하겠다는 강한 의지 같은 것.
주인공은 1992년 8월 어느날, 내면의 공허를 느끼고 영국의 동남부지방인 노퍽과 서퍽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이 지역은 고대와 중세의 왕국, 근대의 도시가 있던 곳으로 한때 문명의 꽃을 피웠으니 지금은 그 흔적만 남은 곳들이죠. 주인공의 내면의 불안함은 이 순례의 여정을 무계획적으로 만들고, 샛길과 미로에 빠지게 합니다. 그가 마주한 것은 문명의 잔해였습니다. 몰락한 청어와 누에 산업, 버려진 공장, 귀족이 건설했으나 몰락한 휴양 도시 등 인류가 소진하고 남은 찌꺼기들을 보며 주인공은 애잔한 전율을 느낍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이나 도시, 국가의 미래가 필연적으로 그러할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인류에게 기약된 미래가 없음을 통찰한 화자가 보는 잔해의 현장은 독자로 하여금 인류가 저지른 전쟁과 대학살과 오버랩되며 시대를 성찰하게 만듭니다.
제발트가 직접 찍거나 구한 흑백의 사진과 그가 경험하거나 창조한 진실과 허구가 교묘하게 뒤섞인 이 순례기는 글 자체로서도 매혹적일 뿐만 아니라, 그 사유에 완전히 침잠할 수 있게 만들 것입니다. 왜 수많은 작가들이 제발트에게 경의를 표하는지, 직접 경험해 보시죠.
* 인스타그램/네이버 블로그/알라딘 서재에서 ‘도란군’ 계정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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