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열린책들 세계문학 229
알베르 카뮈 지음, 최윤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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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어 두었던 카뮈의 '페스트'를 읽다 불현듯 우리 가족의 '코로나 19'시절이 떠올랐다. 코로나 19가 본격적으로 확산되던 2020년에 우리 가족은 초등학교 3학년과 1학년인 두 딸과 태어난 지 1년이 채 안 되는 막내 아이, 육아를 위해 휴직을 했던 아내와 야근이 일상이었던 직무에서 일하고 있던 나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토록 조심했건만 결국 우리 가족 모두가 코로나19에 순차적으로 걸렸고 거의 한 달여의 자가격리 기간을 겪었다. 나의 경우는 꼭 해야만 하는 업무 때문에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밤새워 일하기 일쑤였고 와이프 역시 내 도움 없이 코로나19에 감염된 몸으로 세 아이를 힘겹게 건사했다. 어린아이들의 체온이 치솟을 때마다 어찌나 겁을 먹었던지! 가장 두려웠던 것은 죽음의 공포였다. 뉴스와 인터넷에서 실시간으로 카운팅되는 감염자와 사망자 숫자들과 간혹 들리는 주변 사람들의 갑작스러운 비보는 어떻게든 일상을 꾸려나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우리 부부를 깊은 무력감에 빠지게 했다. 다행히 온 가족이 완치되긴 했지만 수년이 흐른 지금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아찔하기만 하다. '무력감' 이것이 코로나19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감정이다.

존재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마지막인 '죽음'을 초래하는 전염병인 페스트에 대한 소설을 쓰며 카뮈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 존재의 부조리함에 대해 탐구했던 카뮈에게 죽음이란 이 부조리함의 해방구였을까? 아니면 그 부조리함에 반항해 볼 여지조차 주지 않는 방해물이었을까? 적어도 이 소설에서 그는 죽음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자신이 살던 도시 오랑을 서서히 침식했던 페스트에 당황하지 않고 어떻게든 질서를 찾기 위해 노력했던, 존재의 부조리함에 정면으로 맞섰던 주인공 의사 리유에게 죽음의 징벌을 내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선 말이다. 리유는 페스트의 도시 점령을 가장 먼저 예측했고 그 즉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수행했다. 수없이 왕진을 다니고 페스트를 진단하고 약을 처방하고 환자의 물집을 째고 고름을 뽑아내고 끝내 죽음에 다다른 환자를 수습하는 일까지 말이다.

그러나 모두가 리유처럼 의연함을 보인 것은 아니다. 어찌할 줄 모른 채 우왕좌왕하던 사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무기력에 빠진 사람, 페스트를 일컬어 '오긴 왔지만 결국에 떠나가 버릴 불쾌한 손님' 정도로 치부하며 무사안일한 사람, 오랑의 이방인으로서 자신의 불행을 저주하며 어떻게든 탈출을 꿈꾸는 사람, 과거의 범죄를 처벌받을까 두려워했으나 모든 공권력이 페스트에 집중되자 자신의 과거가 묻힐 수도 있다는 희망에 빠진 이기적인 사람, 페스트가 신이 내린 재앙이라 주장하는 사람 등등. 페스트라는 불가항력적인 천재지변에 대한 인간의 반응의 천태만상 또한 존재의 부조리함이라 할 수 있다.

카뮈는 페스트를 인생 그 자체라고 본 것 같다. 인생을 잘 살았던 못 살았던, 부자건 빈자건, 잘생겼건 못생겼든 페스트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확률의 신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생은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것이다. 다만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이 부조리함에 의연함을 갖는 것뿐이다. 영웅주의에 빠져 감염을 무릅쓰고 희생정신을 발휘하던 페스트와 상관없이 자신이 하던 일을 묵묵히 하던 상관없다. 페스트에 걸리는 것은 나의 악행 때문이 아니며 걸리지 않는 것 또한 나의 선행 때문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의연함.

#페스트 #알베르 카뮈 #열린 책들 #서평 #도란 군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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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다르크를 추억하며
마크 트웨인 지음, 마음속 샛별 옮김 / 황금비둘기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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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호 마크 트웨인은 젊은 시절 우연한 기회에 프랑스의 영웅이자 성녀 잔 다르크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된 이후 잔 다르크라는 인물에게 강하게 매료되었다. 그의 잔 다르크에 대한 깊은 애정은 인생 후반기인 50대 후반에 그의 유럽 체류 시절에 잔 다크르에 대한 이야기를 쓰지 시작하며 꽃을 피우기 시작했고, 그가 2년 후 그녀의 조국 프랑스에서 집필을 마침으로써 결실을 맺게 되었다. 그는 잔 다르크에 관한 사료와 서적 등을 심도 있게 연구한 후에 이 책을 썼다. 이 책은 잔 다르크와 같은 마을에서 자랐고 전쟁 중에 그녀를 보좌하는 기사이자 비서 역할을 했던 실존 인물인 루이 드 콩트의 회상기 형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물론 실제로 있는 회고록은 아니다. 그러나 마크 트웨인이 꼼꼼한 자료 조사 덕분-반면에 자료 자체는 빈약한-에 그녀가 활약하던 프랑스-영국의 백년 전쟁 시기의 역사서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의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소설은 3부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는 잔 다르크의 어린 시절이, 두 번째는 그녀가 프랑스 군대의 총사령관이 되어 영국군을 물리치는 내용이, 마지막 부는 영국군에게 사로잡힌 그녀가 악의적인 재판을 받고 비극적으로 죽는 이야기이다. 쉽고 재미있게 글을 쓰는 것으로 알려진 마크 트웨인의 소설답게 전쟁과 정치와 마녀재판과 화형이라는 무거운 내용을 다루고 있음에도 책장을 쉽게 넘길 수 있다. 물론 전쟁 포로가 된 그녀를 외면하는 프랑스 국왕과 어떻게든 그녀에게 마녀의 혐의를 씌워 죽이고 전쟁을 승리로 이끄려 하는 재판부의 잔혹 무도함에 치를 떨게 되는 후반부에서는 분노하며 책장을 넘기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녀는 결국 화형에 처해져 하늘의 별이 되었고 죽은 지 25년이 지난 후에야 그녀의 유죄 판결 재판에 대한 이의 신청이 진행되어 1456년 교황의 승인으로 복권이 되었다. 이후 19세기에 유럽의 권력을 장악한 나폴레옹이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잔 다르크를 프랑스 국가 상징으로 선언하였고 그녀는 1920년 마침내 교황 베네딕트 15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이로써 잔 다르크는 마녀에서 성인으로 변모한 전무후무한 인물이 된 것이다.

십 대 소녀가 신의 계시를 받고 한 국가의 군대의 총사령관이 되어 적을 무찌르다 포로가 되어 마녀 혐의를 받아 화형에 처해졌으나 국가의 상징이 되고 성인까지 되며 오늘날 가장 유명한 성인이 되었다는 이 믿지 못할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점이 예전부터 너무나 의문이었다. 그래서 찾은 책이 이 소설이다. 국내에는 잔 다르크에 대한 전문 서적이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나처럼 잔 다르크에 대한 관심이 높은 사람이라면 마크 트웨인의 이 소설 '잔 다르크를 추억하며'를 읽는 것을 강하게 추천한다.

#잔다르크를추억하며 #마크트웨인 #문학 #서평 #도란군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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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3 펭귄클래식 130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윤새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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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작가의 고전문학은 읽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나는 도스토옙스키 작품 도장 깨기를 하다 그의 장편 중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던 '악령' 초반부를 읽다 백기를 들었다. 거의 10년 전이었다. 그 이후로 악령 완독에 재도전하지 못하고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너무나 재미있게 읽어서 죽기 전까지 몇 번이고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도 아직 다시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 문학을 읽다 보면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은 구멍이 있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것 같다. 그 격정과 애수와 비탄과 울분과 환희는 내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소설은 도스토옙스키에 비해 재미가 덜하다는 세간의 평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도스토옙스키 전작주의도 완성 못했는데 어떻게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을 수 있을까라는 마음도 있었다. 이랬던 러시아 문학에 대한 내 심경의 변화는 우연치 않게 찾아왔다. 최근에 '악령'을 다시 펼쳐보았는데 도저히 다시 읽을 엄두가 안 나는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톨스토이가 생각났고 그나마 읽기 편할 것이라 짐작만 했던 '안나 카레니나'가 생각났다. '불륜 여성의 자살'이라는 개략적인 스토리가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과 비슷한 점이 '재미가 없다'는 톨스토이 작품에 대한 나의 편견을 조금은 해소시켰던 것 같다.

'안나 카레니나'에는 문학사상 정말로 유명한 첫 문장이 나온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봉건주의 제정 러시아가 급진적인 사회주의 물드는 것을 우려했던 보수주의자였던 톨스토이가 '변화의 무서움'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낸 문장이다. 그러나 정작 지금에 이르러서는 '행복의 보편성과 불행의 특수성'을 통찰하는 아포리즘으로 사용되고 있다. 톨스토이가 생전에 느꼈던 '진보의 흐름'이 당대에는 보편이 되었기에 이 해석의 변화는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불행한 가정'의 대표격인 주인공 안나의 불행은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결국은 그녀의 이기심과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속해 있던 사회의 보편성과 사랑했던 아들 등의 주변 인물들의 특수성을 깡그리 무시해버리고 오로지 '사랑밖에 난 몰라'라는 심정으로 추구했던 열정적인 탐욕의 사랑! 끝까지 아내를 사랑하고 가정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한 남편 카레닌의 존재를 끝까지 벌레 취급하고, 자신의 책임이 아닌 가정의 불행으로 혼란에 빠진 아들을 보듬어주지 않고, 자신에게 전념하지 않는 브론스키를 원망하는 안나에게 어떻게 행복이 찾아올 수 있을까? 그녀의 인생을 끝장낸 것 또한 자신의 감정의 격정 때문이었으니 안나는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을 것이다.

안나가 불행을 대표한다면 또 다른 주인공인 레빈은 행복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전형적인 러시아인'인 레빈은 격정적인 면모는 안나와 닮았으나 보수적이고 소시민적이고 찌질한 성격을 강하게 지니는 인물이다. 그가 키티와 결혼에 이르게 되는 과정도 결코 순탄치는 않았다. 진보의 물결로 요동치는 사회에서 고리타분한 농업을 주장하는 지주인 그에게 키티와 같은 적극적이고 사랑스러운 신여성 아내는 어쩌면 과분했을지도 모른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성공한 레빈의 행복한 결말은 레빈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톨스토이의 바램이 투영된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바랬던 '행복한 가정'의 모범을.

그러나 지금의 독자들은 레빈과 키티가 아닌 불행을 대표하는 안나와 브론스키에게 열광한다.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완벽한 아름다움을 보여준 안나와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버린 브론스키가 목격한 기차에 사람이 깔리는 사고는 두 사람의 불행한 미래를, 또한 안나의 비극이 그녀 자신의 성정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정해진 운명에 한 발자국씩 다가설 수밖에 없는 비극의 주인공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어쨌든 발걸음을 멈추고 이 죽음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음에도 이를 거부한 것은 안나 자신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기차의 궤도를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탈선' 외에는,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자해하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는 점에서 안나의 마지막 선택은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든 비극은 등장인물의 죽음이라는 결말을 가지지만, 그 과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다르다. 이 죽음이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과정이 보편적이어야 할 것이다. 모든 읽는 이들이 느끼기에 말이다.

#안나카레니나 #톨스토이 #고전문학 #서평 #도란군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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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시드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조호근 옮김 / 비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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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육체를 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남자의 이름은 '도로'이다. 그의 정신이 새로운 육체로 옮겨 가면, 그 육체의 원래 소유자의 정신과 그가 머물렀던 육체는 소멸한다. 이 무서운 능력으로 도로는 셀 수 없는 육체를 갈아치우며 수천 년을 살아왔다. 그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어쩌면 자신의 후손일지도 모를 다양한 초능력자들을 찾아냈고 서로를 교배시켰다. 기나긴 삶으로 미치지 않기 위해 그가 선택한 목표가 자신과 같은 불사의 '종'을 창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육체를 세포 단위로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여자의 이름은 '아냥우'이다. 그녀는 충분히 노력한다면 어떤 모습으로든 변신할 수 있고, 자신의 신체를 치유할 수 있다. 이 경이적인 능력으로 아냥우는 수백 년을 살아왔다. 그녀는 오랫동안 한 곳에 정착하여 마을 사람들을 보살피고 보호했다.

도로는 아냥우를 찾아와 기묘한 제안을 한다. '너의 손으로 묻지 않아도 될 불사의 아이를 갖게 해주겠다'라고. 도로는 강력한 능력을 지닌 아냥우에게서 자신의 목적을 이룰 희망을 찾게 된 것이다. 도로와 같은 '불사'의 능력을 가진 아냥우를 대상으로 한 교배 실험이 성공한다면 말이다. 아냥우 역시 결국에는 자신을 스쳐 지나갈 뿐인 수많은 이별로 고통받았기에, 도로의 제안을-일종의 청혼이라고도 할 수 있는-수락하고 그를 따라가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알지 못했다. 도로의 실험은 피험자를 배려하지 않는 무자비하고 참혹한 짓이라는 사실을. 도로는 이미 자신과 잠자리를 가졌고 그를 남편이라고 믿던 아냥우를 자신의 아들 초능력자인 아이작과 결혼시키려고 한다. 아냥우는 이를 비도덕적이라 생각해 아이작과의 결혼을 거부하지만 도로는 그녀를 강제로 결혼시키려 한다.

도로와 아냥우의 대결은 사실상 성립될 수 없다. 도로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아냥우의 육체를 취할 수 있기 때문.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 육체의 능력까지는 사용할 수 없는 도로는 불사의 종족을 만들 수 없게 되므로 아냥우를 기망한 것이다. 아냥우 자신은 돌고래나 독수리 등으로 변신하여 숨을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이 아끼는 일족이 도로에게 몰살당하게 될 것이므로 어쩔 수 없이 그에게 협력한 것이다.

50여 년 동안 도로와 함께 살며 아이들을 낳은 아냥우는 결국 도로의 폭력과 압제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 버린다. 그러나 아냥우가 과연 언제까지 숨을 수 있을까? 그와 그녀는 자살하지 않는 이상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인데. 긴 시간 동안 아냥우를 추격하던 도로는 결국 그녀를 찾아내고 다시 자신에게 협력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 거부하면 그녀의 가족들을 죽이겠다는 섬뜩한 협박과 함께. 그러나 도로는 왠지 모르게 아냥우를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였고, 아냥우도 그를 예전과는 다르게 대하기 시작한다. 과연 두 불사신의 앞날은 어떻게 될지.

문학의 세상은 참으로 넓고 깊은 것 같다. 평생 꽤 많이 읽어왔다고 자부하던 나조차도 이 소설과 같이 완전히 새롭고 경이로운 책을 이제서야 발견했으니 말이다. 경이로운 초능력을 지닌 자들이 꼭 히어로나 빌런이 되어 대승적인 정의를 추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개인적인 목표를 위해 능력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과 닮은 가족을 만들고자 했던 도로와 자신이 보호하는 가족을 만들고자 했던 아냥우처럼.

#와일드시드 #옥타비아버틀러 #SF #서평 #도란군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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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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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에게나 상실은 존재한다. 상실은 있거나 없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상실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 부재로 인한 크나큰 슬픔이 될 수 있다. 불의의 사고로 인해 생긴 지워지지 않는 한 가닥의 흉터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마음을 찢는 예리한 자상이 될 수도 있다. 상처 입은 자는 이를 원인으로 하여 스스로 삶을 마감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는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이다. 상실의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는 과정이, 그 원인이. 상실이 어떤 고통이나 트라우마의 표출이자 결과가 되는 것이다. 한 여성이 있다. 그녀는 어릴 적에 어떤 전조도 없이 처음으로 말을 잃게 된 후, 시간이 흘러 이혼을 하며 아이의 양육권과 일상을 빼앗기며 동시에 말을 다시 잃게 되었다. 신체 기능의 부재는 대부분의 경우 생계 수단의 부재로 이어진다. 그렇게 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여자가 선택한 것은 죽은 자들의 언어인 희랍어였다. 이 여성에게 희랍어를 가르치는 남자 또한 부재한 것이 있다. 그것도 아버지의 병력에서 이미 예견된 시력의 상실이라는 정말적인 부재. 그는 반대하는 가족들을 독일에 두고 홀로 한국에 돌아와 희랍어를 가르친다. 두꺼운 안경에 의지하며 힘들게 희랍어를 가르치는 그는 말도 표정도 없는 여성 수강생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죽은 사람과 같은 그녀의 얼굴에서 그는 두려움과, 또한 동질감을 느낀다.

또 트라우마이다. 하지만 내가 읽었던 한강의 다른 작품과는 묘하게 다르다. 치유까지는 아니지만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바다에서 반짝이는 등대를 본 느낌이랄까? 무언가 희망을 보기 직전의 상황이랄까? 여자는 말을 잃었지만 그 원인은 불가역적인 것이 아니며, 남자는 시력을 잃을 것이지만 아직 어렴풋이 볼 수는 있다. 원복 가능한 것을 상실한 사람과 상실이 예정된 사람이 찰나의 순간에 만나게 된다면, 서로에게서 희망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소설의 마지막 순간은 한 장의 그림이나 사진과도 같다. 상실의 늪에 빠진 두 사람이 만나 더듬더듬 서로를 이해하는 장면은 곧 트라우마의 해소의 순간이다. 우리가 고통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가학적 관음증 때문이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그 생김새만큼이나 내면도 다양한 인간들을 이해함으로써, 우리의 존재와 정체성은 더욱 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해는 경험에서 나오며, 소설은 가장 효과적인 경험의 수단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희랍어시간 #한강작가 #문학동네 #국내소설 #도란군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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