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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터리츠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9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3월
평점 :
제발트 전작주의의 여정이 어느덧 끝을 향해 가고 있다. 그의 평생의 저작 9편 중 남은 작품은 ‘현기증, 감정들’, 자연을 따라. 기초시’뿐.(이 글을 쓰기 전 ‘공중전과 문학’은 완독)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될 정도의 대문호로 평가받는 그의 작품은 그러나, 문학성과 가독성은 반비례한다는 문학계의 오랜 법칙의 완벽한 예시라 할 정도로 엄청나게 난해하다. 그의 작품은 본인이 명명한 ‘산문 설화’라는 문학사상 가장 독특한 문체를 구사하는데, 산문인지 운문인지, 사실인지 허구인지,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의 형식의 모호한 경계와 화자가 누구인지, 그가 누구의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그가 지금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지금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을 정도로 파편화됨과 동시에 장과 장의 구별이 되지 않는 텍스트가 독자의 마음을 어지럽히는데, 결국 독자는 아리아드네의 실을 사용해도 절대 탈출할 수 없는 미궁의 빠진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글을 읽어 나갈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이 모호함 그 자체 같은 글은 그 표현방식과는 다르게 분명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트라우마의 회복’이 그것이다. 개인 또는 집단의 잊고 싶은 과오를 과거의 기억을 통해 끄집어내어 회상하는 과정을 통해 트라우마의 상처를 봉합하는 것.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밖에 없는 멜랑꼴리한 텍스트는 제발트식 글쓰기의 특징이자 그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킥이 되는 것이다. 그가 이런 글쓰기 방식을 통해 집요하게 천작한 것은 자신의 민족이 행했던 인류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집단의 과오-나치와 유대인-였다. 그는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겪었던 이 민족의 의도된 침묵과 망각에 처음에는 의아해하다, 이윽고 분노했다. 이 침묵과 망각에 동조하지 않고 자신의 글을 통해 강하게 비판하는 방법을 선택한 그는, 이 시대의 가장 논쟁적인 작가가 되었고 이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이 작품 ‘아우스터리츠’이다.
이 작품은 주인공 ‘나’가 우연히 만난 노년의 건축사가 자크 아우스터리츠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히틀러의 유럽 장악 당시 유대인 어린이를 영국으로 구조하는 운동을 통해 네살 때 영국으로 건너가 살았던 아우스터리츠는 막연하고 모호한 유년시절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진실을 찾기 위해 떠났던 여정을 주인공에게 담담히 고백한다. 그 고백은 처연하며 동시에 아름답다. 우리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아우스터리츠의 고백을 통해 기억의 복구와 진실을 위해 그가 거쳐갔던 장소들과 사람들이 어떻게 나치에 의해 철저히 파괴당했는지 알게 된다. 그의 성 아우스터리츠는 나폴레옹의 격전지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책을 읽고 난 우리는 이 이름이 소설에서는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은 ‘아우슈비츠’를 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아우스터리츠가 끝내 표출하지 못했던 분노에 강하게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 분노는 우리에게 역사적 소명의식을 부여하며, 이것은 제발트가 인류에게 주는 책임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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