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 - 2008년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백영옥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1. 태초에 ‘칙릿’이 있었다

이 소설은 제 4회 세계문학상 당선작이다. 1억 원이라는 국내 최고 상금의 문학상이기에 당선보다는 ‘당첨’의 느낌이 강하지만 1회 당선작 <미실>을 필두로 회를 거듭한 작품들을 살펴보면 운 또한 실력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스타일>은 칙릿 소설이다. 칙릿(chick-lit)이란, 젊은 여성을 뜻하는 속어 ‘chick’에 문학을 뜻하는 ‘literature’를 결합한 신조어로 젊은 도시여성들의 일과 연애, 취향 등을 다루는 소설을 말한다. 이에 질세라, 국립국어원에서는 발 빠르게도 대안어로 ‘꽃띠문학’을 제안했다. 꽃띠란, 한창 젊은 여자의 나이를 가리키는 순우리말이다. 칙릿을 두고 문학에 젊은 피의 수혈이라는 등의 수식이 난무하는 것을 볼 때, 젊은 감각을 표현한다는 면에서 ‘꽃띠’는 설득력 있는 이름이다. 하지만 이미 ‘chick’에서 비하된 뉘앙스가 꽃띠라고 다르진 않아 보인다. 총 1,717명이 투표에 참여해 43%의 지지를 얻었다고 하니 대세를 따라야 하겠지만 이상하게도 ‘꽃뱀’이 연상되는 것은 나뿐인 걸까.

본격적으로 칙릿 소설은 90년대 중반에 나온 <브릿지 존스의 일기>를 시점으로 해서 최근 히트를 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쇼퍼홀릭>, <가십걸> 국내작품으로는 <달콤한 나의 도시>, <걸프렌드>, <쿨하게 한걸음> 등의 작품이 있다. 그리고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평범한 여자와 백마탄 왕자님’이라는 영원한 테마의 전형인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만나게 된다.

몇 년 전 키이라 나이틀리가 출연한 영화 <오만과 편견>을 처음 봤을 때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고전 중의 고전으로 알려져 있는 이 작품의 내용이 할러퀸류의 연애소설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18세기의 칙릿이라고 할까. 우리나라의 고전 작품에서도 이러한 구도는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이몽룡의 신분이 더 높다는 점에서 춘향전 또한 같은 카테고리에 속한다. 그렇다면 칙릿은 90년대 중반도, 18세기도 아닌 태초부터 있어왔던 장르인지도 모른다. 생태학적으로 강한 숫컷을 고르려는 암컷의 유전자가 전승에 전승을 거듭하듯이.

2. 그녀의 스타일

타이의 (주)기도문

랜드마크(홍콩의 거대 쇼핑몰)에 계신 아르마니여,

아버지의 구두가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프라다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쇼핑이 파리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센트럴(홍콩의 거대 쇼핑몰)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저희에게 남편의 비자카드를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수수료를 떼어간 자들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바닥난 은행 잔고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미쓰코시 백화점에 빠지지 말게 하시며,

윙 온(wing on, 홍콩 최대 여행사)에서 구하소서.

샤넬과 코티에와 베르사체, D&G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아멕스~

-데이비드 에반스《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지》,라이 씨Lai See 칼럼에서

서문처럼 소설의 앞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이 시가 이 작품의 내용을 암시한다.  패션지의 에디터로 일했던 작가의 경험이 관록으로 고스란히 묻어나 현장감이 살아있다. 이러한 핍진성은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으로 작용한다. 수많은 브랜드의 이름이 일사분란하게 열거되지만 허황된 소비문화에 대한 진부한 전언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패션지 기자라는 백조의 발과 같은 직업군에 대한 공허함, 욕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순수한 직물성을 무리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지점을 작가는 포착해 냈다.

‘아침은 커피, 점심도 커피, 저녁은 담배 한 갑 반. 다이어트 강박증에 빠진 도시여자들의 미니멀한 식단’으로 배를 채우는 주인공 이서정의 고향은 압구정동이다. 현대 백화점이 개장하던 날 엄마와 손을 붙잡고 입장했고 맥도날드 1호점이 한국에 상륙하던 날 ‘비장한 얼굴로 언니가 사온 치즈버거를 시식’ 했던 유년을 보냈다. 그리고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현장을 우유를 먹다가 목격한다. 그 다리를 건너던 버스 안에는 쌍둥이 언니 중 한 명이 타고 있었다. 그렇게 언니를 잃은 후 그녀는 삶은 언제든 갑자기 무너져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현재를 뺀다면 사람들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따라서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이 훌륭한 인생이라 생각한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원하는 것을 산다. 이것이 그녀 인생의 교리다. 그것은 에르메스라는 브랜드의 상표고 때로 샤넬이라는 이름의 레테르가 된다.

그런 그녀에겐 또 다른 욕망도 존재한다. 죽어가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 월드비전에 기부금을 내는 일이다. ‘굶주려 뼈만 남은 아프리카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무너지고, 새로 나온 마놀로 블라닉을 보면 그게 갖고 싶어서 잠도 안 온다. 이것도 저것도 해야겠고, 이쪽도 저쪽도 놓칠 수 없다.’ 이 두 개의 욕망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이서정은 또 다른 딜레마에도 봉착한다. 나는 레스토랑 체험기 칼럼을 쓰며 멋지게 나온 스테이크의 사진을 담아가야 하는 직업을 가졌다. 그러나 채식에 관한 책을 읽으며 윤리적이 되기 위해선 스테이크를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의문으로 혼란스럽다. 또 박우진을 이토록 미워하면서도 나는 왜 경외에 찬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인지.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구도의 ‘애증’이라는 감정선이다- ‘프라다에 대한 속물적인 욕망과 제 3세계 아이들에게 기부하고 싶은 선량한 욕망은 어떻게 화해’ 해야 할까. 이것은 작가의 고민이자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고민이다. 

3. 통속 앞에 무릎 꿇다

‘텔레비전 전파의 세례를 받은 드라마 키드’ 세대답게 주인공 이서정은 통속의 힘을 믿는다. 통속通俗에는 세상과 통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삶의 고단함을 세상의 모습을 보면서 위안 받고 희망을 품게 하는 힘이다. ‘노인과 아이를 동시에 열광하게 만드는 것.’ 어떤 장르가 이런 파급성을 가질 수 있을까. 나에게 안톤 체홉이 있다면 우리 엄마에겐 김수현이 있고 새언니에겐 공지영이 있다. 각자의 영웅으로부터 우리는 위로 받는다.

여기서 딜레마가 생긴다. 장르를 분명하게 구분할 것인가.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문학에 있어 가능한 일이고 의미가 있는 일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일본의 경우, 순수문학을 대상으로 한 아쿠타가와상이 있다면 대중문학을 지원하기 위한 나오키상1)도 존재한다.

한 예로 2004년 130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와타야 리사의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과 나오키상을 수상한 바 있는 에쿠니 가오리의 <반짝반짝 빛나는>은 문학성의 수준과 장르에 있어서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현재 국내 굴지의 문학상 수상작들로 우후죽순 칙릿류가 쏟아져 나오는 한국문단 현상은 문제가 있다. 올해의 화려한 수상작들을 열거하자면 세계 문학상에 백영옥의 <스타일>이, 오늘의 작가상에 고예나의 <마이 짝퉁 라이프>가, 창비장편소설상에 서유미의 <쿨하게 한걸음>이 당선됐다. 그나마 한겨레문학상의 <무중력 증후군>이 살짝 비껴간 셈이다.

칙릿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칙릿이면서 칙릿이 아닌 듯 포장하는 자기부정과 아예 작정하고 썼다라고 딱지가 붙는 자기비하식 발언이 나쁘다. 건강한 장르로의 성장을 방해하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아가씨 문학이라 일컫는 칙릿에는 된장녀와 쇼퍼홀릭이 등장해 재미와 소비만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다. 어디, 고도를 기다리는 베케트의 고상한 고뇌만이 통찰인가. 칙릿 안에는 통속적인 통찰이 존재한다. 그것이 장르 문학이 가진 특성이자 미덕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런 장점을 키우지 못하는 데는 기존의 문학제도가 가지고 있는 고루한 권위의식이 한 부분을 차지한다. 수상작을 심사하는 심사위원들은 ‘칙릿’의 작가도, 평론가도 아니다. 따라서 그들은 칙릿을 칙릿으로 보지 않거나 혹은 볼 수 없는 관점을 가졌다. A를 A가 아닌 B`로 해석해서 그 특성과 미덕을 희석시킨다. 여기에는 출판사 및 언론사의 사심도 개입된다. 상업성에서도 흥행하고 문학적 권위에서도 승리하려는 그들의 욕망 또한 프라다와 아프리카 난민 사이에서 고뇌하고 있는 이 ‘아가씨’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문학은 분명 대중과 함께 가야 한다. 칙릿을 두고 자본이 개입한 문학의 한 현상으로 보는 시각도 특정 독서소비층을 타깃으로 양산되었기 때문이다. 국내 굴지의 권위 있는 출판사 및 언론사의 이름을 등에 업고 고액의 상금을 내거는 데에는 그이상의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서다. 이러한 전략은 <브릿지 존스의 일기>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영화화되고 국내에선 <달콤한 나의 도시>와 <스타일>이 드라마화 되는 (<스타일>은 올 12월 방영을 앞두고 있다)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어디 이뿐인가. 조선일보가 주최한 대한민국 뉴웨이브 문학상의 첫 당선작 <진시황 프로젝트>의 경우 제작비 300억을 투입하는 대작으로 뤽베송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헐리우드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다. 문학과 영상예술이 상생하는 긍정적인 구도다.

다양한 많은 장르들이 제각각 발전 할 때 문학이란 숲은 좀 더 풍요로워 진다. 이렇게 기특한 장르 문학을 위해 ‘꽃띠문학상’을 제정해 주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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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쇼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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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에 이은 김영하의 장편이다.

빛의 제국 이후 1년만에 나온 것이라고 하니, 연재 소설이었다는 것을 가만하더라도 정말 괴물이 아닐 수 없다.

문단에 김영하 같은 작가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름지기 글쟁이란 이래야하지 않을까 싶은, 그런 역할모델이 되어 준다.

 

이 소설과 황석영의 바리데기를 읽으면서 연재소설과 (퀴즈쇼는 조선일보에, 바리데기는 동아일보에 올해 연재되었다.) 일반 장편소설과의 차이점을 느꼈다. 물론 책으로 엮을때 손을 다시 볼 수 있겠으나 그렇게되면 연재소설의 의미도 없어질 뿐더러 작품의 얼개도 무너져 다른 작품이 될 공산이 크고, 무엇보다 작가가 그걸 또 쓰고 싶겠는가 싶다.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처럼 몇십년을 두고 개정판을 찍는다면야 한 십년쯤 흐른 후 좀 고쳐볼까 하겠지만 지금 당장 손을 떠난 작품을 또 주물러야 한다는건 고역일 터. 나같아도 그냥 갈 것 같다.

따라서 연재 소설은 그때그때 써서 보내야 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구성을 조율할 시간과 여유가 없다.

퀴즈쇼도 좀 길다. 4분의 1정도는 줄여도 상관 없다. 서두가 너무 긴데 그부분이 지루하다. 혹, 너무 빨리 끝날까 싶어서 연재하면서 좀 늘인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하다.

 

인생을 하나의 퀴즈쇼로 은유한것과 가장 어려운 퀴즈는 바로 인간이라는 점 등의 아포리즘이 마음에 든다.

88만원 세대라고 불리우는 이 시대의 20대에 대하여 쓰고 싶었다는데 재밌는건 정작 본인이 20대였을 당시에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같은 작품이 나왔다. 그런데 40대에 들어서니 <퀴즈쇼>같은 작품이 나온다. 주인공들이 1인칭의 같은 20대 시점임에도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이다. 40대의 작가가 20대의 탈을 쓰고 말하는 느낌이랄까. 관찰자 시점이 느껴진다.

정말 20대라면 저런 말은 하지 않을 텐데, 재밌으라고 쓴 부분에선 시큰둥하게 되는 그런 시츄에이션이 벌어지는 것은 내가 20대이기 때문이다. (2주 후면 30대가 된다...- -;)

 

제목이 퀴즈쇼이기 때문에 잡다한 상식들이 쏟아진다. 몇몇은 낯이 익은 책 내용과 영화들이어서 역시 내 레이다 망에 모두 걸리는군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가 한때 진행했던 라디오 프로그램 <문화 포커스>에서 들었던 내용들이었다.

역시나. 그는 1년 남짓 진행했던 프로그램에서 섭취한 박학다식상식을 작품에 그대로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퀴즈쇼라는 제목이 나올법하다.

그의 문학성과 접목한 상업성이 그의 천재성을 말해준다.

 

작가는 많은 경험을 하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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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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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타 리뷰에 나와 있는것처럼 단숨에 읽었는데 그건 재미있었다는 말도 되고 쉬웠다는 얘기도 된다.

왜냐면 바리데기 설화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 이기 때문이다. 그 기본 얼개에 오늘의 사회 문제를 덧씌운다.

바리데기 설화로 뮤지컬을 만든적도 있다는데 그건 예전에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처럼 입양아 문제를 건드렸다고 한다. 자신을 버린 부모를 만나기 위해 고국을 찾는 바리, 바리들.

 

황석영의 바리는 북한에서 강을 건너 중국으로 몰래 잠입한 후 죽음의 밀항선을 타고 영국으로 가게 된 여자다. 특이한 것은 어린 시절 혹독하게 병을 앓고 나서부터 신기가 생겼다는 것이다. 동물과 소통할 수 있고 사람들의 과거를 볼 수 있게 됐다. 할머니가 신기가 있는 사람이었으니 내림일 수도 있지만 그런 특별한 능력은 바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 부분이 있기 때문일까. 어느순간에서는 마술적 리얼리즘도 느껴지는데 거기에 황석영 특유의 입담까지 버무려져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심청>도 그렇게 썼겠지. 다음에는 어떤 설화를 가지고 나올지 궁금하다. 춘향이나 황진이, 자청비, 제주삼승할망, 오늘이.... 아직도 많네요. 황석영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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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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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가게에서 오랜 고민 끝에 고른 영화는 대개 별 볼일이 없다.
기대가 커서 그런가? 별 생각 없이 빼들고 집에 와서 별 생각 없이 보기 시작한 영화들 중에는 월척이 꽤 있다. 책도 마찬가지다.

오랜 시간 손에서 조물락 거리면서 작가의 생김새, 해설의 평, 역주의 프로필, 발행연도, 인쇄의 횟수, 저자와의 협의에 의해 인지가 붙여졌는지 생략됐는지, 출판사 위치.....이것저것 참견하다보면 주인공은 이미 물 건너 상태.
때론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작품, 그 자체를 보는 용기도 필요하다.
이 책은 누가 사길래 옆에서 한번 따라 사본 작품.

인간에게는 공통된 특성이 존재한다.
죽은 후에도 자신의 존재를 세상이 기억해 주길 바라는 것.
이름을 남기기를 원한다는 점에서는 명예에 대한 욕구이고 분신을 남기기를 원한다는 점에서는 종족 보존에 대한 본능의 욕구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여 항상 여기가 아닌 저기를 꿈꾸게 된다는 것 등. 인간이면 누구나 갖게 되는 공통된 심리, 이 작품은 그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학교 선생인 한 남자가 어느 날 사구(모래언덕)로 곤충 채집 차 휴가를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다.
그리고 그의 행방은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은 그를 실종자로 불렀다가 결국 사망자라는 낙인을 찍는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되었는가.
선생이라는 안정적이고도 무료한 일상이 권태스러운 이 남자는 동료들의 질투를 내심 즐기며 은밀한 여행 계획을 세운다.
그는 곤충 채집이 취미인 것이다.
새로운 종을 발견해서 곤충대감에 이름을 남기는 게 이 남자의 꿈이다. 그러기 위해서 남자는 좀길앞잡이의 변종을 찾기 위해 모래언덕으로 떠난다.
거기서 그는 뜻밖의 재난을 맞게 된다. 마을 주민의 계략에 의해 모래 구덩이에 갇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남자는 그 날부터 그 모래 구덩이 안의 여자와 함께 모래에 깔리지 않기 위해 매일매일 모래를 삽으로 파 나르며 살아간다.

남자는 모래의 유동성에 매혹되어 있었다.
모래는 쉬는 법이 없다. 끊임없이 흐르고 이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래는 생존하기엔 적합한 환경이 아니다.
건조하고 유목민처럼 항상 흘러 다니고 있으니까. 하지만 사막에도 꽃은 피고 벌레가 산다.
악조건에 맞춰 자신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최인석의 심해에서라는 소설이 생각난다.
모래의 여자가 모래의 불모성에 의해 변종 되어 간다면 심해에서는 말 그대로 심해라는 공간-거기서는 사창가로 표현된다-에 길들여진 인물들이 나온다.
사막이란 물이 없는 공간, 심해란 빛이 없는 공간, 둘 다 생존하기엔 악조건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 나은 공간으로의 탈출을 택하기 보다 지금 처한 공간에의 적응을 선택한다.
심해어가 빛과 산소가 풍부한 곳으로 나오게 되면 압력에 의해 자폭해 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인간에게는 현실이 가하는 폭력성에 길들여지는 특성이 있다.
폭력은 중독된다. 가해자에게도 피해자에게도.
프로이트의 말처럼 매저키즘은 자기 자신에 대한 새디즘이므로.

모래가 나오니 문득 엉뚱하게도 이런 말이 떠오른다.
산을 오르지 못하는 이유는 산이 높기 때문이 아니다 내 신발에 묻은 모래 한 알 때문이다.
나는 지금 그 모래 한 알이 너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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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국의 딸들 - 나남창작선 29 나남신서 105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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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처음 만났던 것은 중학교 무렵이었다. 그러고보니 꼭 십년만에 다시 읽는 셈이다.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만이 기억날 뿐, 내용은 거의 잊고 있었는데 딱 하나의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넷째딸 용옥이가 시아버지에게 겁탈 당하는 장면. 책에선 ‘당할뻔한’ 것으로 나오지만 내 기억 속엔 ‘당하는 것’으로 저장되어있는걸 보니 아마도 어린나이에 그 내용이 무척이나 충격적이었나 보다. 유년시절 내게 영향을 준 책들을 커서 다시금 읽어보면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드는데 그 착각은 향수이기도 하고 때론 악몽이기도 하다.


한 집안의 4대에 걸친 끔찍한 일대기를 읽으며 작가의 입담에 경탄해 마지않았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보다도 더 비극적이고 다섯 딸의 캐릭터는 햄릿보다 더 강렬했다. 소설 내내 음산하게 읊조려지는 ‘비상 먹은 자의 후손’이라는 수사는 다섯 자매의 운명을 암시하는 것처럼 김약국의 집안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비상을 먹고 음독 자살한 한 어머니와 살인을 하고 객사한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비극의 씨앗이 김성수, 바로 김약국이다. 김약국은 길러준 큰어머니인 송씨의 바램으로 그 비극의 배경인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통영에 정착한다. 그 후 정 없이 혼례를 치르고 김약국은 다섯 딸을 보는데 그 자매들에겐 각자의 무서운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욕심 많은 큰딸 용숙은 일찍 과부가 되어 아들의 주치의와 불륜행각을 벌이다 영아살해라는 추문을 내고 둘째 딸 용빈은 집안의 아들격으로 공부를 많이 한 신식여성이지만 몰락해 가는 집안으로 인해 약혼자 홍섭에게 배신을 당한다. 셋째 딸 용란은 자매 중 가장 미모가 출중하지만 금수와도 같은 본능만 살아있는 여자로 집안의 머슴인 한돌이와 눈이 맞아 정사를 벌이다가 탈로가 난다. 그 후 처녀가 아니라는 흠으로 성불구에 아편장이한테 시집을 가게 된다. 매일 남편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살던 중 돌아온 한돌이와 도망하려다가 남편, 연학에게 어머니 한실댁과 한돌이가 도끼에 찍혀 죽고 용란은 정신을 놓고 만다. 그 후 비극의 손길은 넷째에게 뻗쳐서 언니 용란을 사모하던 남자에게 시집 간 용옥은 남편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외롭게 생활하던 중 시아버지에게 겁탈을 당할 뻔 한다. 충격 속에 남편을 찾아 부산으로 도망한 용옥은 남편 기두와 길이 엇갈려 다시 통영으로 돌아오던 중 배가 침몰해 아이와 함께 죽는다. 막내 용혜에게는 직접적인 재앙이 오진 않지만 어린 시절부터 몰락해 가는 집안의 흉측한 사건들을 보아내는 것 자체가 큰 형벌이다.


작가가 처음 이 작품을 기획 했을 당시의 화두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운명’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 데스티네이션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인 힘, 우리가 흔히 운명이라 일컫는 그 무언가가 사람의 명이 다하면 어떻게 해서든 저승으로 데리고 가는걸 보면서 정해진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인간은 어쩌면 그 운명의 길을 서서히 걷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싶었다. 그 목적지는 아마도 죽음일 것이고.

매우 운명론적인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자신의 운명에 반항하며 역행하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조차 모두 그 사람의 운명의 발자국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발에 꼭 들어맞는 발자국을 디디며 가고 있는 것이라고. 작가는 운명에 대한 정의를 마지막에 이렇게 내린다.

‘운명은 죽음이다’

죽음은 인간의 최종 목적지이고 모든 생명체의 마지막은 죽음으로 귀결된다. 고로 인간은 그 공동 운명체 속에 속해있다. 죽음을 바라보는 똑 같은 눈들을 갖고 살고 있는 것이다. 문득, 지난겨울 안면도의 개암사에 갔을 때가 생각난다. 유치원 생 정도 되었을까? 예닐곱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의 영정이 불전에 모셔있었다. 영정 안의 아이는 해맑게 웃고 있었고 향로에선 은은한 향이 피어났다. 올 때 순서는 있어도 갈 때 순서는 없다더니 나보다 늦게 출발한 아이는 나보다 빨리 도착해 있었다. 어쩌면 인간에겐 어떠한 죄도 없을지 모른다. 자신이 타고 태어난 운명대로 사는 것이라면 인간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죄라면 태어난 죄 밖에 없을 게다.

한 집안 내력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백년동안의 고독’의 가브리엘 마르케스가 생각났다. 용숙, 용빈, 용란, 용옥, 용혜 그들 모두 가혹한 운명 앞에 고독하지 않았을까? 우리 나라에서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면 박경리 선생이 받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처럼 세계적인 작가의 대열에 오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대가다. 작가의 명성은 그 작가의 성실함과 고뇌와 외로움에 비례한다. 작가 박경리는 그 존재만으로도 우리 문학의 커다란 산(山)이다. 그렇다면 그의 외로움은 얼마나 깊고 높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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