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약국의 딸들 - 나남창작선 29 나남신서 105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이 작품을 처음 만났던 것은 중학교 무렵이었다. 그러고보니 꼭 십년만에 다시 읽는 셈이다.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만이 기억날 뿐, 내용은 거의 잊고 있었는데 딱 하나의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넷째딸 용옥이가 시아버지에게 겁탈 당하는 장면. 책에선 ‘당할뻔한’ 것으로 나오지만 내 기억 속엔 ‘당하는 것’으로 저장되어있는걸 보니 아마도 어린나이에 그 내용이 무척이나 충격적이었나 보다. 유년시절 내게 영향을 준 책들을 커서 다시금 읽어보면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드는데 그 착각은 향수이기도 하고 때론 악몽이기도 하다.


한 집안의 4대에 걸친 끔찍한 일대기를 읽으며 작가의 입담에 경탄해 마지않았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보다도 더 비극적이고 다섯 딸의 캐릭터는 햄릿보다 더 강렬했다. 소설 내내 음산하게 읊조려지는 ‘비상 먹은 자의 후손’이라는 수사는 다섯 자매의 운명을 암시하는 것처럼 김약국의 집안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비상을 먹고 음독 자살한 한 어머니와 살인을 하고 객사한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비극의 씨앗이 김성수, 바로 김약국이다. 김약국은 길러준 큰어머니인 송씨의 바램으로 그 비극의 배경인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통영에 정착한다. 그 후 정 없이 혼례를 치르고 김약국은 다섯 딸을 보는데 그 자매들에겐 각자의 무서운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욕심 많은 큰딸 용숙은 일찍 과부가 되어 아들의 주치의와 불륜행각을 벌이다 영아살해라는 추문을 내고 둘째 딸 용빈은 집안의 아들격으로 공부를 많이 한 신식여성이지만 몰락해 가는 집안으로 인해 약혼자 홍섭에게 배신을 당한다. 셋째 딸 용란은 자매 중 가장 미모가 출중하지만 금수와도 같은 본능만 살아있는 여자로 집안의 머슴인 한돌이와 눈이 맞아 정사를 벌이다가 탈로가 난다. 그 후 처녀가 아니라는 흠으로 성불구에 아편장이한테 시집을 가게 된다. 매일 남편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살던 중 돌아온 한돌이와 도망하려다가 남편, 연학에게 어머니 한실댁과 한돌이가 도끼에 찍혀 죽고 용란은 정신을 놓고 만다. 그 후 비극의 손길은 넷째에게 뻗쳐서 언니 용란을 사모하던 남자에게 시집 간 용옥은 남편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외롭게 생활하던 중 시아버지에게 겁탈을 당할 뻔 한다. 충격 속에 남편을 찾아 부산으로 도망한 용옥은 남편 기두와 길이 엇갈려 다시 통영으로 돌아오던 중 배가 침몰해 아이와 함께 죽는다. 막내 용혜에게는 직접적인 재앙이 오진 않지만 어린 시절부터 몰락해 가는 집안의 흉측한 사건들을 보아내는 것 자체가 큰 형벌이다.


작가가 처음 이 작품을 기획 했을 당시의 화두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운명’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 데스티네이션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인 힘, 우리가 흔히 운명이라 일컫는 그 무언가가 사람의 명이 다하면 어떻게 해서든 저승으로 데리고 가는걸 보면서 정해진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인간은 어쩌면 그 운명의 길을 서서히 걷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싶었다. 그 목적지는 아마도 죽음일 것이고.

매우 운명론적인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자신의 운명에 반항하며 역행하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조차 모두 그 사람의 운명의 발자국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발에 꼭 들어맞는 발자국을 디디며 가고 있는 것이라고. 작가는 운명에 대한 정의를 마지막에 이렇게 내린다.

‘운명은 죽음이다’

죽음은 인간의 최종 목적지이고 모든 생명체의 마지막은 죽음으로 귀결된다. 고로 인간은 그 공동 운명체 속에 속해있다. 죽음을 바라보는 똑 같은 눈들을 갖고 살고 있는 것이다. 문득, 지난겨울 안면도의 개암사에 갔을 때가 생각난다. 유치원 생 정도 되었을까? 예닐곱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의 영정이 불전에 모셔있었다. 영정 안의 아이는 해맑게 웃고 있었고 향로에선 은은한 향이 피어났다. 올 때 순서는 있어도 갈 때 순서는 없다더니 나보다 늦게 출발한 아이는 나보다 빨리 도착해 있었다. 어쩌면 인간에겐 어떠한 죄도 없을지 모른다. 자신이 타고 태어난 운명대로 사는 것이라면 인간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죄라면 태어난 죄 밖에 없을 게다.

한 집안 내력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백년동안의 고독’의 가브리엘 마르케스가 생각났다. 용숙, 용빈, 용란, 용옥, 용혜 그들 모두 가혹한 운명 앞에 고독하지 않았을까? 우리 나라에서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면 박경리 선생이 받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처럼 세계적인 작가의 대열에 오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대가다. 작가의 명성은 그 작가의 성실함과 고뇌와 외로움에 비례한다. 작가 박경리는 그 존재만으로도 우리 문학의 커다란 산(山)이다. 그렇다면 그의 외로움은 얼마나 깊고 높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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