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
와타야 리사 지음, 정유리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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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19세의 최연소 수상자 와타야 리사.

최근 들어 일본의 문학상 수상자의 연령대가 점점 어려지고 있는걸 보고 나는 문학도 어쩔 수 없군하고 생각했다. 젊은 시류에 휘둘려 권위 있는 문학상의 위상이 실추 되어간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래도 일본놈들,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들이 아니라며 일본어를 전공한 오빠는, 뭔가 있으니까 당선된 걸 거라고 했다. 하지만 질투심이었을까? 나는 별 기대 없이 읽었지만 오빠의 말이 맞다는 걸 인정해야했다. 아쿠타가와상 심사위원들의 심정을 알 것도 같았다. 버리기엔 아깝고 상을 주기엔 너무 어리고. 에라,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이 틀린 건 아니었다고 말해 주고 싶다. 우선 예술에 있어서 나이는 볼게 아니고 인정할 건 인정하는 솔직한 문화는 존경할만 하다. 이 ‘천재문학 소녀’가 수상한 아쿠타가와상은 올해로 130회를 맞이했다. 그리고 지금 내 옆의 게시판에 붙어있는 프린트 물에는 2004년도 ‘현대문학상 48회’, ‘이상문학상 28회’, ‘황순원 문학상 3회’가 적혀있다. 일본과 우리의 문학 차이가 이건가? 노벨 문학상이 멀게만 느껴지는 이유가 이런 건가 싶었다.

와타야 리사. 17세에 <인스톨> 이라는 소설로 38회 문예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그리고 2년 후 발표한 두 번째 작품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으로 일본에서 가장 저명한 아쿠타가와 상을 받은 것이다. 그러니 ‘천재문학 소녀’라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나이 어리다고 우습게 보았지만 가능성이 있는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섬세한 묘사, 정곡을 찌르는 표현, 현상의 본질을 볼 줄 아는 관점. 그 나이이기에 가능하면서도 그 나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렇게 빠르고 큰 축복들이 이 어린 작가가 앞으로 문학을 하는데 있어서 별 도움이 안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등단한 최인호 같은 작가도 있지만 신춘문예에 4번 떨어지고 5번째 붙으면서 그래도 운이 좋았다고 말하는 박범신 같은 작가를 나는 더 쳐주기 때문이다. 그는 낙선의 경험이 문학적 세계관을 더욱 점철 시켰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문학에의 사랑은 열정이 아니라 순정이란다. 은근히 끊어올라 평생을 질기게 타오르는 것. 어쩌면 열정보다 더 강한 것이 순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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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인명사전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세계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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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편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노통의 글쓰기에 질력이 난다. 어째서 노통은 소설을 소설답게 쓰지 않는지 모르겠다. 이게 자신의 글쓰기의 특징이라면 야 할 말없지만 내가 생각하는 소설의 정의와 그녀의 방식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소설이란 말 그대로 픽션이다. 작은 우주와도 같은 하나의 창조적 세계. 그래서 소설에 등장하는 지명과 인물이 실제로 있을 법하지만 실은 가상의 존재였다는 걸 알때는 배신감과 분노와 함께 그 작가에 대한 질투심이 솟구치는 걸 느낀다.

나를 이렇게 감쪽같이 속이다니. 그런 글을 쓰다니 대단해 라고.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 자전적 소설은 딱 질색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경우는 조금 용서가 되지만 대놓고 자전적 이야기를 하는 소설은 글쎄, 그 작품을 두고 소설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사건, 즉 이야기로 보여주기가 아닌 설명 투의 서사 방식. 그것도 절제되지 못한 감정 과잉의 상태로 끌어가는 소설의 경우에도 짜증나기는 마찬가지다.

작가가 독자에게 자신의 세계관을 억지로 주입시키고 설득해내려고 하는 게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아멜리의 경우도 유년시절에 대한 집착이 느껴진다. 이 소설도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의 유년기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동경의 연장선에 있다.

노통, 자신의 유년기가 그런 시절이었던 거 같다. 이래서 비슷한 내용은 두 번 다시 다른 소설에 인용해서는 안 된다. 그건 작가의 신뢰도 문제다. 취향은 어쩔 수 없지만 서도. 하지만 늘 유혹 받는 일이기도 하다. 소설가 소설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듯이.

노통의 저런 글쓰기(타당성 없이 무턱대고 찬미하고 자기 생각대로 끌고 나가기)가 언제까지 갈려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얼마 안가 아멜리 신드롬은 쏙 들어갈 게다. 이 소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뭐에 대해 쓰려고 한 것인지 마지막 작위적 반전에서는 이 책을 안 사고 빌려보길 잘했다는 생각뿐이었다.

오, 노통. 이런 식의 글쓰기가 유럽에선 먹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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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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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에 이어 발표한 소설이다. 정신분석학적 표현을 보자면 전작과의 연장선에 있는듯도 하나 조금 더 나아가 여기에 생물학을 입혔다. 인간의 정신이 생물학적 육체의 생리에 근간을 이룬다는 것을 알았다는듯 이 소설은 그 전작들 보다 훨씬 농밀하고 객관적이며 정곡을 정확히 집어내고 있다. 그것은 기억보다 마음보다 육체가 더욱 정직한 까닭이 아닐까 싶다.

정신분석학에 가미된 생물학적 지식들. 그리고 절묘하게 짜여진 상황설정과 구성, 형식, 시점들. 정말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매우 성실한 작가다. 많이 공부하고 연구했다는게 작품 곳곳에 드러난다. 그래서 임상사례 소설로도 손색이 없다고들 하지만 혹자는 오히려 이런점을 꼬집어 그건 소설이 아니라고도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 소설은 이런게 아니라고. 하지만 어디 박완서 아줌마 식의 구구절절 이야기 보따리만이 소설이라고 할 수 있나. 소설이란 말그대로 극적 드라마가 미덕이다. 하지만 요즘 나오는 소설들을 가만보면 작가가 정말 '날로 먹으려'하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현장경험 없이(이건 발로 안 뛰고 책상머리 앞에서 상상만 했다는것이다) 그리고 전문지식 없이(이건 누구나 다 아는 내용을 새삼 다시 말하고 있다는것 또는 감성만으로 밀어부친다는 것이다) 쓰여진 작품들을 보면 한없이 가볍다는 생각 뿐이다. 여기서의 가벼움은 하루키의 태산보다 무거운 가벼움이 아니다. 그냥 깃털처럼 후 불면 꺼져버릴듯한 가벼움.

그에 비하면 김형경의 소설들은 아주 오래도록 읽어야 한다. 한문장을 그냥 넘어감이 없다. 낯선 단어와 유려한 표현들이 자꾸 눈길을 걸고 넘어진다. 장점이 곧 단점이 된다고 그런 이유로 김형경 소설은 스피드는 좀 떨어진다. 박진감이나 빨려드는 재미가 덜한 편이다.

또 김형경은 단어 만들어 내기로도 유명한데 문맥상의 의미는 알겠는데 막상 사전을 찾으면 없는 단어들이 많다. 뉘앙스로 만들어내는 자신만의 낱말들이 많은 작가. 그건 다독과 문장을 만드는 오랜 훈련에 의해 육화된 글쓰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형경의 소설은 꽉찼다. 그래서 소장할 가치가 있다는 것. 독파하고 나면 마음이 뿌듯하다는 것.

이 소설의 매력은 흥미로운 구도에 있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는 두 가지 사건. 그리고 그 사건을 각각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촛점화자의 이야기. 또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내용은 성(性)에 관한 담론인데 성과 죽음의 상관관계로 정신분석학(프로이트의 관점)과 더불어 생물학적 지식이 삽입되어 참 재밌다. 이를테면 오르가즘은 죽음의 순간을 짧게 맛보는 것이라는 얘기가 있는것처럼 섹스는 에로스와 타나토스(죽음충동)의 결합체란다. 그리고 이를 가장 잘 나타내는 우리신체 부위의 낱말이 있는데 그게 바로 '젖무덤'이다. 아하, 무릎을 치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읽게 되는 소설이다. 지적 충만감을 맛 보고 싶다면, 사랑에 대한 좀더 적날한 진실을 알고 싶다면 지금 이 책을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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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
천운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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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의 두번째 소설집

그로테스크한 탐미주의자. 그녀의 글에선 짐승의 냄새가 난다. 작품들을 읽는 내내 육식성 동물의 끈적끈적한 체취와 냉철한 눈빛이 시종일관 떠올랐다.

그녀의 데뷔작 ‘바늘’에서 보여줬던 분위기가 작품집 전체에 퍼져있었다. 그래서일까. 각각의 작품들이 연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수면 밑으로는 조금씩 연결되어 있는게 느껴졌다.
이를테면 같은 사건을 두고 이 소설에서는 이 인물의 시점으로 다른 소설에서는 저 인물의 시점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 그러면서 자신의 전사를 내보이고 있었다. 소설 속 주인공의 전사가 아닌 작가 바로 자신의 전사. 작품들을 퍼즐삼아 어렴풋하게 작가를 연상해 봤다. 할머니의 가슴에 집착하고 엄마의 존재에 대한 동경과 두려움, 아버지에 대한 거리감과 애증을 가진 아이. 작가가 혹 조모에 손에 키워진 것이 아닐까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그리고 이 작가에게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첫 번째 소설집은 아직 못 봤지만 두 번째 소설집에서까지 자신의 내면으로 파고드는 것은 어찌보면 아마추어 같다는 느낌이 든다.
자신의 내면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것. 작품들의 연계성은 하나의 사건이 픽션이 아닌 실화이고 그건 곧 작가의 이야기라는 공식을 제시한다. 그러면서 작가가 자신의 트라우마로 응석을 부리고 있는건 아닌가하는 의문이 든다. 작가 천운영의 스타일은 인정하지만 그녀가 아직 프로작가라는 것에는 못미더운 기분을 갖게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스타일은 마음에 든다.

요즘 느끼는것이지만 이 세계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산재해 있어서 우리는 늘 선택을 강요받는다. 선택과 깊이.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절실한 코드는 바로 이게 아닐까. 무언가를 선택해야하고 그 폭을 좁혀서 그것에 좀 더 깊이 들어가야하는 과정.
앞으로 21세기는 편집광 만이 살아남는단다. 신의 경지에 다다를만큼의 완벽성. 자신의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한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 치밀함. 이야기가 좀 삼천포로 빠졌지만 아무튼 남과는 다른 차별성이 있어야 살아남는다. 자신의 스타일을 완벽하게 추구해야만 그 사람의 이름이 브랜드화 되는것이다. 그런면서 천운영은 좋은 점수를 받는다. 자신만의 색을 가졌다는 것은 굉장히 유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입지가 굳혀진 것은 그의 소설들이 과학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 방면의 프로다. 얼마 전 안 사실이지만 그는 과학잡지의 기자로 일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그는 과학적 시각으로 보는 법을 익혀왔다. 개미를 16살때부터 12년동안 쓴 작품이라고 하니 알만하지 않나.

나만의 스타일을 가질 것. 장르를 선택하니 이제 스타일이 남았다. 그러고보면 인생은 선택의 연속으로 흘러간다. 눈 앞에 보이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선택이다.
자장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물론 짬짜면을 먹으면 된다- 애인을 만나러 갈까 도서관에 짱 박혀 글을 쓸까 -물론 난 쪼르르 달려 나간다- 설거지를 할까 말까 -결국은 엄마에게 한대 맞고 한다- 이런 선택의 과정 속에 지친 우리를 위해 술집의 안주 ‘아무거나’가 탄생했고 여자들은 자신들의 고민 없이도 어디로든 잘만 데려다 주는 소위 ‘리드하는 남자’를 좋아한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두 가지가 분명 존재한다. 이 세상에 돌연히 나온것과 홀연히 사라지는 것. 아무도 이 상황은 선택할 수 없다. 물론 자살을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나같은 지독한 운명론자에게는 씨알도 안먹히는 소리다. 그건 제 명대로 살다 간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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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들의 섬 밀리언셀러 클럽 3
데니스 루헤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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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백 페이지에 가까운 이 소설을 읽는데 하루를 몽땅 바쳤다. 어쩌면 오늘 대구에 갔을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시간을 소진하는 것보다 이 소설 한편에 모두 쏟아 부은게 탁월한 선택이었다.

공포물인가 했더니만 스릴러였다. 스티븐 킹 소설은 읽은게 거의 없지만 비슷한 류 일 것이다. 그래서 하루만에 읽은게 가능했겠지만. 그렇다고 킬링 타임 용으로써의 작품 정도는 아니다. 책 표지에도 있는 말처럼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갖춘 소설이다. 이 작가의 전작인 ‘미스틱 리버’도 보고 싶다. 이 소설이 영화화 되고 있다던데 식스센스처럼 결말이 백미인 그런 영화가 될게다. 그래서 이 책의 리뷰에서 사람들이 모두 조심스러웠나 보다.


식스센스가 한창 극장가에서 상영될 무렵 표를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는 사람들에게 버스를 타고 지나가던 한 남자가 “그거 범인 누구야!” 라고 말했다는 것처럼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 충동적인 살의를 느낀다- 이 책의 반전을 리뷰에 모조리 풀어 놓는다면 아마도 이 출판사에선 내게 테러를 가할지도 모른다. 타인의 행복을 앗아가는 그런 파렴치한은 되지 말자.

<1954년, 외딴섬의 정신 병동에서 환자 한명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조사를 위해 파견되 두 명의 연방 보안관은 실종 사건이 환자들을 대상으로 불법 시술을 일삼는 병원측의 비리와 관련있다는 추측ㅇ르 하곤 병원의 비리를 밝히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 중증 정신 병자들만 수용한 병동으로 잠입하려 한다. 하지만 몰아닥친 강력한 폭풍우로 정신 병동의 보안은 마비 상태에 이르고, 정신 병자들이 병동에서 쏟아져나오면서 연방 보안관들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다.>


책 표지에 간략하게 소개된 줄거리는 대략 위와 같다. 여기서 더 이상 무언가를 말한다면 나도 파렴치한이 될 것이기에 내용에 대한 언급은 피해야겠다.

결말에서 난 작가의 시각이 궁금했다. 하드 보일드로 끝낼 것인가, 휴머니즘으로 끝낼 것인가에 대해. 결과는 내 생각과는 달리 하드 보일드하게 끝나 버렸고 난 작가가 인간에 대한 애정이 부족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쪽이 오히려 완성도가 더 높겠다 싶은 생각이다.


독자들을 감쪽같이 속인 작가가 참 깜찍하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나 추리물은 3인칭 전지적 시점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걸 느끼면서 그제 읽은 뒤렌마트의 ‘노부인의 방문’에서 나왔던 마녀사냥이 생각났다. 미친다는 개념도 그런 게 아닐까 싶은데 모든 사람이 한 사람을 미치게 만들 수 있고 그것에서 열외 당하지 않으려면 집단에 복종해야 한다는 면에서 비슷한 개념이지 않나. 진실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고. 역시 집단이란 무서운 존재다. 군중, 시청자, 여론, 네티즌들로 표현되고 있는 집단들의 광기 혹은 파워를 보라. 그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무엇에도 관철 시킬 수 있다. 드라마의 결말을 좌지우지하고 마녀재판처럼 연예인 하나를 잡아다가 사장 시켜 버린다. 그들의 하나하나는 선량하고도 연약한 시민들이지만 뭉치면 괴물딱지로 변해 엄청난 파워를 지니게 된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말을 했나보다.

또 한가지, 정신적 외상 즉, 트라우마는 벌어진 상처와도 같아서 세균이 더 쉽게 침투한다. 정신이 아픈 사람들은 이 상처를 잘 돌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상처만 아픈게 아니다. 정신의 상처는 보이지 않기에 방치 될 위험이 더 크다. 게다가 그 상처는 나만이 알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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