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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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가게에서 오랜 고민 끝에 고른 영화는 대개 별 볼일이 없다.
기대가 커서 그런가? 별 생각 없이 빼들고 집에 와서 별 생각 없이 보기 시작한 영화들 중에는 월척이 꽤 있다. 책도 마찬가지다.

오랜 시간 손에서 조물락 거리면서 작가의 생김새, 해설의 평, 역주의 프로필, 발행연도, 인쇄의 횟수, 저자와의 협의에 의해 인지가 붙여졌는지 생략됐는지, 출판사 위치.....이것저것 참견하다보면 주인공은 이미 물 건너 상태.
때론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작품, 그 자체를 보는 용기도 필요하다.
이 책은 누가 사길래 옆에서 한번 따라 사본 작품.

인간에게는 공통된 특성이 존재한다.
죽은 후에도 자신의 존재를 세상이 기억해 주길 바라는 것.
이름을 남기기를 원한다는 점에서는 명예에 대한 욕구이고 분신을 남기기를 원한다는 점에서는 종족 보존에 대한 본능의 욕구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여 항상 여기가 아닌 저기를 꿈꾸게 된다는 것 등. 인간이면 누구나 갖게 되는 공통된 심리, 이 작품은 그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학교 선생인 한 남자가 어느 날 사구(모래언덕)로 곤충 채집 차 휴가를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다.
그리고 그의 행방은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은 그를 실종자로 불렀다가 결국 사망자라는 낙인을 찍는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되었는가.
선생이라는 안정적이고도 무료한 일상이 권태스러운 이 남자는 동료들의 질투를 내심 즐기며 은밀한 여행 계획을 세운다.
그는 곤충 채집이 취미인 것이다.
새로운 종을 발견해서 곤충대감에 이름을 남기는 게 이 남자의 꿈이다. 그러기 위해서 남자는 좀길앞잡이의 변종을 찾기 위해 모래언덕으로 떠난다.
거기서 그는 뜻밖의 재난을 맞게 된다. 마을 주민의 계략에 의해 모래 구덩이에 갇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남자는 그 날부터 그 모래 구덩이 안의 여자와 함께 모래에 깔리지 않기 위해 매일매일 모래를 삽으로 파 나르며 살아간다.

남자는 모래의 유동성에 매혹되어 있었다.
모래는 쉬는 법이 없다. 끊임없이 흐르고 이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래는 생존하기엔 적합한 환경이 아니다.
건조하고 유목민처럼 항상 흘러 다니고 있으니까. 하지만 사막에도 꽃은 피고 벌레가 산다.
악조건에 맞춰 자신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최인석의 심해에서라는 소설이 생각난다.
모래의 여자가 모래의 불모성에 의해 변종 되어 간다면 심해에서는 말 그대로 심해라는 공간-거기서는 사창가로 표현된다-에 길들여진 인물들이 나온다.
사막이란 물이 없는 공간, 심해란 빛이 없는 공간, 둘 다 생존하기엔 악조건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 나은 공간으로의 탈출을 택하기 보다 지금 처한 공간에의 적응을 선택한다.
심해어가 빛과 산소가 풍부한 곳으로 나오게 되면 압력에 의해 자폭해 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인간에게는 현실이 가하는 폭력성에 길들여지는 특성이 있다.
폭력은 중독된다. 가해자에게도 피해자에게도.
프로이트의 말처럼 매저키즘은 자기 자신에 대한 새디즘이므로.

모래가 나오니 문득 엉뚱하게도 이런 말이 떠오른다.
산을 오르지 못하는 이유는 산이 높기 때문이 아니다 내 신발에 묻은 모래 한 알 때문이다.
나는 지금 그 모래 한 알이 너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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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국의 딸들 - 나남창작선 29 나남신서 105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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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작품을 처음 만났던 것은 중학교 무렵이었다. 그러고보니 꼭 십년만에 다시 읽는 셈이다.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만이 기억날 뿐, 내용은 거의 잊고 있었는데 딱 하나의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넷째딸 용옥이가 시아버지에게 겁탈 당하는 장면. 책에선 ‘당할뻔한’ 것으로 나오지만 내 기억 속엔 ‘당하는 것’으로 저장되어있는걸 보니 아마도 어린나이에 그 내용이 무척이나 충격적이었나 보다. 유년시절 내게 영향을 준 책들을 커서 다시금 읽어보면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드는데 그 착각은 향수이기도 하고 때론 악몽이기도 하다.


한 집안의 4대에 걸친 끔찍한 일대기를 읽으며 작가의 입담에 경탄해 마지않았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보다도 더 비극적이고 다섯 딸의 캐릭터는 햄릿보다 더 강렬했다. 소설 내내 음산하게 읊조려지는 ‘비상 먹은 자의 후손’이라는 수사는 다섯 자매의 운명을 암시하는 것처럼 김약국의 집안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비상을 먹고 음독 자살한 한 어머니와 살인을 하고 객사한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비극의 씨앗이 김성수, 바로 김약국이다. 김약국은 길러준 큰어머니인 송씨의 바램으로 그 비극의 배경인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통영에 정착한다. 그 후 정 없이 혼례를 치르고 김약국은 다섯 딸을 보는데 그 자매들에겐 각자의 무서운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욕심 많은 큰딸 용숙은 일찍 과부가 되어 아들의 주치의와 불륜행각을 벌이다 영아살해라는 추문을 내고 둘째 딸 용빈은 집안의 아들격으로 공부를 많이 한 신식여성이지만 몰락해 가는 집안으로 인해 약혼자 홍섭에게 배신을 당한다. 셋째 딸 용란은 자매 중 가장 미모가 출중하지만 금수와도 같은 본능만 살아있는 여자로 집안의 머슴인 한돌이와 눈이 맞아 정사를 벌이다가 탈로가 난다. 그 후 처녀가 아니라는 흠으로 성불구에 아편장이한테 시집을 가게 된다. 매일 남편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살던 중 돌아온 한돌이와 도망하려다가 남편, 연학에게 어머니 한실댁과 한돌이가 도끼에 찍혀 죽고 용란은 정신을 놓고 만다. 그 후 비극의 손길은 넷째에게 뻗쳐서 언니 용란을 사모하던 남자에게 시집 간 용옥은 남편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외롭게 생활하던 중 시아버지에게 겁탈을 당할 뻔 한다. 충격 속에 남편을 찾아 부산으로 도망한 용옥은 남편 기두와 길이 엇갈려 다시 통영으로 돌아오던 중 배가 침몰해 아이와 함께 죽는다. 막내 용혜에게는 직접적인 재앙이 오진 않지만 어린 시절부터 몰락해 가는 집안의 흉측한 사건들을 보아내는 것 자체가 큰 형벌이다.


작가가 처음 이 작품을 기획 했을 당시의 화두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운명’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 데스티네이션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인 힘, 우리가 흔히 운명이라 일컫는 그 무언가가 사람의 명이 다하면 어떻게 해서든 저승으로 데리고 가는걸 보면서 정해진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인간은 어쩌면 그 운명의 길을 서서히 걷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싶었다. 그 목적지는 아마도 죽음일 것이고.

매우 운명론적인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자신의 운명에 반항하며 역행하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조차 모두 그 사람의 운명의 발자국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발에 꼭 들어맞는 발자국을 디디며 가고 있는 것이라고. 작가는 운명에 대한 정의를 마지막에 이렇게 내린다.

‘운명은 죽음이다’

죽음은 인간의 최종 목적지이고 모든 생명체의 마지막은 죽음으로 귀결된다. 고로 인간은 그 공동 운명체 속에 속해있다. 죽음을 바라보는 똑 같은 눈들을 갖고 살고 있는 것이다. 문득, 지난겨울 안면도의 개암사에 갔을 때가 생각난다. 유치원 생 정도 되었을까? 예닐곱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의 영정이 불전에 모셔있었다. 영정 안의 아이는 해맑게 웃고 있었고 향로에선 은은한 향이 피어났다. 올 때 순서는 있어도 갈 때 순서는 없다더니 나보다 늦게 출발한 아이는 나보다 빨리 도착해 있었다. 어쩌면 인간에겐 어떠한 죄도 없을지 모른다. 자신이 타고 태어난 운명대로 사는 것이라면 인간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죄라면 태어난 죄 밖에 없을 게다.

한 집안 내력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백년동안의 고독’의 가브리엘 마르케스가 생각났다. 용숙, 용빈, 용란, 용옥, 용혜 그들 모두 가혹한 운명 앞에 고독하지 않았을까? 우리 나라에서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면 박경리 선생이 받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처럼 세계적인 작가의 대열에 오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대가다. 작가의 명성은 그 작가의 성실함과 고뇌와 외로움에 비례한다. 작가 박경리는 그 존재만으로도 우리 문학의 커다란 산(山)이다. 그렇다면 그의 외로움은 얼마나 깊고 높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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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떨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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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의 자전적 소설. 매우 지적인 소설이다.
하지만 내 취향과는 거리가 좀 있다. 나는 아무래도 에쿠니 가오리식의 '감각적인' 소설을 더 좋아한다. 물론 뒤렌마트식의 위트와 재기발람함도 사랑한다. 같은 재기발랄과 기막힌 반전이라도 나는 노통보다 뒤렌마트식이 더 좋다.

노통의 등단이 문단의 신드롬과 같은 현상이라며 평단의 열기가 뜨겁지만 하루키가 그랬고 그 이전에 시드니 셜던이 그랬던 것처럼 지나고 나면 유행지난 T셔츠처럼 초라해질거다. 그 시대의 문화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작품은 되되 세기의 명작, 불후의 작품이 될지는 의문이다.

지금 내가 질투를 하고 있나? 아니다. 이건 정말 가슴을 울리고 온몸을 전율시키는 작품을 만났을때의 미치고 팔짝 뛸것같은 질투심이 아니다. 내 코드와 맞지 않아서 일까. 오히려 노통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좀 이해가 안될 뿐. 다만 그녀의 이력과 환경이 부럽고 자칭 글쓰기 광이라하는 그녀의 이색적인 소재와 사고의 독특함은 그녀의 환경이 만들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여기에 그녀의 타고난 몽상가적 기질이 더해져 '노통'이 만들어 진게 아닐까. 유년시절의 중요성이 다시 한번 느껴진다. 생후 5년 동안의 기억이 꿈만 같아서 그 시절의 그 아련한 향수로 인해 일본을 제 2의 고향으로 여기며 동경해 마지 않는 노통이 이 책에서 일본을 조롱하고 있는 부분은 비아냥이나 경멸이 아닌 자국에 대한 연민이나 따듯한 질책, 또는 관망이라는 느낌이 든다.

외교관인 노통의 아버지가 일본이 아닌 한국의 대사관을 배정 받았더라면 노통은 한국을 사랑했을까?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며 한국에 동화되기를 갈망했을까. 그러면에서 우리는 운이 없었고 일본은 운이 좋았다. 아멜리 노통이라는 발군의 인재를 사로잡다니. 그런데 노통은 독도를 두고 뭐라 부를까? 독도? 다케시마? 과연 그 섬을 두고 뭐라 이름 부를지 궁금하다.

노통은 자신의 유년기를 사로잡은 일본에 깊이 매료되어 일본에 남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일본에 동화되기 위해 일본 굴지의 무역회사인 유미모토사에 입사한다. 유미모토사는 위계질서가 뚜렷하고 실용보다 형식을 추구하는 일본의 전형적인 기업이다.

그곳에서 노통은 자신의 바로 직속 상관인 모리상의 지시를 받게 된다. 모리상은 사이토상의 지시를 받고 사이토 상은 오모치상의 지시를, 오모치상은 사장인 하네다상의 지시를 받는다. 이 피라미드 단계를 건너뛰어서는 안된다. 불만이나 의견을 말하고자 할때는 자신의 직속 상관에게 얘기해야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 이외의 다른 일에 능동적으로 혹은 자율적으로 참여해서는 안된다.

오직 주어진 업무와 내려오는 지시만이 있을 뿐이다. 할당된 업무가 없었던 노통은 부서마다 찾아다니며 달력을 넘겨준다던지 우편물을 챙겨준다던지의 소소한 일을 하며 기뿜을 느끼나 이마저도 상부의 허락이 없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는다.

그러던 중 유제품 부서의 덴시상을 만나서 노통의 고향인 벨기에 저지방 버터에 관련된 프로젝트 제의를 받고 성공적인 보고서를 작성하였으나 허락없이 수행한 업무로 인해 덴시와 노통은 상부의 징계를 받게 된다. 그리고 이를 밀고한 모리상과는 그동안의 우호적인 관계가 무너지고 원숙이 된다. 스물여덟의 모리상은 아름답고 능력있는 여자지만 야심이 커서 노통이 자신보다 잘되는 모습을 견디지 못하고 짓밟는 낙으로 산다.

그래서 노통이 소질없는 계산업무를 주고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게 하거나 화장실 청소를 업무로 부여하는 등의 최악의 모욕을 준다. 그러나 노통은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 명예를 지키기 위해 1년의 계약기간을 채우고 유럽으로 돌아가 집필을 시작한다.

일본 특유의 문화와 사상, 병폐들이 잘 그려져 있다. 이 소설을 읽는 중 영화 ' 춤추는 대수사선'이 떠올랐다. 탁상공론을 하는 고위상부와 현장에서 발로 뛰는 경찰들의 대비를 보여주며 일본의 형식주의와 고지식한 위계질서를 통렬히 비웃는 장면 말이다.

그러나 자전 소설의 특징인 객관성 상실이 좀 거슬렸다. 자신의 실명이 거론되고 자신의 경험이 등장하는 만큼 주관적으로 흘러가지 않았나 싶다. 아무래도 '자전적' 이라는 말은 '픽션' 이라는 단어를 깜박깜박 잊혀지게 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낯선 단어들, 고어가 등장하기 했는데 처음엔 번역가의 나이를 의심했다. 이런 엣날말을 쓰다니 이 사람, 도대체 몇살이야? 그런데 알고 보니 문헌학광이라 자부하는 노통의 의도적 사용이었음이 역자후기에서 밝혀졌다. 역자도 그런 고어들 때문에 번역에 애를 많이 먹었다고. 그런면에서 노통은 고전적이면서도 신세대적 감각이 탁월한 독특한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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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
와타야 리사 지음, 정유리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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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19세의 최연소 수상자 와타야 리사.

최근 들어 일본의 문학상 수상자의 연령대가 점점 어려지고 있는걸 보고 나는 문학도 어쩔 수 없군하고 생각했다. 젊은 시류에 휘둘려 권위 있는 문학상의 위상이 실추 되어간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래도 일본놈들,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들이 아니라며 일본어를 전공한 오빠는, 뭔가 있으니까 당선된 걸 거라고 했다. 하지만 질투심이었을까? 나는 별 기대 없이 읽었지만 오빠의 말이 맞다는 걸 인정해야했다. 아쿠타가와상 심사위원들의 심정을 알 것도 같았다. 버리기엔 아깝고 상을 주기엔 너무 어리고. 에라,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이 틀린 건 아니었다고 말해 주고 싶다. 우선 예술에 있어서 나이는 볼게 아니고 인정할 건 인정하는 솔직한 문화는 존경할만 하다. 이 ‘천재문학 소녀’가 수상한 아쿠타가와상은 올해로 130회를 맞이했다. 그리고 지금 내 옆의 게시판에 붙어있는 프린트 물에는 2004년도 ‘현대문학상 48회’, ‘이상문학상 28회’, ‘황순원 문학상 3회’가 적혀있다. 일본과 우리의 문학 차이가 이건가? 노벨 문학상이 멀게만 느껴지는 이유가 이런 건가 싶었다.

와타야 리사. 17세에 <인스톨> 이라는 소설로 38회 문예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그리고 2년 후 발표한 두 번째 작품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으로 일본에서 가장 저명한 아쿠타가와 상을 받은 것이다. 그러니 ‘천재문학 소녀’라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나이 어리다고 우습게 보았지만 가능성이 있는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섬세한 묘사, 정곡을 찌르는 표현, 현상의 본질을 볼 줄 아는 관점. 그 나이이기에 가능하면서도 그 나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렇게 빠르고 큰 축복들이 이 어린 작가가 앞으로 문학을 하는데 있어서 별 도움이 안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등단한 최인호 같은 작가도 있지만 신춘문예에 4번 떨어지고 5번째 붙으면서 그래도 운이 좋았다고 말하는 박범신 같은 작가를 나는 더 쳐주기 때문이다. 그는 낙선의 경험이 문학적 세계관을 더욱 점철 시켰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문학에의 사랑은 열정이 아니라 순정이란다. 은근히 끊어올라 평생을 질기게 타오르는 것. 어쩌면 열정보다 더 강한 것이 순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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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인명사전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세계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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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편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노통의 글쓰기에 질력이 난다. 어째서 노통은 소설을 소설답게 쓰지 않는지 모르겠다. 이게 자신의 글쓰기의 특징이라면 야 할 말없지만 내가 생각하는 소설의 정의와 그녀의 방식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소설이란 말 그대로 픽션이다. 작은 우주와도 같은 하나의 창조적 세계. 그래서 소설에 등장하는 지명과 인물이 실제로 있을 법하지만 실은 가상의 존재였다는 걸 알때는 배신감과 분노와 함께 그 작가에 대한 질투심이 솟구치는 걸 느낀다.

나를 이렇게 감쪽같이 속이다니. 그런 글을 쓰다니 대단해 라고.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 자전적 소설은 딱 질색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경우는 조금 용서가 되지만 대놓고 자전적 이야기를 하는 소설은 글쎄, 그 작품을 두고 소설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사건, 즉 이야기로 보여주기가 아닌 설명 투의 서사 방식. 그것도 절제되지 못한 감정 과잉의 상태로 끌어가는 소설의 경우에도 짜증나기는 마찬가지다.

작가가 독자에게 자신의 세계관을 억지로 주입시키고 설득해내려고 하는 게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아멜리의 경우도 유년시절에 대한 집착이 느껴진다. 이 소설도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의 유년기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동경의 연장선에 있다.

노통, 자신의 유년기가 그런 시절이었던 거 같다. 이래서 비슷한 내용은 두 번 다시 다른 소설에 인용해서는 안 된다. 그건 작가의 신뢰도 문제다. 취향은 어쩔 수 없지만 서도. 하지만 늘 유혹 받는 일이기도 하다. 소설가 소설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듯이.

노통의 저런 글쓰기(타당성 없이 무턱대고 찬미하고 자기 생각대로 끌고 나가기)가 언제까지 갈려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얼마 안가 아멜리 신드롬은 쏙 들어갈 게다. 이 소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뭐에 대해 쓰려고 한 것인지 마지막 작위적 반전에서는 이 책을 안 사고 빌려보길 잘했다는 생각뿐이었다.

오, 노통. 이런 식의 글쓰기가 유럽에선 먹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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