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혀
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어쩐지 요즘은 그렇게 좋아하던 소설책을 잘 읽지 않았다.
그러다 그 날은 소설 책 한권을 읽어야 할 것 같아 무작정 한국 소설 칸을 찾아갔다. 그리고 마치 계획했던 것 처럼 조경란의 소설책을 꺼내들었다. '혀'. 얼마전 신인작가 한명과 난리 법석이 났던 그 책, 호기심 반 의심 반. 오랫만에 햇빛을 보곤 기쁜 얼굴로 책을 들고, 커피 한잔을 사 들어왔다.
정지원은 이탈리안 레스토랑 노베<nove 쯤 될까. 9 라는 뜻이니>의 요리사다. 상당한 미각의 소유자다. 학력도 학벌도 없는 그녀가 레스토랑 부세프 쯤 되는 지위에 오른데는, 스스로 읊어내듯 그녀의 미각이 상당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녀가 짧게 마치 삼자가 말하듯 읊어주는 자신의 이력은, 노베에서 얼마간 일을 하다 젊은 건축가 석주를 만나 함께 살며 키친를 열었다가 다시 노베로 돌아왔다. 그 사이 석주는 쿠킹 클래스에 나타난 전직 모델 이세연과 만나기 시작하고, 지원과 헤어진다.
말을 허거나 맛을 보는 일이 모두 입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이 두 가지 모두 욕망을 나타내는 표현들이다. 말을 하는 것과 먹는 일은 혀에서 만나고 뒤섞인다. 입은 음식이 들어가는 입구인 동시에 내적인 어떤 것이 목소리로 새어나오면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드러내주는 육체의 입구이다.
|
유독 소설은 '혀'의 감각과 그것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집중적으로, 탐미하는 듯이 보인다. 먹는 것 마시는 것, 말하는 것, 사랑하는 것. 혀가 할 수 있는 감각들을 모두 종합해 놓는다. 레스토랑의 구조도 마치 '혀가 낼름거리듯' 요리사들이 요리를 내놓고 음식들이 서빙된다. 사람들은 입을 통해 음식을 맛보고, 말을 하고, 사랑을 나눈다.
입은 기쁨이 들어오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걸어나가는 장소이기도 하다. 입은 육체의 문을 열어주기도 하지만 안에서 걸어잠근다면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내부의 어둠에 갇히게도 된다.
|
해가 거듭될 수록, 여기저기서 들었던 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 수록, 책임질 일이 많아 질 수록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국 말을 쏟아부은 나에게 돌아오더라는 것이었다. 혀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내부의 어둠'으로 두는 것일까. '기쁨으로 가득찬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일까. 이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니가 아니라 이세연이라는 말을 하는 남자의 입. 한 입 가득 여자가 만들어준 마지막 만찬을 먹고, 다시 키스를 하기위해 벌리는 남자의 입. 화 내는 입. 거짓말 하는 입. 입안에 있는 내 조그만 물건이, 찌릿. 신호를 보내온다.
혀는 참 이상한데가 있는 것 같아요. 완벽한 것 같으면서도 경망스러운 것 같고.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건 마음에서 나오는 거죠?
|
음식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철학적'인 정지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녀는 혀가 느끼는 감각에 있어서 탁월하다. 요리사는 '먹어야' 맛있는 음식을 만든다고 믿는 사람이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음식들도 각양각색이죠. 헤밍웨이가 굴을 몹시 좋아했다는 건 알고 있어요? 칸트는 모든 음식에 겨자를 쳐먹는 걸 좋아해서 언제나 그걸 갖고 다녔다죠. 헤라클레이토스는 풀하고 채소를 유난히 좋아했는데 고독하고 화를 잘 냈대요. 플라톤은 올리브와 말린 무화과를 좋아했고 하이데거는 감자샐러드를 좋아했고 디오게네스는 술을 로트렉은 포트와인에 육두구를 넣어서 마시는 걸 좋아했고 클레오파트라는 새끼 낙타의 발굽으로 만든 요리를 특별히 좋아했다는군요.270
|
사람마다 각각 다른 환상을 가지고 산다. 사람마다 자신의 색이 다르고, 사람마다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이 다르다. 소설은 독자 하나 하나가 미각을 잃지 않으면서 정지원의 정신세계가 보여주는 특유의 관능적이고+ 미각적인 맛을 살려내겠다, 작정을 한 듯 하다. 어쩌면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누군가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시켜먹거나, 깔끔하고 예쁜 그릇에 담긴 이탈리안 음식을 먹는 장면을, 작가는 상상하지 않았을까. 환상적인 마블링에 눈이 반짝 거리는, 맛있는 것을 보면 맛있다고 느끼는, 정지원은 결국 남자친구를 가로챈 호리호리한 체구의 예쁜 전직 모델 이세연을 납치한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옛 남자친구에게 만들어주기 위해서이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란, 사랑하는 사람의 향기가 가득 베인, 지독하게도 가장 부드러운 부분. 그녀의 혀로 만든 스테이크다.
땅에 뿌리를 내리기만 하면 어떤 바람도 이겨내고 초록색 열매를 맺는 올리브 나무 같은 게 사랑인줄 알았다. 지금은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없어서 슬픈게 아니라 사랑이 더 이상 올리브 나무도 음악도 그리고 맛있는 한 접시의 음식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 씁쓸하다. 255
|
소설은 역시 한가지 줄거리를 가지고 사랑하다 헤어진 연인 -돌아올 수 없는- 을 다시 만나게 해주지만, 주인공이 느끼는 사랑이란, 한없이 허무하고 씁쓸한 것일 뿐이다. 끝까지 다시, 돌아오라는 말을 하는 입으로. 자신의 남자가 황홀에 빠져 애인의 혀를 먹는 것을 보며, 그녀가 말한다. 마지막으로 입맞춰달라고.
우리는 천천히 다가가,
눈꽃 핀 겨울 창문에 얼굴을 갖다댈 때처럼 서로의 입술을 살짝 포갠다.
...나는 눈을 뜨고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본다. 한 남자와 한 여자. 모든 사랑 이야기가 그렇듯 될돌아보면 행복했던 시간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서로를 끌어들인 매혹의 첫순간도. 하지만 이제 제자리로 돌아가야할 시간이다. 307
|
제자리로 돌아온 주인공, 드디어 혀를 통해 내밀었던 자기 말을 끝으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선택한다.
어떤 것은 번성하고 어떤 것은 쇠락하고 어떤 것은 다시 태어나며 어떤 것은 흘러가기도 한다. 살아있는 것은 차례차례 바뀐다. 중요한 건 지금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게 아니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
주이란의 '혀'가 영화로 만들어진다니,
작가 주이란도 글쎄, 그 난리 법석 후 얼마간의 '이득'은 얻게 된거 같다.
마케팅이었든 노이즈였든, 어쩄든 조경란과의 부딪힘으로 이익을 봤을테니까.
조경란은 참 '열심히' 글을 쓰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