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2
정유정 지음 / 비룡소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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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도 소설 수업을 받아보지 않았다는 작가 정유정을 읽을 때면 늘,

그럼 나는 그만한 욕구를 마음속에 충분히 뿜어내고 있는가라는 자괴감에 빠지곤 한다.

그도 애초에 이야기꾼은 아니었듯, 너도 기질을 발현시킬 때라는 걸 알았으니 이제 방아쇠를 당기면 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긴 이야기는 결국 꿈같은 여행의 흔적이다.

평가자들은 리얼리티에 의문을 주었다지만, 내 외가가 있는 송정리 영광통과 내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임곡이 나오는 이 소설을 나는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설의 리얼리티는, '함께 따라갈 수 있느냐'에 있지 않는가.

 

몸의 피로와 출근 시간 상황에 따라, 삽시간이랄 건 없지만,

지하철안에서 잠자리에 들기전에 틈틈이 시간을 내어 4일 정도에 거쳐 읽었다.

그 사이에 은희경의 단편과 신춘문예집을 읽고 있다.

문장력이야 이들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나는 정유정이 이야기꾼으로서 발전하고 싶다는 말에 공감했다.

 

무엇보다 이 작품 뒤에 나오는 소설 <내 심장을 쏴라>를 보면 공감이 간다. (개인적으로는 내 심장을 쏴라에 한표를 던져주고 싶다. 문장이 점차 뚜렷하게 몽울진다.)

 

정유정이 소설을 쓰기로 했을 때 두개의 종탑이 있었다고 한다.

한가지는 모험, 한가지는 스릴러.

이 두가지에 대해 집요하게 물고늘어진, 정유정은 이야기꾼으로서 스스로의 능력을 그동안 뭉클인채 탐구하고 있었나보다.

 

자 이제 작품이야기.

 

익살과 재치는 조금의 위악이 들어가기도 한다. 게다가 15살짜리 전라도에만 살던 아이가 아주 시끄럽고 복잡한 환경을 보며 잠실구장의 소리같다는, 경험도 못해봤을 상상을 하곤 한다. 그러나 숨가쁘고 격렬한 모험 속에서 삶을 통찰하는 능력은 변치 않았다. 그 힘이 정유정의 소설에 있는 가장 크고 무서운 힘이다.

 

어떤 장편소설을 읽다보면 그저 이야기에만 초점이 맞춰진다.

그런데 정유정은 늘 거기에 생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집어넣는다.

그게 기대되어, 400쪽이 넘는 이야기는 아무렇지 않게 스윽 넘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7년의 밤 읽으면 정유정이 다 보이지 않을까.

작가가 새로운 시도를 해보지 않는다면, 이 세권이면 작가의 글을 다 파악할 듯.

그러니, 이게 끝이 아니길 바란다.

 

닮고싶은 리얼리티가 들어간 문장.

아이는 어릴 때부터 곧잘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어딘가에 부딪쳐 상쳐를 입곤 했다. 밤에는 마당에도 혼자 나가지 못했다. 무지한 그는 몸이 약해 그러려니 하며 대처 한의원에서 보약만 지어다 먹였다. 그가 문제의 심각성을 때달은 건 아이가 열두살이 되던 해인 1980년 5월이었다. 그즈음 아이는 주변 사물은 물론, 중심 사물도 명확히 보지 못했다. 그는 읍내로, 목포로 용하다는 병원을 찾아다녔지만 의사들은 야맹증과 시력 상실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광주의 대학병원으로 데려가라며 소견서만 써주었을 뿐이다.

189

 

그리고 불쑥 불쑥 책장을 접게 만든 문장.

어쩌면 승주를 믿었다기 보다는 바라는 것을 믿으려 한 건지도 모른다. 209

눈을 떴다. 그러나 의식은 계속 꿈의 잔상과 기억이 교차하는 지점을 배회했다. 355

세상에는 신이 내 몫으로 정해 놓은 '비밀'이 더 있을거라고 생각해. 그렇지? 그렇다고 동의해줘. 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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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장 쪽으로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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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혈투와 핏물이 낭자한 편혜영의 소설이 돌아왔다.

사육장 쪽으로는 사육장 '쪽으로'만 가고 있는 우리 시대 사람들의 이야기를 현란하고 즐기는 듯한 묘사로, 냉철하다못해 냉담한 시선으로 포착한 글이다.

 

다른 글들도 할말이 많겠지만, 우선 '사육장쪽으로'의 '사육장 <쪽으로>'가 이 책을 대변하고 있다니,

이 작품 이야기를 해보자.  

(사실, 이 작품이면 이 책 전반을 들여다볼 수 있다)

 

* 사육장과 집단화된 공동체사이의 비릿한 유대감
소설 속 '사육장'은 신락로에 난 마을의 옆에 어딘가 위치한다. 몽환적인 분위기를 부러 내기 위해 소설은 사육장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지 않는다. '어딘가'에서 나는 개짖는 소리는 참기 힘들 정도의 고통을 주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개의 존재란 '가족과 마주치지만 않는다면 문제될 게 없는'정도로만 여겨진다. 개들은 비좁은 철창안에서 같은 먹이를 먹고 비슷한 시간에 잠들었다가 깨어나고 필요에 따라 여기저기 팔리고 종내에는 처참하게 그슬려 죽을 존재로 (45) 만 그려지는 것이다. 사육장 속 사나운 개들과 신작로에 집단화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비릿한 유대감은 여기서 흘러나온다. 이미 작품 속에서 작가는 마을 사람들의 집을 형용하면서 '조립식 자재를 사용하여 거대한 레고블록을 쌓듯 모서리를 맞춰 나사를 조이고 자재를 끼워넣는' 일률화된 모습을 그려넣었다. (44) 혈투를 벌이며 싸우다가 도살되는지도 모르는, 엄청나게 사나운 사육장 개들을 묘사하던 작가는 공교롭게도 신작로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너무나 일률적이고 천진난만하게 그려넣으며 비교한다. 신작로 마을의 사람들은 비슷한 집에서 비슷한 음식을 먹으며 비슷하게 살아가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비슷한 각도와 횟수로 손을 흔드는 일률화된 사람들이다. 사나운 개들은 그 안에서 혈투를 벌이다가 사육장을 빠져나와 그야말로 미친듯이 주인공의 아이를 물어뜯는다. 그런 면에서 일률화된 사람들을 조롱하는 것도 사육장 안의 개들이요, 어디있는지 알 수 없는 사육장은 공상화되었거나 잃어버린 사람들의 자유같은 것이다.

 

* 주변인으로서의 주인공
주인공이 태어난 곳이나 성장기를 지낸 곳, 결혼하여 살림을 낸 곳은 모두 도심 외곽의 변두리이다. 그런 주인공이 변두리에 집을 지은 것은 단독주택에 살고 싶다는 (혹은 자연인이 되고 싶다는) 열망. 그러나 단독주택마저도 도시에서 이사온 사람들이 꾸며낸 가공된 꿈의 표면일뿐이다. 진정한 도시인의 꿈으로서 단독주택을 사들인 주인공조차도 그것이 자신의 꿈이었는지 타인으로부터 각인된 꿈인지 잊어버렸을 정도다. 도시에 직장이 있는, 주변인으로서의 주인공은 파산날 지경에 이른 집안사정때문에 어느날 제 시간에 출근하지 못하고 지각을 했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천개의 퍼즐 중 한 조각이 빠졌다고 하여 누구든 그것을 쉽게 알아채지는 못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무단 지각을 해버린 주인공은 퍼즐처럼 박혀 도시의 생활을 하는 하루동안 집안에 있던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린다. '바쁘다'는 행위때문에 집안일따위는 자연스럽게 잊혀진다. 도시가 뿜어내는 아름다운 불빛의 포근함을 느끼며 집이 있는 신작로로 돌아서는 길에, 급기야 그는 도시를 떠난 것을 '후회한다'.

 

* 개와의 혈투, 아이의 죽음
어느 날 휴일, 지켜보는게 관심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식(54)이던 그에게 지켜볼수만은 없는 일이 생긴다. 사육장의 개들이 신작로 마을에 나타난 것이다. 부스럼 인 살갗에 뭉텅뭉텅 털이 빠져나간 사육장의 개가 주인공의 아이를 포위한다. 이빨을 아이의 몸에 박은 개들은 이번엔 아이의 가슴과 팔뚝의 살점을 뜯어버린다. 아이의 몰골을 본 부부는 급히 병원을 찾아나선다. 아이가 개들에게 당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던' 이웃들은 다급하지만 무심하게 사육장쪽으로 가면 병원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는 이야기만 뱉어낸다. 그러나 한번도 사육장쪽으로 가본적이 없던 주인공, 사육장이 있다는 언덕을 넘지만 똑같은 모습의 마을만 발견할 뿐이다. 자신이 같은 자리에서 맴도는 것 같은 주인공, 분신같은 아이를 구하기 위해 차라리 개들이 짖는 소리에 의지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59)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그는 자신이 찾는 것이 사육장인지, 아이를 치료할 병원인지, 아니면 아이를 물어뜯은 개인지 헛갈려한다. (59) 마지막 보루로, 그는 자신의 직장이 있는 익숙한 도시를 향해 차를 내몬다. 아이가 죽어가는데도 불구하고 평범한 소시민인 그는 쉽게 속도를 내어 병원이 있는 도시를 찾지 못한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앞서가는 트럭의 꽁무늬를 따라가는 것 뿐이다. 한편 여전히 개 짖는 소리가 가로등처럼 그를 인도한다. (61)

 

*사육장- 넘을 수 없는 공간에 갇힌 사람들
소설은 무섭도록 규격화된 도시인의 삶을 침착하게 그려낸다. 일상적인 소시민인 주인공의 삶을 통해 개인적인 두려움과 공포를 보편화 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소설의 리얼리티는 상징화된다. 도시에서의 포근함이 불안으로 형상화되는 순간 작가는 사육장 너머 어딘가 있을지 모르는 공포스러운 동시에 유일한 문제해결의 대상을 소설의 중심으로 끌어온다. 그러나 소시민인 주인공의 눈에는 그 모든 불안해소의 요소들이 공포와 두려움을 낳는 신호체계로서만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갈등요소들 덕분에 주인공은 극대화된 불안 속에서도 '트럭의 뒤꽁무늬를 쫓는'소시민'으로서의 역할을 부각시키며 다시 편안해질 수 있는 도시로 회귀하려는 근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안개에 휩싸인 도시의 무거운 적막앞에 다시 좌절하고 만다. '사육장 쪽으로' 갈 수도, '도시를 찾아 나서는 여정'도 불안하기만 한 사람들. 불안의 근원을 찾고 진단하고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없는 사람들, 불안을 피해가며 하루를 사는 현대인들. 그 면면이 소설 속에 너무도 적나라하게 꼬집힌다.

 

불안한 소시민들의 삶,

작가 편혜영이 가지고 있는 주특기는

그것들을 적절히 오무린 듯 글 속에 냉담한 시선으로 처리하는 압축된 경멸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읽는 단편마다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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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장 쪽으로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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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쓸수밖에 없었다`는 평론가의 평가가 잘 어울리는 자기만의 색이 뚜렷한 편혜영의 단편집. 작가가 그렇게 쓸 수 밖에 없었으니, 독자는 그렇게 읽을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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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돌아왔다 - 2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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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한편 지하철 안에서면 충분했다. 가슴속에서 멍울져 파고드는 읽기의 욕망을 채워주는 글. 아, 읽다 말고 피식거리는 나도 가끔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김영하의 글`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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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미래 - 2013년 제3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애란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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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학상을 지하철 안에서 읽으면서 우는 애가 또 있을까.

김애란의 문학적 자서전과 수상 소감을 읽으며 뚝뚝 나와 떨어지는 눈물을 나도 어쩔 수 없이 지켜보았다.

김애란이 부모에 대해 쓴 문학적 자서전을 보면서는 감탄했고,

편혜영이 김애란에 대해 쓴 작가론을 보면서는 부러웠다.

상을 타서 얼마나 좋을까. 라는 것 보다는 마음껏 글을 쓰니 얼마나 좋을까, 라는 것에 가까웠다.

 

'손재주가 좋은 부모님과 달리 나는 카드를 가지고 하는 종류의 놀이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공기나 고무줄도 잘 못했고, 산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힘들어했으며, 중학교에 올라기서는 가정시간에 저고리를 만들다 잘 안돼서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종알종알, 패를 맞추듯 말을 맞추며 뭐라 떠들어대는 것은 좋아했다.' (71)

 

'얼마 뒤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 '한글'을 깨쳤다. 가벼워 민첩한 대신 흩어지고 사라지기 쉬운 '소리'를 글자로 적어 지상에 남겨두는 법에 대해 알게 되었다. 자음 열 네개, 모음 열 개, 이렇게 스물네 개의 활자가 적힌 낱말카드가 그 도구였다. 그리고 그때 느낀 모종의 경이, 재미와 설렘은 다른 소설 안에 (두근두근 내 인생)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72)

 

낱말과 언어에 대한 김애란의 애착. 애증과 결핍이 만들어낸 귀한 결과물인 낱말의 조합들이 놀랍게 응축되는 과정들을 지켜보며 독자의 입장에서 스스로 정화되는 느낌을 선물 받았다.

 

소수언어박물관이라는 특정한 설정에 마음껏 상상력을 불어넣은 김애란의 <침묵의 미래>를 읽다보면, 기존에 김애란이 추구하던 여러가지 소설 기법들에서 작가 스스로 벗어나고 싶어하려는 몸짓을 찾을 수 있다. 아마 그 지점이 될 것이다. 작가가 스스로 허물을 벗어 날아오르려고 꿈틀대는 그 순간이란. 작품 속에서 소수언어를 쓰는 서로 다른 부족 출생 둘이 중간 지점의 아이를 낳지만, 곧 그 아이를 버린다는 설정에서, 독자는 묘하게 억압된 언어에 대한 제국주의와 사람들의 욕구를 읽게 된다. 하루에 몇백개씩 소수언어가 사라진다는 뉴스를 몇년전에 읽으며 안타깝다는 생각을 했던 독자로서의 내가, 이제 허물을 벗어던지고 능동적으로 침묵의 미래를 파괴시켜야겠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예술가는 스스로 보상받는다는 심사위원의 글을 보면서 유용하지 않아 자유롭다는 김 현 선생의 말을 떠올렸다.

 

귀중한 작가임엔 틀림없다.

앞으로도 많이 기대되는 작가임에도 틀림없다.

 

글로 푸는 문학이, 조금 느린 문학이 비록 영상물에 의해 상업적으로 지배받고 있거나 그럴지도 모른다고 하여도,

여전히 글은 힘이 세다.

 

 

사설.

 

누구든 나를 발견했을테지만 아무도 나를 모르는 지하철역 출구 계단을 걸어올라오며

젖어든 눈물을 다시 삼켰다.

내가 쥐고 있던 낱말카드를 다시 꺼내 허공에 뿌렸다.

그것들은 천박하게도 4월의 벚꽃처럼 흩날라갔다.

나는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연구원행 버스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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