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철학 - 패션에 대한 철학의 대답
라르스 스벤젠 지음, 도승연 옮김 / Mid(엠아이디)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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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난 반세기동안, 패션은 엄청난 문화적 키워드로 급부상했다. 단순히 입는 행위를 위한 기능 뿐 아니라, 문화와 가치가 입혀지기 시작하면서 예술은 문화가, 문화는 예술이 되기도(6장.패션과 예술) 했다. 상업시장에서 매우 큰 상품이 되었으며, 디자이너들은 예술과 산업을 오가며 활동한다. 마치 대중문화와 예술 사이의 선을 넘나들듯 패션산업은 번성해왔다. 현대는 조율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졌다. 사람들은 혼란을 겪게 되었다. 무엇이 올바른지 알지 못하고, 어떤 가치를 위해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반성없이, 사람들은 그저 '소비'하게 되었다. 이 급박한 사회속에서, 패션의 철학을 논해야 하는 가치있는 발언은 '느림의 미학'에 있다.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와,
속도의 정도는 망각의 정도와
정확하게 비례한다. 

-밀란 쿤데라

 

철학은 '일상의 용어'로 해석될 수 있다. 왜, 철학은 삶과 인간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이 일상의 모든 부분에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 없다고 생각하니, 패션철학이라는 주제를 봤을때도 크게 낯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을 때 중점을 두어야 하는 부분은 패션을 어떻게 철학으로 풀어가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 책 전체를 통틀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보인다. 패션은 '기능적이고' '표피적인' 면에서 발달해왔으며, 패션은 그것을 분출시키는 계기였다는 것이다.

 

패션 이론가인 캐롤라인 에반스 Caroline Evans가 말했듯이 "패션은 문화 내부에 순환하고 있는 중요한 관심사들을 표현할 수 있으며 그것이야 말로 세계의 불편한 진실들의 노선이다"라는 주장에 공감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진실을 말하는가? 우리가 표피적 차원에만 공을 들이고 점차적으로 기능적인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 우리가 가진 정체성의 일관성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 그것과 관계하는 진실을 말하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패션은 아마도 이 모든 것들을 실현한 추동력이었다는 진실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302.

* 패션과 소비

 

이 책에서는 패션을 몇가지 구분으로 철학과 연결시켜 사유하고 있다. 우리가 가장 익숙하게 들어왔던 것이 바로 '패션과 소비'이다. 단연 철학에서 깊은 관심을 갖고 지켜봐 왔을 소비문화에 젖어든 현대인의 소비의 습성과 가치관. 소비가 습관이 된 사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맥을 짚고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언제나 새로운 물건으로 갈아탈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포스트모던 상품이 가지는 가장 매력적인 점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태도가 비합리적으로 느껴지는가? 당연히 비합리적이다. 소비 사회는 비합리적인 개인을 전제로 하는 사회라는 점에서 이 소비 사회의 합리성은 사회 구성원들을 비합리적으로 기능하도록 만드는 수준에서 작동할 뿐이다. ........ 아무리 소비한다 해도 자신이 추구하는 목적에 닿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그 어느 시대보다 분주하게 소비하고 있지 않은가.......그런 의미에서 이성적인 행위자는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겸비해야만 한다. 246.

낡은 것을 버리는 것이 습성화된 우리네 사람들. 지금까지 부르디외의 계급론에 대해 부르짖으며, 사회의 계급이 개인의 성향을 만든다고 주장하던 저자는, 정작 패션의 영역으로 돌아오자 역설적으로 현대의 소비는 계급의 정체성이 아닌 '개인적 정체성'과 관계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소비자가 소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설정하려는 노력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소비는 정체성의 형성을 침해하는 순간에 주목하는 소비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환경이 계급에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 베블린이 주장하는 시대의 소비자들은 소비를 통해 자신이 속한 계급을 드러내는 것이 가능했지만 포스트모던 시대의 소비자들은 소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없다. 누군가의 정체성이 그들 둘러싸고 있는 사물과, 혹은 사물들이 가진 상징적인 가치와 연결되어 있다면 그 정체성은 상징적 가치만큼이나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36)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짐멜(Georg Gimmel)의 '패션과 소비'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자.

 

자기는 자기 세계 안의 사물과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는 존재이다. 그런데 그러한 상호 작용의 풍부한 기회를 소비가 제공한다는 점에서 소비야말로 자기의 고양을 위한 특권화된 영역이라고 본다......근대는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는 상품의 숫자가 엄청나게 증가한 사회라는 점에서 솝자들은 상품의 홍수 속에서 스스로 소비를 통한 조절에 실패하게 된다. 상품의 선택의 폭이 지나치게 증가하면 상품의 소비를 통해 자기 삶의 지향과 조화로운 도구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문화의 변화에 끌려다닐 수 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221.

더 심각하게 현대사회와 소비를 꿰뚫는 문장은 사회연구자 롭 쉴즈(Rob Schields)에서 나온다: 방향성의 상실을 통해 모든 통제력을 상실한 현대인들은 그저 쇼핑센터를 수동적으로 표류하고 있을 뿐이다. 219. 패션과 소비에 대한 사회학자, 철학자들의 담론을 듣고 있노라면 '소비하는 행위'가 그저 즐거운 '오락거리'로 전락했다는 생각마저든다. 소비야말로 현대인의 권태를 없앨 수 있는 가장 일상적인 수단이 되었기(지그문트 바우만 Zygmunt Baumann, 211)때문이다.

 

*패션과 예술

 

패션은 소비의 영역도 있지만, 패션 자체가 예술이 되는 문화적 영역을 배제할 수 없다. 예술은 일단 자신의 세계에 관심을 집중해왔고, 패션은 자신을 예술적 연구를 위한 하나의 재료로서 기회를 제공해왔다. (178) 소비문화가 확산되면서 상류층의 소유물이던 패션은 대중 산업으로 발전했고, 서둘러 대중복의 흐름을 쫓은 신사복은 그렇지 않았던 숙녀복보다 더 발달하게 되는 기염을 토했다. 패션이 예술이 되고, 예술이 패션이 되는 과정은 기이했다.

 

어떤 대상에 상징적 가치를 덧붙이기 원한다면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상징적 가치를 가진 대상의 옆에 평범한 대상을 나란히 놓기만 하면된다. (174)

*패션과 육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전적으로 사회적 기준의 내재화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진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50.

 

우리 시대에는 시대의 요구와는 맞지 않는 외모, 혹은 다른 시대에 숭상될만한 외모를 가진 불행한 영혼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과거의 사람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기회를 갖는다. 146. 모든 시대마다 각양각색의 얼굴이 존재한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겠지만 오직 한 종류의 얼굴에만 아름답고 행복한 이상적 이미지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성형이 아무렇지 않게 된 대한민국, 외모지상주의라고 부르짖으면서도 '좋은게 좋은 것'이고 '예쁜게 예쁜 것'이라는 생각이 저변에 깔린 이 사회에서 패션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 패션은 '스타일'이라고 일컬어진다. 외모를 커버해주는 것이 '패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냥 예쁜'사람보다 '패셔너블'한 사람을 개성있다고 말하는 사회, 아마 모두가 이즈음이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패션은 새로운 대상이 언젠가는 잉여적인 것으로 변해가는 견고한 흐름을 필요조건으로 하여 전개되었을 뿐 아니라 새로 나올 것이 이전의 것보다 반드시 나아야 한다는 어떤 목적 의식없이 그저 새로운 것이 이전의 것을 대체한다는 쉼없는 지속만 지향해왔다. (57) 이런 의미에서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정체성에 대한 일관성'은 더 깊이 들여다 봐야 할 내용인데, 이 책에서 특히 주목할만 한 부분이기도 하다. 책의 앞부분에 느림의 미학에 대해 설명한 밀란 쿤데라의 문장이 나왔던 이유가 여기 있다고 본다. 패션은 변화해왔고, 그 '변화'에는 일관성이 있었고, 이러한 변화에 대한 일관성이 패션을 완성해왔다. 바로 그 지점, 패션에 대한 철학이 가치있게 빛나는 점을 이 책은 관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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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망현 內望顯 - 의사와 기자 두 개의 눈으로 바라본 김철중의 메디컬 소시올로지
김철중 지음 / Mid(엠아이디)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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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염려스럽지만 바쁜 일상을 지내다보면 자연스럽게 잊게 되는 관계. 감기라도 걸려야 비로소 ‘내가 소홀히 다루었구나’ 하고 생각하며 조깅도 해보고 요가도 해보고 하는 그런 관계. 조깅도 요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도루묵이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험한 세상을 살며 지친 그에게 위안을 삼아주고 싶은 그런 관계.

 

 

내 몸과 나는 그런 관계에 있다.

 

 

‘몸을 사린다’는 말이 있다. 아프지 않으려고 미리 몸을 잘 보호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디 현대를 살면서 그러기가 쉬울까? 출퇴근이면 뾰족하고 높은 힐을 신고 지하철과 통근버스를 뛰어나니기 일쑤고,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서 스트레칭 한번 하기 귀찮아 한다. 점심 저녁은 늘 밖에서 짜게 먹곤 하고,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눈을 혹사시킨다.

 

 

이 책 ‘내망현’은 그런 현대인의 건강을 날카롭게 진단하고 해결책을 찾아보는 책이다. ‘메디컬 소시올로지(medical sociology)라는 컨셉에 맞게 의학을 사회적인 상황에 맞추어 풀어보면, 재미있지만 섬뜩하다.

 

 

작가는 풍부한 사례와 통계학적 수치를 겸비한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객관적인 의학적 사실을 보통의 독자에게 매우 간결하고 논리적으로 이해시키고 있다. 거기다 위트 넘치는 수려한 문장들은 현대 사회의 세태를 풍자하면서도 통쾌하게 의료계의 사회적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지만 간과하기 쉬운 문제들이 가득하다.

 

1. 지식을 쌓다

 

쉽게 접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보니, 아무래도 이쪽 분야에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독자에게 의학에 대한 지식을 쌓도록 도와준 지침서와 같은 역할을 도맡게 된다. 몰랐던 의학적 사실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뇌의 무산소 손상으로 기억이 상실되면 최근 것, 저장 기간이 짧은 것부터 사라진다. 그러다 옛것부터 천천히 회복되는데, 의식을 잃고 쓰려져 기억이 상실된 사람에게 "대통령이 누구냐"라고 물으면 처음에는 전두환이라고 했다가, 점차 상태가 좋아지면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순으로 올라온다.  p.32

 

2. 의료계에 대해 알다

 

의학적 사실 뿐 아니라 의료계에 대해 알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에서 온전히 맛볼 수 있는 기쁨. 응급실을 예로 든 부분, 우리나라 성형외과의 실태같은 것들이 특히 그랬다.

 

외모에 관심 많은 젊은 환자에게는 또 다른 배려가 필요하다. 진료가 다소 지체되더라도 얼굴 외상은 성형외과 전문의를 불러줘야 한다.'용문신 조폭'들의 상처는 용 모습 그대로 맞춰 꿰매줘야 뒤탈이 없다... 응급실은 사회 구성원의 몸과 세상의 변화가 맨 처음 감지되는 곳이다. 응급실의 창을 보면, 질병은 단순히 의학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와 복지, 보건 체계의 문제라는 것이 새삼 느껴진다. p. 156

 

3. 사회의 트렌드를 읽다

 

 

이 책들을 읽고 나서는 한번쯤 다시 되돌아보게 되는 것들이 있다. ‘김철수외과의원’처럼 과거에는 의사들의 이름이 사용되던 병원 간판이, 왜 지금은 ‘린외과의원’, ‘토마토성형외과’와 같은 간판들로 변화하게 되었는지. 어째서 ‘MRI'를 찍는 환자수가 이렇게 많은건지. 우리나라 종합병원의 응급의료실은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떻게 변화해나가야 하는지. 우리는 쉽고 재미있는 사례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심지어는 정확한 대상에게 쏟아내는) 몇 가지 충고들과 제언을 통해 우리는 의료계에서 일어나는 현대사회의 씁쓸한 단면과 함께 사회의학에 대한 미래상을 제시하게 된다. 사례가 워낙 방대하고 깊이가 있어 관심있는 분야별로 다양한 생활의학비법을 만날 수 있으니,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주어지는 행운일게다.

 

 

챕터마다 예쁘게 삽입된 그림을 보는 재미도 쏠쏠한데, 책의 마지막쯤 되면 이 챕터에는 어떤 그림이 삽입되어 있을까, 를 유추해보는 때가 있을거다. 훗. 그게 어디가 될지는 이 책의 다음 독자가 될 이에게 맡기기로 한다.

 

 

사람을 사랑하는 따뜻한 작가의 눈에서 사람이 만들어가는 사회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깊이있는 사회의학적 분석. 개인의 차원에서부터 사회정책적 차원까지 사고의 범위를 넘나드는 재미를 보게 되는건 이 책을 읽는 독자가 맛보는 특권일것이다.

 

내망현(內望顯): (비록 이 책 안에는 이 한자어에 대한 풀이는 없지만) 안과 바깥을 멀리 들여다보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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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짐승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9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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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어떤 모습인지도 알지 못한다. 거울에 비친 우리 모습을 알고 있고 사진에서, 또는 영화에서 우리를 인식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44)

 

 

프란츠에 대한 사랑과 열정, 그것이 집착으로 변한 이후에도 지속될 수 밖에 없는 사랑을 빙자한 사랑에 대한 염원. 비록 마지막장에서 밝혀진 프란츠의 죽음에 대한 원인이 무엇이었든, 그것조차도 사실 나의 사랑에 대한 집착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 기이한 시대와 그 시대의 변두리

 

 

‘기이한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얼마나 많이 우려먹을지 모르겠습니다. 독일 작가들이 바라보는 ‘기이한 시대’. 그런데 앞으로 또 얼마나 더 많은 글이 쏟아질지 알 수 없습니다. 개인의 사유가 얼만큼 확장해나갈 수 있는지, 이 소설은 그 끝을 도전하는 듯 담담하게 기이한 시대 끝무렵에 벌어진 나와 프란츠의 사랑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기이한 시대-정확하게 말하면 1990년, 독일 통일이 이루어진 직후 이겠지요. 나는 프란츠와 만나게 됩니다. 기이한 시대를 서로 다른 배경에서 보내온 두 사람이 겪는 갈등은, 사실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동독시절에 베를린에서 읊던 노래를 프란츠에게 불러주는 나를 보며 프란츠가 경멸하는 눈빛을 보낸다거나, 프란츠가 고향인 울름에서 쓰던 시골스러운 서독 독일어를 쓸때 내가 생각하는 둘 간의 차이점이라거나. 이런 것은 언어에서 드러나지 않을지라도 작가가 염두하고 썼을 두 독일간의 차이점을 묘사하는 장면입니다. -우리라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남북한이 통일했다고 생각해보면, 우리는 아마 엄청난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게 될 것입니다.- 나와 프란츠는 이 ‘기이한 시대’를 다른 곳에서 보내 온 사람들입니다. ‘기이한 시대’의 직후는 종종 ‘자유’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그 자유가 자신을 속박하는 계기로 작용했다고 말하는 모순을 보이기도 합니다. 왜.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작가 자신도 동독 베를린에서 서독 베를린 사람들이 갇혀 있으면서 하늘에서 물자를 공급받는 것을 지켜보며 컸습니다. 실제로 작가는 동독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들에 몸서리 치며 서독에서 낼만한 책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기이한 시대가 끝나고 나니, 자유가 오는 듯 했을 것입니다만. 그 자유가, 모순없이 오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유로운 생활을 꿈꿔온 나도, 기이한 시대에 일상적으로 행해졌던 여행규제와 비교하면 규제가 해제된 것이 기분좋은 정상적인 일로 여겨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것을 잘못된 생활방식이라고 생각(101)하고 있습니다.

 

 

동경의 시간이었을지 모르는 기이한 시대의 최후, 동경의 장소였을지 모르며 기이한 시대에는 가볼 수 없었던 ‘플리니 무디’.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지금은 대체 몇 살인지 모를 나는 읊조립니다.

내가 플리니 무디의 정원이라고 부른 그 장소는 갑자기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그곳은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목적지, 어쩌면 전 세계에서 오는 여행단을 위한 하나의 정거장이 되었던 것이다. (71)

 

#. 프란츠를 만들어 낸 나, 나를 만들어 낸 프란츠

 

프란츠는 이 소설 전반을 지지하는 인물이지만, 여기서 함정은 사실 그의 이름이 프란츠인줄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프란츠는 나와 작가에게 하나의 상징과 같은 것이죠. 집착, 열정, 사랑의 상징, 경멸의 대상. 그 모든 것이 포함된 것이 바로, 프란츠라는 인물로 구현된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 궁금해졌습니다. 프란츠는 정말 존재하기는 했던 걸까? 혹 프란츠라는 인물 자체가, 나에 의해 꾸며진 허구는 아니었을까. 예전에 일요일 아침에 하는 MBC 서프라이즈에서, 어떤 남자를 그저 ‘좋아해서’ 사귄다고 생각했고 상상임신까지 했던 여자의 이야기를 본적이 있습니다. 마치, 프란츠는 나에게 그런 존재가 아니었을까.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미쳐버릴 것 같은, 그런 존재.

 

 

기억, 사람의 기억 말입니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이야기 하듯,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은 내가 이것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모를 정도로 내 뇌 속에서 편집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쪽으로만 기억을 하고, 내 기억을 편집해서 그랬던 것처럼 생각하고. 그 생각이 나를 지배해 내 뇌는 나의 허구가 내 기억을 관장해버리도록 두고. 만일 프란츠가 그런 존재라면 말입니다. 나는 프란츠를 상징화 시켜두고, 무엇인가 거기에 내가 존재했음을 밝히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내 존재의 의미를, 프란츠를 통해 찾고 싶었던게 아닐까요? 동독을 지내고 엄청난 혼란기를 겪고 있는 작가와 내가, 사라진 동독의 물건들, 화폐들, 정치 사상들, 이 모든 것이 마치 존재했던건지 존재하지 않았던 건지도 기억해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아닐까요. 그리하여 나라는 존재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음을 기억해 내기 위해, 그 혼란기에 프란츠라는 인물을 내세워 그것을 기억해놓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자기 나이가 일흔인지 아흔인지도 잊어버린 노년기의 여자. 왜 작가는 이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걸까요. 모든 것이, 갑자기 너무 늙어버린 후에 인생을 회상하는 것 처럼 바뀌어버린 세상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물론 모두, 제 상상력에서 나온 이야기일 뿐입니다.

 

 

#. 슬픈 짐승과 브라키오사우르스

 

 

슬픈 짐승이 눈을 반짝이며 식육식물사이에 여기저기 흩어져있고, 그들이 무섭지 않은 나는 그들 가운데 누워있는 한 마리 짐승입니다. 나는 유일무이한 브라키오 사우루스의 전공자이며, 그저 누워있는 슬픈 짐승일 뿐입니다. 집착, 욕망, 사랑, 열정, 절망, 이별. 이 모든 것을 겪은 나는 한 마리 슬픈 짐승이 되어 그들과 함께 식육식물 사이에 내 자리를 찾을 뿐입니다. 한 마리 공룡이 남긴 발자국처럼. 브라키오 사우루스는 프란츠와 나를 만나게 했고, 프란츠와 나를 이어주었으며, 프란츠의 부인이 나를 알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프란츠와 이별하고 나는 브라키오사우루스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곳으로 인사발령이 났고, 나에게 공룡의 발자국처럼 프란츠는 나를 짓이기고 떠났습니다. 내가 사랑에 울부짖는 것, 프란츠가 마지막에 보여준 울부짖음, 나의 나아갈 수 없음에 대한 울부짖음, 기이한 시대를 향한 울부짖음, 기이한 사회를 향한 울부짖음, 이념을 향한, 세상을 향한, 미래를 향한, 울부짖음. 크고 작은 짐승들이 내 집의 식육식물사이 여기저기 반짝이고 있는 것은 그런 울부짖음에 대한 해답이자, 또 다른 질문이자, 그리고 나 역시도 그 흔적을 남기고 떠날 한낱 짐승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매개체입니다.

 

 

사랑만 집착이겠습니까.

세상도 집착이며 사는 것도 집착이며 나에 대한 집착도, 집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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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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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 둘의 이야기를 조금 해야겠다. '설국'은, 뭔가 대자연의 하얀 눈이 가득 덮혀있는 후지산을 연상시키는, 그런 작품이라는것이 내가 이 작품에 갖고 있는 편견이었다. 책을 조금 읽었을때, 어딘가 매우 전통적인 방식의 일본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일본의 소설이 아니라 아마도 유교문화를 갖고 있는 국가들이라면 가졌을 성역할에 대한 관념들. 그것들이 적나라하게 흩뿌려졌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었다.

 

나는 그때서야 이 소설이 쓰인 해를 확인했다. 1937년. 시기상으로는 대한민국이 일제하에 있던 식민 통치기였으며, 일본 국격에 대한 여러가지 논란으로 도쿄가 어지러웠을 시기. 두번째로 이 시기는, 여전히 성에 대한 전통적 역할이 굳건히 건재하고 있을 시기. 이 두가지 전제조건을 갖고 다시 책을 읽었다. 역시 가장 먼저 눈에 띄였던 것은, 시마무라와 고마코의 대화, 그 둘간의 대화. 그래서 '대자연의 어쩌고'는 차치하고, 나는 남성과 여성의 정통 성역할에 조금 더 집중해 읽기로 했다.

 

#1. 남자와 여자, 전통적인 성의 역할

 

뭔가, 우리가 아마도 고리타분하다고 느낄지 모르는 정통적인 성의 역할이란, 이런것이다. 남자는 떠날 것이고, 여자는 기다릴 것이다. 이 소설의 전체적으로 남/여가 어떻게 구분되어 있는지 먼저 살펴보면, 시마무라-남자, 반말을 사용, 도쿄시람, 도시남, '돌아갈 곳'이 있음. 고마토-여자. 존대어를 사용, 시골, 게이샤라는 직업, '남을 것'임 =또는, '도쿄로 데려가 줄' 것을 남자에게 부탁함. 이정도로 요약이 가능하다. 이 소설에서 확실하게 '전통적인 성역할이 구분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여자는 어떤 남자를 위해 재원을 마련하려고 게이샤가 된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할 수 있는데까지는 해봐야'한다고 말한다.

 

'지겨워요, 그런 신파극 같은 얘기. 약혼녀라는 건 거짓말이에요......굳이 누굴 위해 게이샤가 된 건 아니지만, 할 수 있는데까지는 해봐야죠.' 60.

 

그녀는 떠날 남자에게 나를 보러 와달라고 부탁한다, 아니. 애걸한다.

 

'1년에 한번이라도 좋으니 와줘요. 제가 여기 있는 동안은 1년에 한번, 꼭 와주세요'. 89

 

이런 분위기는 소설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데, 고마코는 요코에 비해 매우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시마무라에게 여자는 '요코'다. 여자에 대한 전통적 이미지와 관념이 매우 크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고마코: 그걸로 족해요.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건 오직 여자뿐이니까. 112.

시마무라: 요즘 세상에선 그렇지. 하고 중얼거리다 시마무라는 이 말이 너무나 공허하여 오싹해졌다. 112.

 

시마무라: 그럼 돌아갈 때 데려가 줄까?

고마코: 네, 데려가 주세요. 117.

 

이 대화들을 읽으며, 과연 지금의 사람들은 이 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실 조금 고민이 되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지목되었고, 이 작품의 포인트가 여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너무나 당연하게 '여성'이 된 입장에서 보이는 이런 정통성들. 아마도 90년대 한국 문학에서 여성작가들이 많이 사용했던 방법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조심스럽게 하곤 했다. 신경숙, 은희경, 전경린 정도. 남성의 폭력적 태도와 거기에 상처받은 여성의 모습. 이것이 그때의 그것과 무엇이 다를까.

 

조금 더 가자, 시마무라는 그 모성-여성- 안에 잠들며 안심한다. 떠나갈 남자는 여자를 취하고서야 어린아이가 된다. 게다가 게이샤-손님으로서의 관계를 벗어나 사랑을 느끼는 고마코가, 시마무라는 '이해가 안된'다.

 

마침내 시마무라는 여자의 뜨거운 몸에서 완전히 어린 아이처럼 안심했다. 126.

고마코가 자신에게 빠져드는 것이 시마무라는 이해가 안되었다. 133.

 

왜, 그들은 취하였고, 여성들은 기다릴 것이기 때문이다. 왜 오페라 나비부인이 생각나는가. 왜 오페라 주인공들은 늘 비극의 여주인공인가. 왜 남자들은 취하고 떠나는가. 왜 이 작품이 이렇게 읽혔는지는. 글쎄 그것까지 말하라면 할말을 잃을 것 같다.

 

#2. 대자연과 인간

 

-제각기 산의 원근이나 높낮이에 따라 다양하게 주름진 그늘이 깊어가고, 봉우리에만 엷은 볕을 남길 무렵이 되자, 꼭대기의 눈 위에는 붉은 노을이 졌다.55.

-국경의 산을 북쪽으로 올라 긴 터널을 통과하자, 겨울 오후의 엷은 빛은 땅밑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 했다. 낡은 기차는 환한 껍질을 터널에 벗어던지고 나온 양, 중첩된 봉우리들 사이로 이미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산골짜기를 내려가고 있었다. 75

-곰처럼 단단하고 두꺼운 털가죽이라면 인간의 관능은 틀림없이 아주 다르게 변했을 것이다. 인간은 얇고 매끄러운 피부를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노을진 산을 바라보노나니, 감상적이 되어 시마무라는 사람의 살결이 그리워졌다. 95.

-계절이 바뀌듯 자연도 스러지고마는 조용한 죽음이었으나, 다가가보면 다리나 촉각을 떨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113.

-그토록 고생한 무명의 장인은 이미 죽은 지 오래고, 아름다운 지지미만이 남았다. 136.

-멀고 가까운 높은 산들이 하얗게 변한다. 이를 <산돌림>이라 한다. 또 바다가 있는 곳은 바다가 울리고, 산 깊은 곳은 산이 울린다. 이를 <몸울림>이라 한다. 137.

 

설국의 문장은 굉장히 심도깊고 유려하다. 대자연 속에서 인간이 한낱 생명체에 불과할 뿐이라고 이야기 해주는 듯 한 '雪'의 문장. 이 문장들을 보고 있으면 참으로 '일본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정갈하고 단련된 표현. 주변환경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는 섬세함. 이야기의 스펙타클은 없지만 -마지막에 요코가 죽는 정도가 가장 스펙타클하다 할 정도로-. 매우 세밀하고 자세한 일본의 정통문학이라는 생각. 일본의 문화와 색깔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는 생각은 충분히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름에 읽는 '설국'은 참으로 답답했다.

탁트인 후지산 구경을 하고와야, 이 소설이 참으로 멋지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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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3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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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Angst des Tormanns beim Elfmeter_

(11미터* 앞에선 골키퍼의 불안)

*페널티킥의 규정거리가 11미터인가보군요. 이 단어가 페널티킥을 가리키는 거리인줄 이 소설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독일 문학의 거장 중 하나인 페터 한트케는 ‘실험적인 문학’으로 입지를 다져왔습니다. 학부때 독문학을 전공했던 저에게 페터 한트케는 ‘연구해야할 대상’이었죠. 그도그럴것이, 그는 2-3학년 전공수업에 빠지지 않는 작가였습니다. 그때 접했던 작품들이 ‘관객모독’, ‘베를린 천사의 시’ 였는데, 그때만 해도 책을 읽으며 한숨을 쉬었던 기억이 납니다. 작품 하나를 분석하는데 꼬박 한학기가 걸린 적도 있었습니다. 문장 하나를 놓고 이 문장과 사람의 인생과 가치에 비추어 보는 연습을 했습니다. (독문학 교수님들이 이런 방식을 좋아하시는가봅니다.) -비슷한 경험의 최고봉은 베르히트였던 기억도 납니다.- 각설하고, 이 작품,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의 불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 작품 곳곳에 묻어나는 언어 실험

 

실험 문학에 능한 작가 페터 한트케답다는 생각이 들었던 부분은 바로, 마치 초현실주의로 돌아가는 듯 여관방의 물건들을 묘사하다가 결국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선 혹은 점으로 보여지는 듯 그림으로 표현된 부분이었습니다. (112쪽) 두 번째로, 곳곳에 드러나는 실험적 방식이 매력적입니다. 가령, 한 문장을 표현할 때도 ‘한 문장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독일어를 쓰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장난인데요, 순경들의 말장난 (혹은 그들의 암호를 문장화 시킨) 부분입니다. (41쪽) ‘Geh Weg’을 의도적으로 ‘Gehweg' (하나는 명령형이고 두 번째는 명사이니 전혀 다른 말입니다.) 이라고 말한다든지, ’ausweisen'을 ‘ausweissen'으로 말한다든지 (전자는 번역된 것 처럼 ‘증명하다’란 단어인데 사실 ‘신원조회해본다’로 쓰였을 겁니다. 후자는 하얗게 만들버린다는 뜻입니다. 전자는 아우스바이젠으로 읽히고 후자는 아우스바이쎈으로 읽힙니다. 이런 말장난.......정말 훌륭한 언어적 술수입니다. 이래서 아마 어느 평론가가 지난 십년간 독일어로 쓰인 가장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실험적 태도가 아마 피터한트케를 엄청난 매력을 지닌 작가로 각광받게 했을 것입니다. ‘언어 자체에 집중한 실험적인 탐구능력’말입니다. 작가라면 ‘언어’에 굉장히 예민한 사람들이라는 뜻인데, 그런 면에서 아마 피터 한트케는 상당한 실험적 태도를 갖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아, 언어에 민감한 이 작가가 언어 자체에 갖고 있는 태도를 단적으로 볼 수 있는 문장 하나만 걸고 넘어가겠습니다.

 

사실 그들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언어 장애자들이에요 (95쪽)

스스로 언어 안에 갇혀있다는 생각을 하다보면, 내 생각들이 언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는 건지, 언어가 내 생각들을 만들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까지 생각이 가 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저도 그렇지만 사람들 누구나 일종의 ‘언어 장애’를 겪고 있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의 불안

 

작품 전체에 흐르는 무던한 긴장은 ‘불안’이라는 감정으로 귀결됩니다. 작품 초반에 살인을 저지르고 블로흐는 도망을 다니는 신세입니다. 그런데도 단 한번도 블로흐의 불안한 감정이 드러나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 불안과 긴장감 자체가 바로 ‘페널티킥 앞에 서 있는 골키퍼의 불안’, 대놓고 드러낼 수 없으며, 곧 일어날 일에 대한 끈덕진 긴장감은 이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분위기입니다. 작품의 주인공이 실제로 골키퍼였다는 것을 개연성있게 밀고나가며 작품은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의 불안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공을 차기 위해 키커가 달려 나오면, 골키퍼는 무의식적으로 슈팅도 되기 전에 이미 키커가 공을 찰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면 키커는 침착하게 다른 방향으로 공을 차게 됩니다. 120.

어느 방향으로 들어올지 알 수 없는 극도의 불안감. 그 앞에서 날선 골키퍼가 되어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작가가 보여주고 싶어한 그 불안감은 바로 ‘어디서 어떻게 날라올지 모르는’ 페널티킥의 최후와 밀접하게 연관을 맺습니다. 실제로는요?

 

페널티 키커는 그의 두 손을 향해 공을 찼다. 120.

 

키커는 변주를 주려다 말고, 사실 골키퍼의 손을 향해 공을 차죠. 그 공의 방향이 변주된 곳이라고 생각했을 골키퍼는 직구로 날아오는 공의 방향에 질겁할 수도 있겠고, 미리 페널티키커의 발을 보고 그것을 알아챘을 수도 있습니다. 결말은,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불일치 (92쪽) 속에서 사람들은 불안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 사건의 유의미함과 페널티킥

 

예전에, 독일에서 경찰 심문을 당했던 유학생 선배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경찰이 심문을 하려고 다가왔는데, 선배는 모르고 반대쪽으로 (그냥) 몸을 틀어 걸었죠. 경찰이 선배를 다급하게 불렀는데 선배는 이어폰을 끼고 있어 그걸 못들었어요. 그러다 뒤에 경찰이 선배를 잡으러 뛰어왔대요. 뒤에서 누군가 뛰어 자기에게 오는게 느껴지니까 반사적으로 선배는 뛰었고, 경찰은 선배를 잡았죠. 선배는 경찰차까지만 연행되었는데, 여권이 없어 또 애를 먹었다가 풀려났어요. 죄도 없으면서 왜 뛰었냐고 경찰이 물었대요. 선배가 대답했대요.

심문을 당할 수 있다고 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라고요.

 

심문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이 사건과 무관하다는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할 필요가 전혀없는 것이다. 사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85쪽)

윗 문장을 읽으면서, 몇 년전 그 얘기를 하던 선배의 표정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심문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소설 속 블로흐에게 이 이야기는 전혀 반대의 논조에서 읽혔겠죠. ‘사건이 존재하는 한’, 그 사건 앞에서 골키퍼 처럼 불안에 떨고 있는 블로흐에게는. 블로흐 뿐이겠습니까, 어떤 사건이 내일 벌어질지 모르는 이 시대의 사람들, 예정된 불안을 겪고 있는 사회의 사람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일 겁니다.

그런데 여관방에 있는 블로흐는. 블로흐는 ‘자기 자신에 관한 의식만은 너무 강렬해서 불안스러웠다(76쪽)’ 고 합니다. 불안이 도처에 깔린 이 사회 속에 우리는 의식하나가 너무 강렬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군요. 이런.

 

* 불안이 시작된 지점

 

한가지를 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블로흐의 ‘불안이 시작된 지점’말입니다. 도망을 다니는 블로흐는 거의 끝에 가서야 고백합니다. ‘그는 너무 오래 무직 상태로 있었다’는 문장이었다. (77쪽). 그는 도망을 나왔습니다. 왜? 아침에 현장감독이 그를 ‘흘끗’ 쳐다보았기 때문이죠! 그는 그것을 무려 해고의 표시로 이해했습니다. 혹시, 누군가 내게 아무생각없이 어떤 말을 건넸는데, 그것에 상처를 받은 적 없으세요? 그것을 겪은 사람이라면 알겁니다. ‘아무생각없이’ 받은 어떤 행동이 나를 얼마나 불안하게 만들 수 있는지 말입니다. 그것이 불안의 시작입니다. 정당성을 찾을 수 없는 불안, 그리하여 그 불안에서 안으로 갇혀버리고 마는 상태. 불안을 느끼는 블로흐의 모습에서 카프카가 보입니다.

 

깊이 잠들지도 못했는데 다시 깼다. 처음에는 몸이 분리되어 바닥으로 떨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이 침대에 그대로 누워있음을 알았다...... ‘곱사등이 되었나!’ ......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게 누워있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동작이자 쓸모없는 일이었다. (75쪽)

 

마치 금지된 소리를 듣는 것 처럼(45쪽), 블로흐의 불안은 여관방 한쪽에서 깊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

한참 못 읽었던 독일 작품을 오랜만에 읽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여러 가지 것들이 불안하게 익숙했습니다. 이 작품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불안을 소재로 다룬 영화들이 독일에 참으로 많습니다. 갑자기 영상처럼 떠오른,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영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추천해드립니다. 통일 전의 독일을 다룬 많은 작품에서도, 통일 후 독일 사회를 다룬 작품에서도, 이 ‘불안’은 마치 독일 사회 저변에 깔린 분위기인 양 흔들리는 화면속에 늘 내재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불안이야 어느 사회든 없을 수 없지만요. 불안의 양상이 어떻게 전개되어가는가. 지금 사회의 불안은 과연 어떤 것인가. 어쩐지 이런 것들에 대해 깊이 사유해보고 싶은 일요일 오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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