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3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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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Angst des Tormanns beim Elfmeter_

(11미터* 앞에선 골키퍼의 불안)

*페널티킥의 규정거리가 11미터인가보군요. 이 단어가 페널티킥을 가리키는 거리인줄 이 소설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독일 문학의 거장 중 하나인 페터 한트케는 ‘실험적인 문학’으로 입지를 다져왔습니다. 학부때 독문학을 전공했던 저에게 페터 한트케는 ‘연구해야할 대상’이었죠. 그도그럴것이, 그는 2-3학년 전공수업에 빠지지 않는 작가였습니다. 그때 접했던 작품들이 ‘관객모독’, ‘베를린 천사의 시’ 였는데, 그때만 해도 책을 읽으며 한숨을 쉬었던 기억이 납니다. 작품 하나를 분석하는데 꼬박 한학기가 걸린 적도 있었습니다. 문장 하나를 놓고 이 문장과 사람의 인생과 가치에 비추어 보는 연습을 했습니다. (독문학 교수님들이 이런 방식을 좋아하시는가봅니다.) -비슷한 경험의 최고봉은 베르히트였던 기억도 납니다.- 각설하고, 이 작품,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의 불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 작품 곳곳에 묻어나는 언어 실험

 

실험 문학에 능한 작가 페터 한트케답다는 생각이 들었던 부분은 바로, 마치 초현실주의로 돌아가는 듯 여관방의 물건들을 묘사하다가 결국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선 혹은 점으로 보여지는 듯 그림으로 표현된 부분이었습니다. (112쪽) 두 번째로, 곳곳에 드러나는 실험적 방식이 매력적입니다. 가령, 한 문장을 표현할 때도 ‘한 문장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독일어를 쓰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장난인데요, 순경들의 말장난 (혹은 그들의 암호를 문장화 시킨) 부분입니다. (41쪽) ‘Geh Weg’을 의도적으로 ‘Gehweg' (하나는 명령형이고 두 번째는 명사이니 전혀 다른 말입니다.) 이라고 말한다든지, ’ausweisen'을 ‘ausweissen'으로 말한다든지 (전자는 번역된 것 처럼 ‘증명하다’란 단어인데 사실 ‘신원조회해본다’로 쓰였을 겁니다. 후자는 하얗게 만들버린다는 뜻입니다. 전자는 아우스바이젠으로 읽히고 후자는 아우스바이쎈으로 읽힙니다. 이런 말장난.......정말 훌륭한 언어적 술수입니다. 이래서 아마 어느 평론가가 지난 십년간 독일어로 쓰인 가장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실험적 태도가 아마 피터한트케를 엄청난 매력을 지닌 작가로 각광받게 했을 것입니다. ‘언어 자체에 집중한 실험적인 탐구능력’말입니다. 작가라면 ‘언어’에 굉장히 예민한 사람들이라는 뜻인데, 그런 면에서 아마 피터 한트케는 상당한 실험적 태도를 갖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아, 언어에 민감한 이 작가가 언어 자체에 갖고 있는 태도를 단적으로 볼 수 있는 문장 하나만 걸고 넘어가겠습니다.

 

사실 그들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언어 장애자들이에요 (95쪽)

스스로 언어 안에 갇혀있다는 생각을 하다보면, 내 생각들이 언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는 건지, 언어가 내 생각들을 만들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까지 생각이 가 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저도 그렇지만 사람들 누구나 일종의 ‘언어 장애’를 겪고 있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의 불안

 

작품 전체에 흐르는 무던한 긴장은 ‘불안’이라는 감정으로 귀결됩니다. 작품 초반에 살인을 저지르고 블로흐는 도망을 다니는 신세입니다. 그런데도 단 한번도 블로흐의 불안한 감정이 드러나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 불안과 긴장감 자체가 바로 ‘페널티킥 앞에 서 있는 골키퍼의 불안’, 대놓고 드러낼 수 없으며, 곧 일어날 일에 대한 끈덕진 긴장감은 이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분위기입니다. 작품의 주인공이 실제로 골키퍼였다는 것을 개연성있게 밀고나가며 작품은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의 불안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공을 차기 위해 키커가 달려 나오면, 골키퍼는 무의식적으로 슈팅도 되기 전에 이미 키커가 공을 찰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면 키커는 침착하게 다른 방향으로 공을 차게 됩니다. 120.

어느 방향으로 들어올지 알 수 없는 극도의 불안감. 그 앞에서 날선 골키퍼가 되어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작가가 보여주고 싶어한 그 불안감은 바로 ‘어디서 어떻게 날라올지 모르는’ 페널티킥의 최후와 밀접하게 연관을 맺습니다. 실제로는요?

 

페널티 키커는 그의 두 손을 향해 공을 찼다. 120.

 

키커는 변주를 주려다 말고, 사실 골키퍼의 손을 향해 공을 차죠. 그 공의 방향이 변주된 곳이라고 생각했을 골키퍼는 직구로 날아오는 공의 방향에 질겁할 수도 있겠고, 미리 페널티키커의 발을 보고 그것을 알아챘을 수도 있습니다. 결말은,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불일치 (92쪽) 속에서 사람들은 불안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 사건의 유의미함과 페널티킥

 

예전에, 독일에서 경찰 심문을 당했던 유학생 선배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경찰이 심문을 하려고 다가왔는데, 선배는 모르고 반대쪽으로 (그냥) 몸을 틀어 걸었죠. 경찰이 선배를 다급하게 불렀는데 선배는 이어폰을 끼고 있어 그걸 못들었어요. 그러다 뒤에 경찰이 선배를 잡으러 뛰어왔대요. 뒤에서 누군가 뛰어 자기에게 오는게 느껴지니까 반사적으로 선배는 뛰었고, 경찰은 선배를 잡았죠. 선배는 경찰차까지만 연행되었는데, 여권이 없어 또 애를 먹었다가 풀려났어요. 죄도 없으면서 왜 뛰었냐고 경찰이 물었대요. 선배가 대답했대요.

심문을 당할 수 있다고 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라고요.

 

심문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이 사건과 무관하다는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할 필요가 전혀없는 것이다. 사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85쪽)

윗 문장을 읽으면서, 몇 년전 그 얘기를 하던 선배의 표정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심문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소설 속 블로흐에게 이 이야기는 전혀 반대의 논조에서 읽혔겠죠. ‘사건이 존재하는 한’, 그 사건 앞에서 골키퍼 처럼 불안에 떨고 있는 블로흐에게는. 블로흐 뿐이겠습니까, 어떤 사건이 내일 벌어질지 모르는 이 시대의 사람들, 예정된 불안을 겪고 있는 사회의 사람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일 겁니다.

그런데 여관방에 있는 블로흐는. 블로흐는 ‘자기 자신에 관한 의식만은 너무 강렬해서 불안스러웠다(76쪽)’ 고 합니다. 불안이 도처에 깔린 이 사회 속에 우리는 의식하나가 너무 강렬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군요. 이런.

 

* 불안이 시작된 지점

 

한가지를 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블로흐의 ‘불안이 시작된 지점’말입니다. 도망을 다니는 블로흐는 거의 끝에 가서야 고백합니다. ‘그는 너무 오래 무직 상태로 있었다’는 문장이었다. (77쪽). 그는 도망을 나왔습니다. 왜? 아침에 현장감독이 그를 ‘흘끗’ 쳐다보았기 때문이죠! 그는 그것을 무려 해고의 표시로 이해했습니다. 혹시, 누군가 내게 아무생각없이 어떤 말을 건넸는데, 그것에 상처를 받은 적 없으세요? 그것을 겪은 사람이라면 알겁니다. ‘아무생각없이’ 받은 어떤 행동이 나를 얼마나 불안하게 만들 수 있는지 말입니다. 그것이 불안의 시작입니다. 정당성을 찾을 수 없는 불안, 그리하여 그 불안에서 안으로 갇혀버리고 마는 상태. 불안을 느끼는 블로흐의 모습에서 카프카가 보입니다.

 

깊이 잠들지도 못했는데 다시 깼다. 처음에는 몸이 분리되어 바닥으로 떨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이 침대에 그대로 누워있음을 알았다...... ‘곱사등이 되었나!’ ......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게 누워있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동작이자 쓸모없는 일이었다. (75쪽)

 

마치 금지된 소리를 듣는 것 처럼(45쪽), 블로흐의 불안은 여관방 한쪽에서 깊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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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못 읽었던 독일 작품을 오랜만에 읽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여러 가지 것들이 불안하게 익숙했습니다. 이 작품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불안을 소재로 다룬 영화들이 독일에 참으로 많습니다. 갑자기 영상처럼 떠오른,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영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추천해드립니다. 통일 전의 독일을 다룬 많은 작품에서도, 통일 후 독일 사회를 다룬 작품에서도, 이 ‘불안’은 마치 독일 사회 저변에 깔린 분위기인 양 흔들리는 화면속에 늘 내재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불안이야 어느 사회든 없을 수 없지만요. 불안의 양상이 어떻게 전개되어가는가. 지금 사회의 불안은 과연 어떤 것인가. 어쩐지 이런 것들에 대해 깊이 사유해보고 싶은 일요일 오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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