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립자 열린책들 세계문학 34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이렇게 끝납니다:

 

이 책을 인류에게 바친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이런 어마어마한 결실을 맺게 된걸까요?

 

작품은 크게 형제에게서 벌어지는 이야기, 브뤼노와 성도착증 그리고 정신병원/ 미셸과 물리학 그리고 과학적 성과(라는 표현이 우습지만 우선 크게 나눌때는 이 표현만큼 좋은 표현이 없을 것 같아 그냥 둡니다). 이렇게 두 개로 크게 갈려있습니다.

 

# 브뤼노, 세상의 모든 성행위, 그리고 사회에 대한 강간

 

 

브뤼노는 이 세계(작게는 프랑스만 하겠습니다, 그러나 넓게는 미국사회와 소비욕에 불타는 현대인 모두를 꾸짖는 것 처럼 보입니다)를 심판하려고 작가가 전면에 배치한 인물입니다. 브뤼노가 <파리 마치>에 실린 기사를 소개하는 부분을 먼저 예로 들겠습니다. 입에도 담지 못할 범죄를 저지른 청년들에 대해 검사 다니엘 맥밀런은 말합니다. ‘중요한 건 인간 집단을 단죄하는 일이 아니라 한 사회 전체를 심판하는 일이다’라고 말입니다. 브뤼노의 말입니다.

 

‘다음 해에 맥밀런은 <육욕에서 살인까지: 어떤세대>라는 책을 발간했어. 프랑스에서는 <살인세대>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번역이 너무 엉성했지. 나는 그 책을 읽고 무척 놀랐어. 책을 읽기전에는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의 흔해 빠진 주장이 담겨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자료를 잘 활용해서 쓴 명쾌한 책이었어. 그는 방대한 조사 작업을 벌여 다비드의 행적을 낱낱이 밝히고 있었어.’

 

저는 이 부분에서 작가가 자신이 브뤼노의 행적을 일일이 밝힌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프루스트에서 보들레르로 넘어가는 경위, 그러니까 불안, 죽음, 수치, 도취, 동경을 그린 방식이 ‘어느 것 하나 내(브뤼노)가 느끼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없었다’는 고백을 통해서 브뤼노는 그의 성 도착증적 행동을 설득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브뤼노는 성적 행위들을 통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던져진 무기력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내세우고, 스스로 외롭지 않다고 각인시키려고 하는 인간의 강박증같은 사랑에 그의 시선을 고도로 밀착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이 단지 기존세대만을 뜻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미셸은 파리 11대학을 자진해서 입학했습니다. 파리의 1대학이 극우파이고, 12대학이 극좌파입니다. 1대학 출신이 가장 오른편에 앉고, 12대학출신이 가장 왼쪽에 앉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 극좌-극우의 개념입니다. 우엘벡은 형제를 통해 68세대의 좌파적 사고방식을 그냥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 좌파의 무기력함을 이야기하려고 한 것이죠.

 

 

브뤼노는 온갖 성적 행동을 합니다. 온갖 상황에서의 마스터베이션, 매춘은 기본이고, 스와핑까지. 그런데 규칙이 있습니다. 그는 강간은 하지 않고, (학생 강간 직전까지 갔다가 마스터베이션을 하죠) 자신이 즐깁니다. 포인트가 여기 있습니다. ‘자율적인 성’, 자신의 쾌락에서 개별성을 찾는다는 사실. 브뤼노는 이런 ‘개별성’에 사회해체주의적 사고방식이 묻어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쾌락을 바라보는 시선은 물론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게 다 부질없다고 생각하면서 쾌락에 엄격한 시선을 보낼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극단적인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마르세양 (나체) 해수욕장의 모래언덕은 누구에게나 아주 인간적인 장소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곳은 아무에게도 정신적 고통을 주지 않고 각자의 쾌락을 최대화하자는 휴머니즘적 제안에 딱 들어맞는 장소이다. 237.

 

기존 사회와 기존 세대에 대한 심판. 그리하여 젊은 세대의 방황과 갈등, 무기력을 ‘성적’ 안간힘을 써서 그려냅니다. 그러기 위해 작가가 들여온 또 다른 재료는, 그렇습니다. ‘이론 물리학’입니다.

 

 

 

# 미셸, 형이상학적 혁명을 세상에 남길 이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에 의존하기만할 뿐, 사회에는 거의 쓸모가 없어. 내가 할 줄 아는 거라곤 낡아빠진 문화적 대상에 대한 모호한 해석을 생산하는 것 뿐이야. 그런데도 나는 봉급을 받아. 그것도 평균을 훨씬 웃도는 짭짤한 봉급을 받지.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쓸모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내 동생 뿐이야. 219.

 

작품의 마지막에서 미셸이라는 인물은 거의 전설에 가깝습니다. ‘지구 표면의 도처에서 지칠대로 지친 인류가 자기들 자신과 자기들의 역사에 회의를 품은 채로 그럭저럭 새로운 밀레니엄으로 들어갈 채비를 하는’때에 미셸이 한 연구의 과학적 성과는 미래의 인류에게 과학이 답이라는 것을 주지시키려고 하죠. 미셸의 연구는 작품 전반에 ‘매우’ 진지하게 진행됩니다.

 

브뤼노의 동생 미셸은 세월이 흐른 뒤에, 인간의 행동을 초유동 상태의 헬륨의 운동과 비교한 짤막한 논문을 발표하게 된다. 인간의 뇌 내부에서 뉴런과 시냅스 사이에 전자가 교환되는 것은 원자 수준의 아주 미묘한 현상이다. 이 현상은 원칙적으로 말해서 양자 역학에서 말하는 불확정성의 원리의 지배를 받는다. 하지만 대다수의 뉴런은 작은 차이들을 통계적으로 무효화시킴으로써 인간의 행동에 결정론적인 성격들을 부여한다. 그래서 인간의 행동은 다른 모든 자연계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틀을 벗어나지 않게 된다. 100.

 

미셸은 확신하고 있었다. 뉴런과 시냅스의 네트워크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끌개(어트랙터)의 구조와 성격을 알아내는 것이 인간의 행동과 사고를 설명하는 일의 열쇠라는 것을. 244

 

공(空)의 형태로 비어있는 우리의 세포 속에 존재하는 소립자. 그 안의 원자... 우리는 공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정말 작은 차이에 의해 우리의 생김이 달라집니다. 반대로 말하면 너무 많은 세포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신경세포는 미묘한 것들을 무효화 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결정론적으로 우리는 인간의 생김을 하고 인간의 사회를 꾸리며 인간이 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사람들은 통제 영역에서 벗어나는 순간 인간이 아닌 것으로 낙인이 찍힙니다. (그러니까, 브뤼노의 경우 말입니다.) 아버지가 다른 아들 둘을 끌어다 놓고 하나는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해 지배받는 이론 물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로, 하나는 성도착증으로 자신의 불안함을 온몸을 다해 꺼내놓는 인물을 소개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물은 경사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따라 흘러간다. 인간은 거의 모든 행위에서 자기 원칙을 고수하기 때문에 진로 변경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91.

 

작가는 브뤼노를 통해 한 사회를 만들고 집단의 규칙을 세웠고 그 세대를 이끌었던 과거세대를, 그리고 인간전체를 사실 뒤집어보게 만들었고, 동생 미셸을 통해서는 미래 세대의 인간복제 가능성에 대해서 탐구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그 방법이 매우 희극적입니다. 클론으로 번식하는 변종들이 성적인 방식으로 번식하는 변종보다 빠르다는 둥, 과학이 도달한 곳에는 인류가 없고 인류를 대체한 새로운 종이 있을 뿐이라는 둥.

 

중요한 것은 DNA에 집중하지 않고 생명체를 하나의 자기 복제 시스템으로 총체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라고. 294.

 

저는 마지막 3부를 읽으면서 작가가 미셸을 통해 ‘과학이 세상에 빛을 줄것이라는 사람들의 믿음’ 자체를 의심하도록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우 풍자적으로 (미셸의 후임이라고 하는) 허브체작이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복제 등에 대해 학문적 대성공을 거둔 듯 보이도록 장치를 꾸려두었지만, 그것은 미셸의 의도와 달랐다는 것을 끝에서 밝히고 있는 점이 그렇습니다.

 

돌이켜 보면 인간들이 자신들의 소멸을 그토록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어쩌면 그들이 은근히 안도감을 느끼며 자기들의 소멸에 동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33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립자 열린책들 세계문학 34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과학과 철학의 지점, 프랑스 진보와 그것을 마주한 세대의 갈등과 대안이 그대로 녹아난 수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부학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7
페데리코 안다아시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테오 콜롬보의 해부학적 발견을 매우 섬세한 상상력으로 꿰매놓은 작품. 반양장인지 양장인지 그냥 샀는데 의외로 양장이 들고다니면서 읽기 편하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겔 스트리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2
V.S. 나이폴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영화에는 주인공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어떤 주인공이 있고, 그 주인공의 상대역이 있고, 그들을 보조하고 있는 보조 출연자가 있습니다. 어떤 매우 상업적인 영화를 보다가 언젠가 저는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주인공이 아닌 모든 출연자에게는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는 법인데, 주인공은 마치 주인공의 삶이 모든 사람의 삶을 주무르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고 있군, 하고 말이죠. 그 영화를 보고 얼마후에 회사 선배에게 말했습니다. '모두가 자기 삶의 나레이션을 갖고 있는거니까. 선배의 삶에도 나레이션이 있는 것이고요'. 그때 제 선배가 대답했습니다. 그런게 어딨어, 다 똑같이 사는거지.

 

'다 똑같이 사는거지'라뇨. 저는 그 이야기를 도저히 공감할 수가 없었습니다. 글은 한자 한자를 써서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고, 단락이 됩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노트에 다른 글자를, 문장을, 단락을 쓰게 됩니다. 같은 탄소로 만들어졌지만, 석탄과 다이아몬드는 다른 형체를 갖고 있지 않은가요? 아인슈타인이 그랬던가요. 모든 사람의 시간은 다르다고.

 

미겔 스트리트는 그런 저에게 엄청난 웃음을 주면서 뇌를 자극시킵니다. 거봐, 이 거리에서 달리 사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어느 날은 A가 주인공이고, 어떤 날은 B가 주인공인거지. 그러니까 모두는 자기 삶의 주인인거고. 저는 '사람은 다 똑같다'고 말했던 그 선배에게 이 책을 권해주고 싶지만, 아마 그는 그런 말을 했던 사실조차 잊었을 것이므로 그런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특별하게 마음이 갔던 인물들의 이야기가 소개된 챕터는 책장을 깊게 접어두었습니다. <그가 선택한 직업>의 엘리아스, <B. 워즈워스>의 시인 워즈워스, <꽃불전문가>의 모건, <모성의 본능>의 로라, <기계의 천재>의 바쿠가 아니라 바쿠부인, <경계심>의 볼로. 그 밖에도 수없이 매력적인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 미겔스트리트, 그곳은.

 

미겔 스트리트는 최하위층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1달러 2달러가 큰 돈인 곳이죠. 1959년에 발표되었으니 화폐가격이 떨어졌다고 치면, 지금의 20-30불 정도라고 생각해도 이해가 됩니다. 가장 가난한 거리에 살고 있는 이 사람들에게도 각자의 고민과 생존법과 이야기가 있습니다. 옴니버스식으로 이야기가 꾸려져 있기 때문에, 마치 현미경으로 한쪽면을 보다가 다시 다른 쪽 면을 주의깊게 관찰하는 것 처럼 독자는 미겔스트리트 곳곳과 인물 각각을 면면히 들여다 보게 되는 효과를 얻습니다. 하나의 이야기로도 전혀 손색이 없고, 그 이야기를 모두 모아 놓으면 전체 줄기 속에서 모두가 통일되는 독특한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 삶에 녹아든 희극성

 

이것이 인생이라고 말하는, 문장에 스며든 유머스러움. 그것은 이 어려운 환경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줄기 빛이 되기도 하고, 독자로하여금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게 하기도 합니다. 동시에 연민을 웃음으로 승화시켜내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힘인지도 느끼게 합니다.

 

<꽃불전문가>. 특히 그런 모순적인 상황이 잘 연출되었던 챕터입니다. 진지하게 꽃불을 만들다가 웃음거리가 된 인물입니다.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저 사람이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데도 언제나 우스꽝스러운 짓을 해보이려고 애를 쓰다니 참으로 꼴사납지 뭐야"-해트의 말) 사람들에게 바보짓이라고 손가락질 받는데도 모건은 진지하게 꽃불 실험을 계속합니다. 그의 진지함 (아이들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장면 역시.)은 사람들에게 우스움을 사지만, 그의 진지함은 그냥 웃음만 주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안타까운 눈으로 연민을 갖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모건의 집에 불이 납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멋지고 아름다웠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심지어 나는 그 밤 모건의 집에서 본 그 꽃불이 생애 최고의 꽃불이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 후 모건은 더이상 꽃불을 만들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고 있던 해트는 말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무엇을 갖고자 해서 그것을 진심으로 원하기만 하면 결국 얻을 수야 있지. 그러나 일단 그것을 얻게 되면 그걸 좋아하지 않게 되는 법이야'. 아. 가슴 시린 이야기. 누구에게는 웃음거리이고, 누구에게는 지나갈 이야기일 수 있지만, 꽃불 전문가 모건에게는 너무나 진지한 삶의 욕망과 꿈이 담긴 이야기.

 

또 하나 마음아픈 이야기. <모성의 본능>의 로라는 여덟명의 자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로라에게 웃음거리 같은 일로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웃음거리로 술안주 삼듯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맏딸 로나가 엄마에게 아이를 가졌다고 했을때, 로라는 엄청나게 울게 됩니다.

 

그 울음 소리를 듣고 나는 이 세상이야말로 바보스럽고 슬픈 곳이라고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도 그만 로라를 따라 울어버릴 뻔했다. 147.

로나가 아이를 데려왔을때 사람들은 이제 아무도 그 사실을 농담거리 삼지 않습니다. 진짜 바보에게는 바보라는 말을 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들은 이게 진짜 삶이라는 것을 알아버렸던 겁니다. 저도 울어버릴뻔 했습니다. 손에 잡힐듯한 슬픔을 감추고 사는 사람들. 그것이 미겔스트리트의 이야기를 진짜 사람들의 이야기로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늘 그렇게 죽었어. 자꾸만 해엄쳐 나가는 거야. 그러다 보면 결국은 지쳐서 더 헤엄칠 수가 없게돼. 149.

# 캐릭터가 이야기를 절로 만든다?

 

작품 '미겔 스트리트'에 나오는 인물들은 저마다 매우 개성있는 캐릭터를 갖고 있습니다. 그 캐릭터들 하나하나가 반짝반짝 거립니다. 마지막 에피소드를 가면 이들 모두가 어떤 식으로 저 문장을 입에서 뱉어냈을지 상상이 갈 정도입니다. 시트콤 한 시즌은 마련할 수 있을 정도 입니다. 캐릭터가 이야기를 절로 만드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이야기가 유영하도록 하는 인물들이 특히 굉장히 매력적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기계의 천재> 바쿠입니다.

 

기계에 엄청난 집착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기계든 해체시키고 다시 고쳐야 직성이 풀립니다. 멀쩡한 기계도 다시 풀어 조립했다가 고장나게 만듭니다. 이런 인물덕분에 이야기는 흘러가고 멀쩡한 기계가 인물을 통해 오히려 고장나는 것을 읽으며 오히려 머릿속이 뻥 뚫리는 쾌감!을 맛보기도 합니다.

 

(바쿠가 고장내놓은 기계를 고치러온 진짜) 기계공은 더럽고 성난 얼굴을 엔진으로부터 처들더니 말했다. "백인들이 그들 손으로 직접 만든 엔진인데 당신네들 같은 온갖 무식쟁이들이 이러쿵저러쿵한다면 그 결과야 뻔한 것 아니겠어요?"

바쿠는 내게 눈을 껌뻑해 보였다.

그는 말했다. "하지만 나는 카뷰레터(가 고장난거)라고 생각한단 말이야"

 한참 뒤에 기계공이 와서 바쿠에게 대고 말합니다.

 

제기랄. 사려거든 롤스로이스 차나 살 것이지. 그 회사에서는 엔진을 뜯어보지 못하게 봉한 채 자동차를 출하하니까.

아 정말 사랑스러운 인물이 아니겠어요. 권력과, 권력의 구조와, 식민지라는 사회적 환경 속에 처한 인물이라는 것을 모두 차치하고도, 저는 한참이나 이 인물이 사랑스러웠습니다. 옆에서 애가 터져 죽는 바쿠의 아내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온 연민을 다해 전하며.

 

 

# 역자에 대한 반항심

 

번역본은 매우 깔끔합니다. 그것을 이야기 하려고 저런 소주제를 쓴 것은 아닙니다. 책을 다 읽고 역자의 글을 펴들었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예속 생활을 해오는 동안 열등감을 느껴왔고 그에 따른 자기 멸시의 습성에 깊이 젖어버렸다'는 이야기에는 충분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일제의 다스림을 받은 한국인이 흔히 "우리 한국사람들은 이래서 못쓴단 말이야. 일본인들 같은면 이렇지 않을거야." 라는 말을 별 저항감없이 뇌까리는 것을 흔히 들을 수 있는데 이와 꼭 같은 사고 방식이 트리니다드 주민들에게는 더욱 깊이 심어져 있었다. 298

자기 자신에 대한 거의 본능적인 멸시, 그것이 이런 해학성을 낳게 했다는데에는 공감이 되었습니다. 미국문화나 일본문화에 '그대로' 젖어 정신적인 예속상태를 자초해버렸던 우리나라 사람들을 생각나게 하는 인물(미국에 대한 찬양으로 미국식 악센트로 말하고 미국인식 옷을 차려입은 해트의 동생 에드워드)을 보며 저도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두번째로 사람들의 권태와 도덕적 타락상태가 편집광적 증세를 보이는 인물이나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힌 인물을 형성했다는 것에도 깊이 공감했습니다. 정상인이 비정상인으로 보일정도로 미겔스트리트의 사람들은 어딘가 독특한 면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실제이든, 허구이든, 그건 우선 소설속으로 들어와 버린 이상 논할 가치를 잃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정상적인 면이 사회적 결정론에 의해, 그러니까 사회환경적인 요소에 의해 일어난 결과라고 하는 것에도 수긍을 했습니다. 식민지 사회의 타락적 환경에서 그들이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운명, 혹은 노출될 수 밖에 없는 환경이 그들로 하여금 실패, 좌절을 낳게 했다고 하겠습니다. 

 

반항을 하고 싶은 부분은 나이폴이 미겔스트리스에 갖고 있던 태도같은 것입니다. 역자는 역자의 말에, 마지막 에피소드가 감동적이라고 말하며, 결국 떠난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나의 에피소드를 이야기 하려고 열여섯편의 단편을 끌어왔다는 것이죠.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는 이웃들과의 클럽이 해체되고 나는 공부를 하러 영국으로 떠나죠. 물론 단편으로서 손색없는 각각의 글에 대해 긍정적이지만, 저는 이런 해석이 과연 완벽히 맞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이폴도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저는 나이폴이 이 곳에 애증을 한껏 심어놓은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애정이 없었다면 과연 그곳에 대해 이렇게 해학적으로 글을 쓸 수 있었을까요? 애정을 담아 인물들을 표현해 낼 수 있었을까요? 꽃불에 미쳐있든 기계에 미쳐있든 그들의 그런 광적인 행동마저 이토록 연민과 애정을 담아 쓸 수 있었을까요?

 

저는 아직도 나이폴이 미겔스트리트에 자신의 일부를 떼어놓고 왔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것은 마지막 문장을 읽은 오늘 아침에 더 깊이 각인 되었습니다.

 

해트가 감옥에 가던 날 나의 일부가 죽어버렸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야기가 된다고 일러준 나이폴. 그의 글에서 보이는 희극성과, 희극을 통해 보여주는 세상에 대한 통찰력이 탐났던 작품이었습니다.

 

-리뷰를 쓰면서 느끼는 언어적 한계:

저는 요즘 매우 복잡한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걸 어떻게 말로 표현을 못하겠고, 별로 하고 싶은 말도 없습니다. 이 리뷰를 쓰면서도, 나는 왜 이렇게밖에 표현을 못하는가 한참을 스스로에게 되물었습니다. 제가 느낀 것의 반도 이 글에 담지 못했습니다. 저는 죽어가고 있을까요, 살려고 발버둥치는 걸까요. 아마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실 것 같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첫 문장 못 쓰는 남자
베르나르 키리니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벨기에 작가 베르나르 키리니의 ‘첫문장 못쓰는 남자’는 모두 열여섯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입니다. 매우 짧은 분량이지만 단편 하나하나가 뛰어난 재치와 입담으로 쓰여진 글입니다. 재치와 입담이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리뷰에 쓰고 싶은 주제는 작가 나름의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재치’와 ‘위트’를 무기삼아 아주 재미있게 비춰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기억력이 나빠, 나중에 기억을 하려고 책을 좀 함부로 다룹니다. 마음에 드는 단편이 시작하는 장은 과감하게 책장을 접어두기도 하고, 무언가 표시를 해두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소설집을 읽고 나니, 제가 접어둔 책장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상상력을 사고의 영역으로 확장시킬 줄 아는 작가. 시대에 대한 냉소섞인 문장하나 쓰지 않고 상상력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만으로 충분히 세태를 꼬집는 작가. 반해버렸습니다.

 

‘첫문장 못쓰는 남자’와 ‘침입자’를 읽을때까지만 해도 저는 ‘음, 상상력이 매우 뛰어난 작가로군’하고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첫문장 못쓰는 남자의 피에르 굴드가 첫문장을 못쓰고 마지막 문장을 못 쓰는 이유. 이 두 가지만을 가지고 매우 재미있게 한편의 단편을 만들었구나.라고 말이죠. 출근길 버스에서 이 단편을 덮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한줌 재로 남는 인간이라. 이 짧은 생을 사는 인간을 표현하는데, 사실 (...) 이거하나면 모든 것을 말해준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첫문장을 지우면 두 번째 문장이 첫문장이 된다.’라니. 처음은 매우 중요한가요? 발을 딛는 시작점이라서요? 글쎄요. 첫경험이야! 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첫경험이 아닌 경우가 많지 않은가요? 그러니 ‘언제 처음 해봤어?’는 별로 중요한게 아닌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다’. 그 자체에 있으니까요. ‘처음’에서 ‘벗어나게’되는 상태가 바로 자유의 시작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쨌든 기발한 착상에서 시작된 이 작품은 놀라울 정도로 피에르 굴드라는 작가의 이야기를 소화해내고 있습니다. ‘침입자’도 마찬가지였죠. 누군가 내 정원에 매일같이 침입해서 내 잔디를 깎아준다. 기발하군, 이정도. ‘그가 지나칠 정도로 착하게 굴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의 보이지 않는 존재에 길들여졌을까?(31쪽)’를 보면서 다시 책을 덮고 사람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는 갖게 되었습니다. 지나치게 착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조금 가혹하지 않은가, 이 정도.

 

그런데 제 생각은 이 소설집의 중반을 향해 달리며 차츰 달라졌습니다. ‘거짓말 주식회사’, ‘박물관에서’, ‘블럭’, ‘높은곳’,‘내 집 담벼락속에’. 이 소설들도 역시 앞에서 느꼈던 것처럼 기발한 착상에서 시작은 하고 있습니다만, 그 여운은 말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생각이 깊은 사상가들, 지식인들이 공중부양을 한다는 (역시나) 희귀한 설정을 가진 ‘높은 곳’을 읽는데 이 문장:

 

 

진정한 천재로 인정받아온 몇몇 사상가들은 아무리 위로 치솟고 싶어도 지면이 발이 들러붙어 옴짝달싹 못하는 반면, 이름도 생소한 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하늘 높이 떠오르곤 했다. 96.

 

 

이 문장을 읽는데 저절로 입에서 감탄이 나왔습니다. 이 말을 하고 싶었던거로구나!

인간의 이성에 대해 비웃는 듯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떠올랐습니다. 동굴 속에 있는 (고만고만한) 인간들은 그 안에서 그림자를 보며 살고 있을 뿐이로군. 그걸 비웃고 있는거야. 라는. 그러고나자 ‘사회적인 명망이 있고 더 깊은 사고를 갖고 있는 사상가가 더 높은 곳으로 공중부양 하더라는 사람들의 맹목적인 믿음, 그 믿음에 부응하고자 인기를 얻기 위해 더 높이 올라갔다고 사람들이 믿게 하고 싶어하는 지식인들’을 거기에 왜 집어넣었는지가 뚜렷해졌습니다. 대중에게 알려져 있다고 해서 그것이 그 사람 사고의 깊이까지 알려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당연한 것이지만 사람들은 망각하니까요. 마치 잘 포장된 사람들에게 질투와 경외를 느끼는 대중은 얼마나 무지한가. 작가는 이 이야기를, 이렇게 특이한 설정을 통해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 놀라운 설정은 이 단편소설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박물관에서’에서는 우는 조각상들을 설정해놓고 이들이 우는 이유를 스스로 이야기하게 만들더니, ‘사람들이 봐주지 않아 소외받았기 때문’ 이라고 이야기 하는 여자 조각상들을 통해 소통이 불가능한 자기 상에 갇힌 사람들을 교묘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내 집 담벼락 속에’에서는 스스로 벽안에 들어가 나이를 먹지 않은 남자를 설정해 ‘사생활이 소멸위기에 처해있는’ 이 시대를 고발합니다. 스스로 담벼락속에 들어간 남자는 파리 5구,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팡테옹 광장의 담벼락속에 다시 들어가 버립니다. ‘은밀함’이 사라졌다고 하면서 말이죠. sns와 인터넷이 엄청나게 발달한 현대시대, 사실 개인의 사생활은 스스로에 의해서건 타인에 의해서건 우연이건 필연이건 심심치 않게 노출됩니다. 개인의 은밀함을 지키고 싶었던 20세기에서 온 남자가 벽속으로 다시 들어가 버리는 설정을 통해 작가는 사생활이 없어져가는 21세기, 복잡하고 시끄럽고 온갖 네트워크가 범람한 세상을 통쾌하게 보여줍니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는 더 이상 숨길게 없는 세상에서는 편안한 느낌을 가질 수가 없고, 따라서 이제 벽으로 드나드는 것에 아무런 흥미도 느낄 수 없다. 145

‘크누센주의, 그것은 사기 협잡’에서는 여론이 어떻게 한 사람의 명예를 급속히 실추시킬 수 있는 것인지 보여줍니다. 인터넷을 할 수 없어서 크누센주의를 찾아볼 수는 없는데 (리뷰를 올릴때 크누센주의를 찾아보았더라도 이대로 올릴 겁니다) 심지어 크누센주의에 대한 연구 결과들이 소설 뒤에 사실인 듯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게 사실이 아니면 억울할 정도입니다. 무지의 상태인 독자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라고 말입니다. 크누센을 제외하고도, 이렇게 오해로 인해 대중의 매도를 받은 숨어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니 무지한 대중의 하나로 창피함을 느낍니다.

 

 

예컨대 이 작가는 기발한 상상력에 기인한 착상들을 본격문학을 통해 구상화시킴으로서 인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블록이나 담벼락은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공간이지만 상상력 이상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모든 상상력은 인간의 면면에 대한 반성과 인간에 대한 애착으로 끝을 맺습니다.

 

-

피에르 굴드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네요. 대부분의 소설에 피에르 굴드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는 학예연구원이기도 하고, 거짓말 주식회사의 뛰어난 직원이기도 하고, 굴렁쇠 출판사의 직원이기도 하며, 제대로된 작품 하나를 쓰고 죽기를 갈망하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굴드가 다시 등장하면 독자는 이제 반갑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굴드는 곧 베르나르 키리니의 분신이라는 것이 작품을 읽을 수록 확연히 드러납니다. 굴드를 통해 작가는 늘 작품 속에서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