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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 Travel Notes, 개정판
이병률 지음 / 달 / 2010년 7월
평점 :
음유시인 이병률의 새 책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도 몰랐던 나에게,
가을빛이 선홍색이던 어느 날 그가 말했다.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은' 책이라고.
나의 '가슴을 터져버리게 만들고 있는' 그가 경험 했다는,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은' 느낌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그길로 아담하고 깨끗한 이병률의 책을 골라 쥐었다.
추천의 글에 버젓이 고개를 내민 소설가 신경숙을 발견했다.
소설집에서 이병률을 여행작가로 소개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모르는 여인들'의 단편 '화분이 있는 마당'. 그 속에 등장하던 여행하는 사진작가, K가 이병률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쿵.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 길로 나의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네가 좋아한다는 '이병률'이 내가 좋아하는 '신경숙'과 아주 친한 사이인것 같다고.
사실 내 마음 속에는 '너'와 '내'가 이어진 끈이 이렇게나 많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니 우리, 조금 더 친해지자고.
이런 불안하고, 안타깝고, 새롭고, 신비하고, 막 무언가 시작할 것 같은 느낌으로, 한장 한장을, 아껴 읽었다.
스냅사진 하나하나 꼼꼼하고 섬세한 눈길이 느껴지는 이병률의 촬영 솜씨는, 이제 막 카메라 앵글로 우리도 함께 여행을 하는 여행자의 기분이 되도록 만든다. 시인 이병률은 글을 쓰고, 사진가 이병률은 사진을 찍는다. 그 둘이서, 우리를 '끌리게 한다'.
* 청춘, 너는 봄이다:
청춘, 무엇이 불안한지도 모르면서 불안해하는 청춘에게 그 설렘을 마음껏 받아들이라던 작가. 나의 청춘에게도 무한한 응원을 돋게 해주었다. 문 앞에 서서 무엇이 있을지만 고민하면서 시간을 쓰지 말고, 그저 설렘의 기운으로 그 문을 힘껏 열어버리라는 글. 그것이 바로, 불안하기 짝이 없지만 찬란하게 빛나는 청춘이라는 것을. 작가는 에둘러 말하지 않았다.
작가가 말한 청춘의 정의를 핸드폰 카메라에 담았다. 이 사진은 나의 '그'에게 보내졌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이 설레는 글귀다' 라는 말과 함께.
그는 함께, 기뻐해주었다.
사실은, 말하고 싶었다.
나의 청춘이 너와 봄을 함께 담고 싶다고 말하노라고.
틀에 박힌 일상에서 나와서, 나와 함께 그 문을 활짝 열어 젖히면 안되겠냐고.
* 사랑하다, 사랑을 하고 싶다:
돌덩이 같은 것이 마음 속에서 서서히 붉은 빛을 내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점점 빠른 속도로 마음을 차고 올랐다.
나는 그 앞에 힘없이 무릎을 꿇고 말았다.
사랑을 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어떤 것보다 의미 있는 일이라는 걸. 모르는게 아니었는데.
잊고 있었다.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재고, 따지느라, 내가 그를 그저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책의 마지막을 덮던 그 때, 나는 예술의 전당 뒷 마당이 보이는 카페 모차르트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한번 더 펼친 글은. 나와, 나의 '그'와, 지금의 우리를 꼭 닮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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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 얘기해줄까요?
우선 흰 도화지의 한가운데를 눈대중으로 나눈 다음
맨 위에서부터 아래 끝까지 줄을 내려 그어요
이선은 뭘 의미하냐 하면 왼쪽 벽과 오른쪽 벽을 나누는건데
우선 지금 당장은 평면처럼 보이지만
이 두 벽은 정확한 90도를 유지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왼쪽 골목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가려면
90도 몸을 회전해야 되는 기역자 벽인거죠
일단 왼쪽 벽에다가는 한 남자를 그려요
벽 쪽에 몸을 바싹 붙이고 오른쪽 벽을 향해 몸을 돌리고는
살금살금 숨바꼭질하듯 눈치를 보고 있는 옆 모습의 한 남자를요
오른쪽 벽 역시 마찬가지로 한 여자를 그려요
여자 역시 벽쪽에 붙어서 조심스레 누군가를 훔쳐보기라도 하듯
잔뜩 긴장을 하고 있는 옆 모습 여자를요
그림은 그림이 때문에 그렇게 정지해 있지만 1초후
만약 그 두사람이 앞으로 조금만 움직인다면
코를 부딪히게 될지도 몰라요
그리고 다시 1초후 두사람 모두 화들짝 놀란 나머지
몸을 정반대로 되돌려 멀리 멀리 뛰어가버릴지도 몰라요
사랑의 시작은 그래요
어떤 이상적인 호감의 대상이 한번 내 눈을 망쳐놓은 이후로
자꾸 내 눈은 그 사람을 찾기 위해 그 사람 주변을 맴돌아요
한 번 본 게 다인데 내 눈은 몹쓸 것으로 중독된 무엇처럼
그 한 사람으로 내 눈을 축축하게 만들지 않으면
눈이 바싹 말라비틀어질 것 같은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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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여름 같은 구름이 하늘 끝까지 펼쳐진 채로 붉은 해를 가득 머금었다.
저 멀리 예술의 전당 앞에 놓인 사거리 횡단보도의 빨간 신호등이 빠르게 깜빡거리는 것이 보였다.
깜빡이는 불빛이 초록색으로 변하기 전에, 어서 그길을 건너 그를 만나고 싶었다.
추신: 그렇지만 나의 '그'. 혹시 이글을 발견하게 되었더라도, 티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