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 시인선 346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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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 없는 길

이 길은 어제도 지나갔던 길이다
이 길 위에서 사람들은
오직 한 사람과만 마주칠 수 있다
수치심 때문에
그는 양쪽 귀를 잡아당겨 얼굴을 덮어놓는다
그러나 이 길 위에서
말해질 수 없는 일이란 없다
그는 하루 종일 엎드려 있다
수치심을 지우기 위해
손바닥과 얼굴을 바꿔놓는다
그러나 왜 말해질 수 없는 일은
말해야 하는 일과 무관한가, 왜
규칙은 사건화되지 않는가
이 길은 쉽게 기억된다
가로수들은 단 한 번 만에
나뭇잎을 떨구는 데 성공한다
수치심을 잊기 위해
그는 가끔 노래도 하고
박수도 친다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아무도 그에게 인사를 건넬 수 없다-26쪽

그때, 그날, 산책

(중략)
그날 큰 눈이 그치고
쌓인 눈은 조금씩 얼음의 두께를 더했네
다음 번 내릴 눈에 대해
호수는 걱정을 덜었으나
그때 우리의 심약한 마음은
미래를 자주 떠올리며 쩡쩡 금이 갔네
그때 참 짦은 연애였는네
우리는 너무 많은 산책을 했네
그날 큰 눈이 내리다 그쳤네
그날 큰 개를 따라 집으로 돌아왔네
우리의 마지막 산책이었네
그때는 알지 못했네-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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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 2009-07-09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받은 책. 리뷰 올려야 한다는 걸 잊고 있던 게 아닙니다.^^; 다만,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고민을 했습니다. 그럴싸한 말로 포장할 재주도 없고 시는 읽는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에 드는 부분만 발췌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