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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 재판 - 사람이 아닌 자의 이야기 다카기 아키미쓰 걸작선 2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선영 옮김 / 검은숲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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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때는 2010년 2월 20일 토요일이었다. <무한도전>을 시청했고 나는 그 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물론 27일의 충격도 있다.) 그것은 피고 측 변호사에서 나온 말이었는데, 이것이야말로 법정에서 벌어지는 드라마란 이런 것이라고 생각했더랬다. 그 외의 요소는 모두 필요 없다. 오로지 법정에서 벌어지는 날카로운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오줌싸개의 오명을 벗길 듯 말 듯 한다. 그 와중에 나타났던 결정적인 그 한 마디. '오줌싸개 이미지는 누가 만든 것입니까?'


  재판에서는 원고와 피고가 존재하고, 둘 사이에 존재하는 사실 관계만을 바탕으로 판결을 내린다.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저울을 한쪽으로 기울게 하기 위해 원고와 피고 측 변호사 (혹은 검사와 피고 측 변호사)는 극적인 효과를 위한 필사적인 계산과 전략을 짜낸다. 사실 관계가 어떻게 봐도 말이 될 것 같다면, 더더욱 그 싸움은 치열해질 것이다. 사건 당사자는 피가 마르고, 그 밖의 방청객의 입장에서는 흥미진진한 드라마가 펼쳐질 테지.




  이번에 읽은 다카기 아키미쓰의 <파계 재판>도 상당히 드라마틱한 하나의 재판에 대한 이야기다. 화자는 '재판은 종종 연극에 비유될 때가 있다(p.11)'고 이야기를 시작해 훗날 '파계 재판'이라 이름붙여진 유명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피고 무라타 가즈히코, 그의 죄목은 두 번의 살인과 두 번의 사체유기다.


  검사는 네 건의 악질적인 혐의에 덧붙여 높은 구형을 위해 평소 피고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자료를 마련해 두었다. 그는 극단에 있던 시절 공금을 횡령하여 극단에서 쫓겨났다. 친구에게는 사기를 쳤으며, 전쟁 시절 세 번 영창을 다녀와 이등병 신분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연녀의 남편을 죽이고 이어 내연녀까지 살해한 것이다. 뭔가 전적에서 찜찜함이 느껴지는 인물의 범죄라니, 그의 유죄는 확고해 보인다.


  그러나 피고 측 변호인 햐쿠타니는 검사의 피고인 검증을 위한 과거 자료에 요목조목 대응하며 꼭 피고인은 악인만은 아님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수도 있음을 판사에게 인지시킨다. 그는 누구도 피고의 유죄를 의심하지 않고 범죄의 잔인성에 경악하고 있을 때, 그의 무죄를 믿고 있는 단 한 사람인 것이다. 과연 그는 피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어떤 전략을 짜고 있는 것일까? 나는 '오줌싸개 이미지는 누가 만든 것입니까?'라는, 한 마디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로지 법정 안에서 검사와 변호사의 모두진술, 그리고 증인에 대한 신문이 이어지는 정적인 장면만으로 이루어져있음에도 <파계 재판>은 상당히 긴박감이 넘치는 법정 묘사가 이어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밝혀지는 '파계 재판'의 의미와 숨겨져 있던 진실.


  작가 다카기 아키미쓰는 법학을 공부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쓰기 위해 법학 공부를 기초부터 다져나갔다고 한다. 오로지 법정 안에서만 벌어지는 일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다른 장면에서 이어지는 법정 장면을 묘사할 때보다 훨씬 더 치밀하고 사실적이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법정에서 '가능한' 극적인 장면까지 치밀하게 계산해냈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환희…….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작품을 위한 작가의 계산도, 드라마틱한 구성도 아닌 작가의 시선에 녹아있는 휴머니즘이다.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에서 유래가 된 무라타 가즈히코의 '파계 재판'은, 그야말로 '사람이 아닌 자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아닌 자'의 심정을 파고들어 그로부터 주변 인물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그 휴머니즘이야말로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에서 느껴지는 카타르시스의 원천이 아닐까. 그리고 그 휴머니즘을 온전히 품고 있었던 햐쿠타니의 짧은 이야기 「유언서」가 함께 실려 있으니 '아가씨'의 활약을 하나 더 지켜보는 것도 좋겠다. 그리고 그의 '페리(péri)'도.




_20150124~2015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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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로직 인간의 매직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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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담한 가설은 굉장히 신선하고 또 흥미로울 수 있다. 하지만 대담한 만큼 극단적이고, 비판의 여지를 많이 가지고 있기도 할 테지.

  '과유불급'이란 그런 것이다. 지나치면, 안하느니만 못하게 된다. 결국 오랜 시간을 견디고 정설로 자리잡아가는 가설이란, 둥글게 둥글게 많은 현상을 포용하는 누군가의 생각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다 좋다니 이거 뭐 어쩌라는 거야, 싶을 수도 있지만. 큭큭.)


  그런데 그 대담성이 어떤 상황에 한정지어 발휘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일 수 있다. 짧은 시간에 관중을 웃겨야 하는 개그 프로그램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지나치게 똑똑하거나 지나치게 어리석다. 그 중간에 있는 어떤 평범함은 눈에 띄지도 못하고 오히려 '극단'을 빛내줄 뿐이다.

  대담한 설정을 소설에 적용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소설 속 세계에서만 적용되는 세계관을 작가와 독자가 합의한 다음 그 안에서 논리성을 구축할 수도 있고, 작가는 합의되지 않은 속임수를 독자에게 슬쩍 던져둔 다음 숨어있던 트릭을 발견하게 만들어 의외성을 만나게 할 수도 있다. 혹은, 독자와 합의하지도 않고 또 속이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꺼내어 든 '조커'는 순간 독자를 움찔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니시자와 야스히코는 일상 미스터리 속에 대학생들의 '명정'추리의 맛을 한껏 느끼게 하는 '닷쿠 & 다카치' 시리즈도 물론 있지만, SF적인 설정 본격 미스터리에 도입하는 '변칙 본격 미스터리'로서 꽤나 알려져 있는 듯하다. 가장 먼저 국내에 출간된 작품이 <일곱 번 죽은 남자>인 것을 봐도 '일곱 번 죽는' 독특한 설정을 엿볼 수 있듯이 말이다. 이번에 읽은 <신의 로직 인간의 매직>은 그에 비하면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 좀처럼 짐작하기 어려우면서도, '신의 로직'이라는 용어에서 인간의 논리를 초월하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리고 그 초월성에 대항하는 '인간의 매직'은 무엇일까? 어떤 매직 같은 걸 끼얹나?




  그래도 역시 변칙 '본격' 미스터리의 귀재답게, 상황 설정은 본격을 떠올리게 하는 맛이 있다.

  여섯 명의 학생과 세 명의 직원이 Y자 모양의 교사(校舍)에서 생활하는 상황. 학교는 육지 속의 외딴 섬처럼 일직선으로 길게 뻗어 있는 길을 따라서만 벗어날 수 있고, 교사의 뒤편에는 악어들이 들끓는 늪이 있다. 클로즈드 서클이다.

  철저히 직원들에게 통제받으며 생활하는 여섯 명의 학생 중 이 소설의 화자는 '마모루'라는 일본인 학생이다. 그는 학교에 있는 다른 학생들에게 나름대로 별명을 붙이며 그들의 특성을 파악하고 있다. 그들은 오전에는 기본 소양 교육을 받고, 오후에는 조를 이루어 어떤 상황에 대한 답을 추리해가는데, 이 때 학생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닷쿠 & 다카치 시리즈'에서의 패턴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라, 본격은 본격인데 이 상황에서 사건이 좀처럼 벌어지지 않잖아! 라는 것은, 클로즈드 서클에서 '누가, 어떻게'가 아닌 '왜'를 찾아가야 할 시점임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당연하게도, 독자들은 이런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도대체 이 학교는 어떻게 생겨먹은거야?' 마모루의 입을 통해 알게 되는 학교 사정 역시 미심쩍은 부분이 하나 둘 드러나게 되고, '추리 게임'을 통해 늘 다양한 상황이 '왜' 이루어졌는지 추측하는 훈련을 하는 학생들 역시 나름대로의 답을 찾아가고 있는 듯하다. (나름대로 열심히 추리하고 있었는데, 내 추리가 일찌감치 드러나 틀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큽..ㅠㅠ) 그러던 중 '신입생'이 새로 입학하게 되면서 학교의 공기가 미묘하게 바뀌기 시작한다. 그리고 벌어지는 살인.



  이 학교는 도대체 왜 만들어진걸까? 이 학교의 학생들은 무엇을 위해 이런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인가? 각자의 논리로부터 추리한 학교의 정체는, '매직'. 마술사의 재빠른 손놀림이 불러일으킨 속임수일지, 마법사의 어떤 주문일지, '매직'의 정체는 직접 확인하시길 바란다.





그래. 억지지. 하지만 마모루, 우리 인간은 자신이 믿는 것만 사실로 인정해. 설령 그것이 거짓이더라도 말이야. 아니,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거짓이야. 거짓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전부 환상이라고 바꿔 말해도 돼._p.74



스텔라, 네 이름은 스텔라 나미코 델로즈야. 지금 열한 살이고 부모님과 함께 개선문이 보이는 파리의 아파트에 살아._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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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톨른 차일드
키스 도나휴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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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에리'들은 불행한 유년을 보내고 있는 소년을 찾아내어 면밀히 관찰한다. 소년에 대해 웬만한 건 다 알고 있다고 판단되었을 때 그 무리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아이는 숲에서 나와 소년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렇다면 '바꿔친 아이(스톨른 차일드)'는? '파에리'에게 끌려가 숲 속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만 한다.



  그렇게 '헨리 데이'가 된 파에리가 있고 '헨리 데이'에서 이름을 점차 잊고 '애니데이'가 된 소년이 있다. 새로운 '헨리 데이'는 백여 년 만에 얻게 된 인간의 삶을 마음껏 누리기로 하고, '애니데이'는 점차 자신의 이름도, 부모님도, 쌍둥이 여동생도 잊고 '애니데이'가 되어간다.



  바꿔치기라는 소재는 다양한 문화권에서 전승되어온다. 이 <스톨른 차일드>에서 차용된 것은 서구권의 설화 '체인즐링'일 것이고(실제로 예이츠의 시 [스톨른 차일드]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하필 '아이'가 바꿔치기 당한다는 것은 '파에리'들이 갓난아기는 갓난아기인 채 너무 돌보기가 힘들고 조금 더 자란 아이는 자신의 정체성이 더 확고해지기에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대신하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라고. 숲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존재라거나 요정이라거나, 이러한 이유 등등이 꽤나 낯설게 느껴지지만 않는 것은 역시 세부적인 설정만이 다를 뿐 우리 역시 '바꿔치기'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일테다. [옹고집전]의 옹고집이라거나, 밤에는 손발톱을 깎지 않는 이유라거나…….



  어느샌가 '애니데이'가 익숙해진, 소년에 머물로 있는 소년과 스톨른 차일드의 자리를 대신해 들어가 '시간의 흐름에 맞게 성장하는 모습으로 몸을 변화시켜야 하는' 파에리 헨리 데이의 시점이 교차되어 진행되는 이야기는 도중도중 큰 사건을 하나씩 맞이해나가며 성장하는 이야기가 담담하게 흘러가고 있다.




  '가장 먼저 잃어버린 것은 자신의 이름'인 애니데이. '의식'을 거친 후 애니데이는 숲 속의 파에리들 중 가장 낮은 서열로서 집단의 일원이 된다. 무언가를 잊은 것 같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애니데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 속 파편을 무의식 속에 담아두고 있다. (그리고 아마 숲 속의 모든 파에리들이 그랬을 것이다.) 송두리째 자신의 인생을 도둑맞았다는 기억조차 희미해짐에도 불구하고 애니데이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또 빈 종이에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나가는 것에 큰 기쁨을 느끼고 있다.


  한편 헨리 데이의 인생을 훔쳐와 그의 삶을 살게 된 '헨리 데이'는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기 시작한다. 음악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자신의 감성이 즐거움에서 점차 낯선 무언가로 변해가고, '헨리 데이'의 인생을 훔치기 전 '스톨른 차일드'가 되었던 자신의 진짜 유년 시절에 대한 향수 혹은 궁금증이 자신의 정체성을 지탱해 줄 뿌리가 되어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음악에 대한 재능이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금발의 소년의 모습을 찾아내고, 또 '진짜' 헨리 데이와 마주친다. 자신의 인생의 진짜 주인을.




  애니데이는 나이가 든 헨리 데이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인생을 훔쳐간 이에 대한 분노? 자신의 인생을 대신 살면서도 그것이 행복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배신감?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동안 둘 사이의 의사를 주고받을 수 있는 매개체는 없었고, 아마 그게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헨리 데이는 음악을 통해 애니데이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속 치히로가 건너간 낯선 세계에서 가장 소중히 지켜야 하는 것은 바로 '치히로'라는 이름이다. 유바바는 치히로의 이름을 빼앗고 '센'이라는 이름을 남겨뒀고, '하쿠' 역시 고귀한 강의 이름을 빼앗고 남겨둔 이름이다. 잃어버린 이름에 얽매여 원래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하는 하쿠, 그리고 인생을 도둑맞아 자신의 이름부터 서서히 잃어버리는 '헨리 데이' 아니 '애니데이'를 구원해준 것은 치히로 그리고 '예술'이다.


  서 자신을 쉴새없이 표현했던 애니데이와 그럼에도 이해하지 못해 '음악'이라는 매개를 통해 화해를 하고자 했던 헨리 데이를 지탱해 준 것이다. '기억이 잃어버리는 것은 상상력이 다시 만들어(p.414)'낸다. '이미 모든 게 완성됐고, 모든 대답이 알려져 있는데(p.354)'도 불구하고, 예술가는 새로운 것을 세상에 내놓는다. 애니데이가, 헨리 데이가, 미야자키 하야오가, 키스 도나휴가,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이야기꾼들이.




그들은 사악한 존재일 수도 있었다. 모든 아이의 빛나는 눈 뒤에는 감추어진 우주가 있으니까._p.349



책을 쓰는 사람은 반드시 읽을 사람을 염두에 둔다고 알고 있어. 자기 혼자 보려고 시간과 노력을 쏟는 사람은 없다고. 일기를 쓸 때도 누군가 펼쳐보리란 걸 알잖아._p.354



가끔 예술가가 왜 새로운 것을 세상에 내놓는지 궁금해. 이미 모든 게 완성됐고, 모든 대답이 알려져 있는데 말이지._p.354



기억이 잃어버리는 것은 상상력이 다시 만들어내지._p.414




_20150109~2015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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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속의 소녀들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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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일드 44>로부터 5년, 톰 롭 스미스의 신작 <얼음 속의 소녀들>이 나왔다. 오랜 침묵을 깬 것이냐 하면 그것은 아니지만, <차일드 44>에서 시작된 전직 KGB 요원이었던 레오의 이야기에서 벗어난 첫 소설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의의가 깊다고 할 수 있겠다.



  <얼음 속의 소녀들(The Farm)>이라는 제목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에 대한 생각을 해 보기도 전에, 상당히 충격적인 도입부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날이었(p.7)'지만, 그 아버지의 전화는 가족들 간에 쌓여 있던 신뢰를 뒤집고 애써 숨겨뒀던 거짓말을 꺼내게 만드는 방아쇠가 되었다. '엄마가 망상에 빠졌다. 그것도 아주 끔찍한 망상에.(p.8)'


  어머니가 망상에 빠졌다니? 부모님은 스웨덴으로 건너가 농장에서 아주 잘 적응하고 계실 거라 생각했던 다니엘은, 어머니의 메일이 차츰 뜸해지는 것이 긍정적인 신호라 믿어 의심치 않았더랬다. 그러나 다시 어머니의 메일을 열어보았을때, 다니엘은 어머니의 절규를 발견한다. 도대체 왜 어머니는, '다니엘!'이라는 한 단어만을 보냈을까.


  다니엘은 자신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돕기 위해 스웨덴으로 향하기로 한다. 그러나 히드로 공항에서 다니엘은 불안에 떨고 있는 어머니와 마주친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그들'과 한패라 나를 망상에 빠진 환자로 몰아가고 있다며, 그 곳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에 아버지가 연루되어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버지가 범죄자라 주장하는 어머니와, 어머니가 미쳤다는 아버지. 다니엘은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까? 이것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양자택일의 질문보다 더 가혹하기 그지없다.



  다니엘은 일단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한다. 최대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태도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과연 자신이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있는지 혼란스러운 와중에, 어머니는 그 농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리고 다니엘은 어머니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진실을 두 눈으로 확인하기로 한다.




  어머니가 스웨덴으로 건너가 겪었던 일,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선택권은 아들 다니엘에게 그리고 동시에 독자에게 부여된다. 독자는 이 이야기의 진실성의 여부를 두고 혼란스러운 와중에, 스웨덴의 시골 마을, 끈끈한 연대감이 있는 동시에 농장과 농장 사이의 거리감을 적절히 유지하고 있는 어떤 공동체를 감싸고 있는 관계도에서 영국에서 불쑥 건너온 중년 부부의 위치를 함께 찾아 헤맨다. 이방인으로서의 고립감과 미친 (혹은 미치지 않은) 인물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자아내는 서스펜스를 따라가 보자.


  어머니 틸데는 이방인에 대한 주민들의 꺼림칙한 태도에 맞서고 마을에 숨어 있는, 모두가 모른 체 하는 비밀을 찾아 숲 속을 거닌다. 그 불안감을 안고 마주하는 농장의 숲 속은 서늘한 비밀을 숨겨두고 있는 듯하다. 그 안에서 틸데는 실마리를 찾아내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대로 퍼즐 조각을 맞춰나간다. 그리고 맞춰지고 있는 퍼즐의 그림을 보며 판단을 내리는 것 역시 다니엘 그리고 나의 주관적인 판단에 근거할 수밖에! 그리고 마주하게 된 '진실' 역시 그 동안의 압박감과 서늘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차일드 44>의 레오가 체제의 무게에 짓눌려 진실을 찾아가는 고단한 여정에서 발견하는 것은 체제만큼이나 무거운 '가족'이라는 이름이었다. <얼음 속의 소녀들>의 다니엘 역시 체제만큼이나 무거운 어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진실의 파편을 찾아가는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여정을 거친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더욱 무거운 것은 '가족'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연대감' 그리고 그 틈을 살짝 파고드는 의심이라는 날카로운 송곳이 있기 때문이고, 그 틈을 파헤쳤을 때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가족'이라는 껍데기 속의 알맹이였기 때문이다. 그 알맹이의 모양새가 어떠했을까? 그 무게를 받치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품어야 했던 그 알맹이는.



  <차일드 44>와 <얼음 속의 소녀들>은 다른 모양새로 같은 이야기를 전해준다. 진실을 마주하기란 이토록이나 어렵다.


  부디, 압도적으로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스웨덴의 숲 속을 거닐며 미치광이(혹은 멀쩡한)가 선사하는 서스펜스를 즐겨보시길.

 




_20150104~20150106





* 이미지 출처 : 알라딘

 

그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날이었다._p.7

마지막으로 지난 몇 달간 일어난 사건들이 내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거라면 정말이지 난 뭐든 다 할 거라는 말을 꼭 해둬야겠다. 아, 현실이 그렇다면 내 삶이 얼마나 편해질까. 무서운 정신병원에 가서 미치광이로 낙인찍히는 굴욕을 당한다 해도 내가 이제부터 이야기하려는 범죄들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건 정말 사소한 대가일 테니 말이다._p.46

하지만, 사람들로 붐비는 기차에서 스치고 지나간 사람을 단순히 그 이유로 친구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그들이 한 이야기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의 단편적인 진실이 섞여 있다고 해서 그걸 진실이라고 주장할 순 없습니다._p.144

나는 익숙함을 통찰로 오해했고, 같이 보낸 시간을 서로에 대한 이해의 척도와 동일시했다. 그보다 더 나빴던 건, 아무 의문도 품지 않은 채 안락한 생활을 받아들이고, 부모님이 자신의 가정환경과는 아주 다른 환경을 만들고자 했던 바람 이면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었는지 한 번도 알아보려 하지 않은 채 만족해버렸다는 점이다._p.158

난 엄마의 손을 놨다.

"엄마, 날 믿어요?"

"난 널 아주 많이 사랑한다."

"하지만 절 믿어요?"

엄마는 잠시 내가 한 질문을 생각해보더니 생긋 미소를 지었다._p.328

나는 오래전에 이 이야기들을 직접 읽어보고 내가 이 이야기를 읽어주길 엄마가 원한 건 아닌지 궁금해했어야 했다. 엄마는 아주 쉽게 이 책을 버릴 수도 있었지만 가까이 두고, 되풀이해서 읽으면서, 이유는 밝히길 거부한 채 이 이야기들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나에게 전했다. 나는 그렇게 하면 그 순간이 더 밝고 길게 타오를 거라 믿으며 엄마와 행복을 나누었던 걸 떠올렸다. 한편으로 슬픔 역시 나눌 수 있는 것이며, 슬픔을 나누면 그 순간은 훨씬 더 짧고 덜 선명하게 타오를 것이다. 그렇다면, 마침내 나는 엄마에게 슬픔을 나누자고 할 수 있게 되었다._p.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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