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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카오루 습유집
모리 카오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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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이라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정말 어쩔 수 없어요. 취향이 없다는 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니, 절대적인 것은 없으니 개인적으로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로 수정하겠습니다. 다만 취향을 뭐라 딱 집어 말하기 어려울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어느 정도 지켜보고 있노라면 뭐라 두루뭉술하게나마 느낌이 옵니다. 아, 난 이런 취향이구나, 하고요.

취향이라는 건 정말 세상 사람만큼이나 다양할 거라 생각합니다. 가끔은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취향도 있고, 나 이런 취향도 있어요! 하고 누군가가 알아주길 바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맹렬해집니다.

좀 귀찮을 수도 있고, 고된 작업일 수도 있지만 '취향이니까' 저돌적으로 행동에 옮기게 되는 겁니다. 주구장창 음악을 들으며 퍼질러있는 건 쉽다고 말해도, 니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있는데 뭐 어때, 라고 말해도, 사실 용기가 필요합니다. 마냥 그 일만 하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에 저는 해야 할 일을 외면하는 그 찝찝함을 견뎌내야만 합니다.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시험기간에는 불안해하면서 노는 거. 뭐 그런 정도의 용기는 어쨌든 필요합니다. ㅋㅋㅋ

모리 카오루도 상당히 저돌적으로 취향을 드러냅니다. 그 저돌적임은 아무리 좋아도 이렇게까지! 라고 생각할 정도로 무시무시합니다. 물론 저는 그림을 잘 그릴 줄 모르는 사람이기에 더더욱 대단할지도 모르겠군요. 잠깐, 이 사람이 도대체 뭘 그리길래? 라고 생각하셨나요?

<신부 이야기>는 19세기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사랑 이야기였던 <엠마>로 데뷔한 모리 카오루지만 역시 <신부 이야기>로 상당히 인지도를 높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책 표지만 봐도 저 섬세한 옷감의 무늬를 어떻게 그릴까! 싶지만 만화책을 펼쳐 내부를 들여다보면 더 굉장합니다.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무늬의 카펫이라거나, 섬세한 무늬를 하나하나 파낸 나무 기둥이라거나, 아무튼 그런 걸 다 작가가 직접 그립니다. 복사 붙여넣기 같은 건 없는겁니다. 작업시간이 어마어마하게 오래 걸린다고 해요. 그래서 <신부 이야기>는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옷감도, 카펫무늬도, 전부 그들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다른 데로 새려고 하는데 암튼 그렇다는 겁니다.

그녀의 데뷔작인 <엠마>라거나 그 이전에 그렸던 작품 <셜리>는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만화입니다. 주인공은 메이드입니다. 메이드의 일상을 혹은 사랑을 그려냅니다. 메이드가 입고 있는 옷이라거나, 메이드가 입고 있는 옷이라거나, 귀족 아가씨가 입는 어깨 뽕이 한껏 들어간데다 어마어마하게 섬세한 드레스라거나, 메이드가 입고 있는 옷이라거나, 도대체 속옷에까지 저렇게 섬세한 레이스를 붙여야하나 싶을 정도로 화려한 코르셋을 입혀주는 메이드라거나, 뭐 그렇습니다. 게다가 인도 왕자의 화려한 방이라거나, 인도 왕자를 호위하는 무희라거나, 그렇습니다. 아무튼 <엠마>도 이야기뿐만 아니라 볼거리가 아주 풍성합니다. 요컨대, 그게 바로 모리 카오루의 취향이라는 겁니다.

모리 카오루는 각 연재 작품의 단행본 후기마다 자신의 취향을 마음껏 드러냅니다. 이번에는 이런 의상을 그려서 즐거웠어요, 이런 의상도 예쁘네요, 이런 의상 정말 좋아요! 라는 식으로요.

모리 카오루는 의상도 의상이지만, 그 시대의 배경을 그려내는 것도 꽤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렇습니다. 그리고 <모리 카오루 습유집>은 그런 그녀의 취향의 집대성입니다. 연재 중 틈틈히 그렸던 단편이나 중편과 사인회나 축전 등으로 그린 일러스트가 담겨 있습니다.


그녀의 그림체는 꽤 뚜렷하면서도 사실적인 느낌이 들어 상당히 좋아하는 편입니다. 제 생각엔 안경을 쓴 얼굴을 아주 잘 그려내는 것 같습니다. 만화책을 보고 있으면 실세계 어딘가에 저런 얼굴을 한 소녀나 여인이 있을 것만 같을 정도로 몰입이 잘 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역시 주변 배경과 의상이 아주 섬세하게 잘 그려졌기 때문일까요? '엠마'의 얼굴은 꼭 영국까지 안 나가도 주변에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일러스트를 틈틈히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그림체와는 달리, 정작 후기에 이르러서 모리 카오루는 상당히 느낌이 다른 사람이 됩니다. 일단 굉장히 간략하게 옷 같은 건 입히지 않은 자신의 캐릭터로 스스로가 불타오르는 '무언가'에 대해 마구마구 늘어놓습니다. 웃깁니다. ㅋㅋㅋㅋ '셜리도 좋지만 후기가 낫다', '아니다, 후기만 재미있었다', '후기가 없으면 의미가 없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본편도 재미있어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지르고 싶은대로' '뒷일 생각 안하고' '어차피 단행본도 아니니까' 마음껏 달린 일러스트 및 기타 등등의 그림을 지켜보는 재미는 꽤 쏠쏠한 걸 보면, 제 취향도 어느 정도 모리 카오루와 잘 맞나봅니다.-_-;; 유니폼을 단정하게 입은 모습은 꽤 예쁘다고 생각하거든요. 교복은 자기 몸에 딱 맞을 때 제일 예쁘지, 줄인 건 별로 안 이쁘다라고 생각하는 저 역시 늙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전 학생 시절에도 딱 맞는 교복을 좋아했습니다. 우리 고등학교 교복이 예뻐서 그런 생각도 할 수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헤헤.

<엠마>와 <신부 이야기>의 초기 설정에 대한 이야기도 작품을 읽은 사람으로서 꽤 즐거웠습니다. 특히 엠마가 지금보다 좀 어른스러운 느낌이었던데다 윌리엄이 눈썹이 가늘어서 좀 어려보여 결국은 누님을 동경하는 소년 같은 컨셉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는 빵 터졌습니다. 신부 이야기 속 신부는 다른 조금 투박한 얼굴 대신 아미르가 되어 다행이에요.

아, 물론 앞부분의 중단편도 재미있습니다. 특히 '나중에 클 거니까' 헐렁한 교복을 산 신입생들의 모습은 일본이나 우리나 다른 것도 없구나(학교에서 교복을 입는 나라가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요) 싶기도 하고, 역시 메이드가 많이 나오는 걸 보면 이 사람 어마어마한 의상덕후야 싶은 생각도 합니다. (좋아하는 만큼 마구마구 그릴 수 있어서 좋겠어요. 전 그런 능력조차 없다니.ㅠ_ㅠ)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 마냥 누나같은 메이드에 대한 감정도 묘합니다. 서로 다른 타입의 친구가 친해져가는 과정을 그린 '스미레의 꽃'은 보기 드문 현대물이라 오오! 하고 또 신경을 살짝. 안경을 낀 지 오래되어 안경을 처음 썼던 순간 선명하게 보인 세상이 어땠더라, 하는 느낌도 꽤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 순간, 평소 알지 못했던 시선을 새삼 깨닫는 순간도 굉장히 재치가 있어서 마음에 들어요.


여튼 그렇습니다. 모리 카오루의 작품을 읽어보지 않은 이에게는 도대체 이게 뭐..? 싶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을 알고 있는 이에게는 낄낄거리며 가볍게 읽을거리가 가득합니다. 너무 빽빽한 글은 그냥 대충 읽고 넘어가도 좋겠습니다. 그렇게 가볍게 읽으면 돼요. 그래도 <엠마>와 <신부 이야기>는 한 번 읽어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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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드 44 뫼비우스 서재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2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멸망한 다음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적군을 조직해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한다. 모든 반대파를 숙청한 그들은 러시아를 지배하게 되고, 1922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성립이 선언된다. 그리고 레닌 사후 집권한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를 내세우며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그 과정에서 트로츠키를 추방하고 반대파를 숙청한다. 강력한 정치적 억압과 노예나 다름없이 노동 인력을 착취해 거대한 규모의 산업화를 이루어낸 소련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모든 곳에는 국가의 눈과 귀가 열려 있었고, 조금이라도 국가에 반하는 사상을 품고 있는 이들은 세상에서 사라지는 곳에서, 자그만 행동조차 반역의 징조가 되어 서로를 믿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회는 얼마나 황량하고 삭막했을까. 진실을 거짓으로, 거짓을 진실로 믿으며 눈과 귀를 닫은 채 살아가는 것은 괴롭지 않았을까?



  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편할지도 모른다.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많은 이들이 닫고 있는 귀를, 감고 있는 눈을 열리게 하기 위해서 목청을 높여 소리치고 손을 들어올리는 대신 나 역시 함께 눈과 귀를 닫고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숨죽이는 일이 편하다. 어딘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에는 찜찜함이 남아있을지라도. 괴롭지 않았을까,하고 당시 소련에서 살아갔던 이들의 심정을 짐작하는 것은 성급하고 오만한 일일지도 모른다. 스탈린 체제 하의 소련에 비교하자니 조금 민망하지만, 도대체 내 귀와 눈은 얼마나 열려있을까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서방에 사회주의 국가는 완벽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던 소련에서는 모든 것이 완벽해야 했다. 사회주의를 통해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프롤레타리아들은 풍족한 삶을 누려야 했다. 어디서 일어날지 모를 범죄의 두려움 따위는 그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어야 했다. 소련은 범죄조차 일어나지 않는 완벽한 국가니까.



  그리고 그를 위해 국가 안보부 MGB 소속의 비밀경찰인 레오 스테파노비치 데미도프와 같은 이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이러한 국가를 향해 불순한 의도를 품고 살아가는 이들을 숙청한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일이 벌어지면 면밀하게 조사를 마친다. 이렇게 함께 조사하던 동료가 어느샌가 자신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혹독한 고문을 견디다 못해 죽음에 이르곤 한다.



  선로에서 놀다 기차에 치여 몸이 토막난 사건은 사건이어서는 안 된다. 사건이 아닌 사고일 뿐인데, 아이를 잃은 아버지는 아이의 죽음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고, 살인사건임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은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되어 그의 목숨은 물론이거니와 가족 전체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지만, 아이를 잃은 아버지는 그럼에도 실의에 빠진다. 레오는 그들에게 '사고'일 뿐이라고, MGB 하급요원이자 레오의 부하 직원인 아이의 아버지 표도르 안드레예프를 설득한다.



  그러나 전쟁 영웅이자 훌륭한 MGB 요원으로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하던, 진실 따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던 레오의 마음 속에서 의구심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그렇게 생긴 마음의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는 듯 그의 충성심이 시험받고, 여기서 생긴 균열은 점점 커져만 간다. 동료의 음모에 휘말린 레오는 급기야 지위가 강등되어 다른 도시로 전출되고, 사형을 당할 위기에 놓이게 된다. 그의 가족이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는 살인사건을 은폐하는 동시에 살인사건을 해결해야만 한다.








  <차일드 44>는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 아니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회에서 그 진실을 밝혀내기 위한 괴롭고도 긴 여정을 담아내고 있다. 그저 국가에만 충성하던 비밀경찰 레오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불신이 일상이 되어버린 소련 사회를 탁월하게 묘사하는 동시에, 완벽해야만 하는 국가에서 벌어져서는 안 되는, 절대로 인정할 수 없는 '범죄'를 파헤쳐가면서 진실에 맞닥뜨리게 하는 숨막히는 여정을 그려냈다.








  그 시대를, 그 사회 속에서 살아갔던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생각하고 있는 바를 입 밖으로 쉽게 내었다가는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가족들의 목숨까지 앗아가는,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없고, 옳은 것에 눈을 돌려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세상에서 그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은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시작은 마음 속에서 자그맣게 피어오르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조그맣게 벌어진 틈에서는 스스로가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문이끊임없이 새어나온다. 사랑이라 믿고 있었는데, 사랑이 아니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은 견고하다 믿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파괴되어 버렸다. 자그마한 흔들림은 굳게 막혀 있던 마음 한 구석에 틈을 내어줬다. 그리고 눈을 돌린 채 외면하던 진실이 봇물처럼 밀려오며 쌓여있던 둑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발을 딛고 서 있는 지면마저 흔들어버렸다.



  그러나 세상은 자신이 본 것을 인정하지 말라고 한다. 이를 인정하는 것은 잘못이자 반역이라 말한다. 아니, 그 이야기 조차 하지 않는다. 잘못과 반역 따위는 없다. 그저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세상은 진실을 대면할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세상은 진실을 마주하기 위한 레오의 여정에 힘을 실어줬다. 그것이 모두가 함께 고통받는 일이라 한들 이를 함께 나누었다. 세상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세상은 간절히 진실을 원하고 또 갈망했다.


  그리고 레오가 마주한 진실은…….

  


 


 

  책을 덮고 나니 이런 이야기도 있을 수 있구나,라는 기쁨과 이 책은 이미 읽어버렸다는 아쉬움이 공존한다. 아직 이 이야기를 읽지 않았다는 게 이토록 부러울 수가 없다. 도대체 이 책은 무슨 이유로 절판이 된 것인지, 책이 절판이 되도록 내버려둔 독자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이 이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톰 롭 스미스가 데뷔작으로 선택한 소설의 소재는 이미 완벽하게 그의 것이 되어버린 것 같다. 일개 독자인 나조차 톰 롭 스미스의 이야기에는 질투심이 솟아오른다.



 그가 짜내려간 소련의 사회는 정말 어떤 모습이었는지, 당시 소련 사회에서 벌어진 범죄가 여전히 은폐되어 꽁꽁 숨어있을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소설 속에서 레오가 걷는 여정은 참으로 눈물겹다. 진실을 마주하기란 이토록 어렵다.







표도르를 눈멀게 한 사사로운 감정에 그까지 휩쓸려서는 안 된다. 이 히스테리 때문에 선량한 가족이 위험에 처했다. 제때 바로잡지 않으면 살인에 대한 이 근거 없는 수다가 지역 전체로 퍼져나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불안에 떨게 되고, 새로운 사회의 근간이 된 이 말에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범죄란 존재하지 않는다._p.37


공포는 필요하다. 공포가 혁명을 지켜주었다. 공포가 없었다면 레닌은 무너졌을 것이다. 공포가 없었다면 스탈린도 무너졌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MGB 요원들이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것처럼 최대한 전략적으로 용의주도하게 지하철이나 시가 전차에서 은밀하게 속삭이는 식으로 이 건물에 대한 소문을 퍼뜨렸겠는가? 공포는 키우는 것이다. 공포는 그가 하는 일의 일부였다._p.93


대의, 대의, 대의, 대의. 이런 가혹한 방법들은 이 사람들은 적이다,라는 간단하고 설득력 있는 말을 거듭하면 정당회된다._p.101


진실보다 더 끈질긴 건 없어. 그래서 당신이 진실을 그렇게 증오하는 거야. 진실 때문에 당신 기분이 더러워지는 거지._p.106


그들의 도덕적인 나침반은 너무나 오랫동안 쓰지 않아서 통제력을 잃어버렸다. 사람들은 스스로 판단하는 법을 잊어버렸다._p.198


한 사람이 도대체 뭘 이룰 수 있겠는가? 이제 그에 대한 답이 나왔다. 200명의 삶이 파괴되었고, 한 청년과 의사 한 명이 자살했다. 그 청년의 몸은 기차에 치여 두 동강이 났다. 이것이 그의 노력의 결실이었다._p.314


거기다 거짓말도 해야 합니다. 누구에게도 조사하는 진짜 이유를 밝힐 수도 없는 일입니다.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됩니다. 대장님의 용감한 행동에 대한 대가로 가족들이 강제노동수용소에 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대장님 역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게 제 제안입니다._p.321








_20120423~20120424




* 이미지 출처 및 참고 : 알라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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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힘 1 밀리언셀러 클럽 124
돈 윈슬로 지음, 김경숙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지난 해 미 연방수사국(FBI), 국제형사경찰기구(Interpol)을 비롯한 국제 사법기관들의 자문을 구해 세계 10대 지명수배자(The World's 10 Most Wanted)를 선정했다. 대부분이 범죄 조직원이거나 갱단의 두목으로 구성되어있고, 2008년 발표 당시 1순위였던 오사마 빈 라덴의 뒤를 잇는 사람이 멕시코의 마약 조직 시날로아 카르텔의 두목 호아킨 구스만이다.

  그리고 오사마 빈 라덴 사망 이후 2011년에 새롭게 구성된 명단에서 호아킨 구스만은 1순위로 훌쩍 올라서게 된다. '엘 차포'로 불리는 그는 2007년 멕시코의 마약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미국과 멕시코에서 유통되는 코카인과 마리화나가 거의 대부분 이 사람의 손을 거친다고. 한 번 체포되어 8년간 교도소에서 복역했는데 트럭을 이용해 영화같이 탈출한 뒤 10년동안 행방이 묘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약 유통 과정의 대부분에 손을 대고 또 막강한 권력을 발휘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2006년 멕시코의 제36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펠리페 칼데론 대통령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마약 전쟁을 선포한다. 하지만 멕시코의 곳곳에 뿌리내린 조직들과 관료들과 조직 사이의 유착 등 부패가 끊임없이 적발되며 여전히 전쟁의 끝은 안갯속에 숨어있는 상황이다. 범죄 조직간의 충돌이 빈번히 일어나는 국경도시에서는 가난한 청년들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큰 돈을 만질 수 있다는 이유로 마약 조직 카르텔을 찾는다. 마약 조직 사이의 갈등으로 벌어지는 폭력과 범죄 등을 피해 집을 떠난 사람들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범죄 피해를 당한 적이 있고, 소방관과 경찰이 사망, 실종자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등 멕시코를 뒤덮고 있는 범죄와 조직의 뿌리는 언제쯤 뽑혀날 수 있을지, 뽑히긴 할지 의문스럽다. 불과 며칠 전 국경 도시에서 마약 조직 간의 충돌로 인해 하루에 23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여전히 멕시코의 마약 전쟁은 현재 진행형이고, 어마어마한 '개의 힘'이 멕시코를 뒤덮고 있는 듯하다. 그 악의 힘이 어떻게 사회를 뒤바꿔놓았는지!


  이는 돈 윈슬로의 <개의 힘>을 읽고 난 뒤 막연하고 희미하게 알고 있던 멕시코의 실상을 조금이나마 뚜렷하고 선명하게 만들어보려고 어느 정도 발버둥 쳐 본 결과다. 책 속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었는가,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돈 윈슬로의 <개의 힘>은 1975년부터 2003년에 이르기까지, 30년 동안의 마약 전쟁을 관통하는 대서사를 그려내고 있는 스릴러 소설이다. 범죄를 다루고 있는 역사 소설이라고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사실과 허구가 절묘하게 또 촘촘하게 맞물린─이라고 한들 나는 여전히 이를 구분할 수 없다─이 작품은 거대한 규모의 서사에도 불구하고 꼼꼼한 구성과 힘 있는 문장으로 중심을 꽉 잡은 채 쉴새 없이 독자들을 빠른 템포로 진행되는 이야기 속으로 몰아넣는다.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마약 전쟁에는 크게 세 개의 세력이 자리하고 있다. 바레라가 이끄는 바레라 카르텔과 이를 소탕하려는 마약 수사 전담반, 그리고 치미노 조직까지. 그리고 각 세력의 중심에 있는 인물은 각각 아단 바레라와 아트 켈러, 그리고 션 칼란이다. 그리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소설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주는 것이 고급 매춘부 노라 헤이든과 후안 신부다.

  방대한 등장인물들과 세력들 사이의 전쟁은 이 주요 인물들이 어느정도 구심점이 되어 쉴새없이 물어뜯는 개의 힘의 영향력 아래에서 독자가 버틸 수 있게 해 준다. 대립과 우호의 관계가 아니라면 만날 일은 전혀 없어보이는 등장인물들 사이에 의외의 연결고리가 등장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작가의 치밀한 사전 조사와 꼼꼼한 구성에 혀를 내두르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할 여지라고는 남겨주지 않는 이 어마어마한 흡입력이라니!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힘에서 구하소서._시편 22장 20절






  성경을 공부하기는 커녕 읽어본적도 없는 나로서는 시편 22장을 수박 겉핥듯이 살펴볼 수 밖에 없음에도, 20절에 등장하는 '개의 힘'이란 거스르기 힘든 '악(惡)'이라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개의 힘>에서 '죽음의 진토'에 놓여 있는 자신을 둘러싼 '개'와 '악한 무리'들의 세력 아래로부터 구원을 갈망하는 이는 도대체 누구인가.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누구도 <개의 힘>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진다. 마약 유통을 둘러싸고 조직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끝없는 범죄를 만들어내고 있는 카르텔과 이를 소탕하려는 아트 켈러의 움직임이 대조적임에도 불구하고, 선악의 구분은 명확하기는 커녕 모두가 악으로 물들어간다. 소설 속에서 사실적이고도 잔혹한 범죄와 이에 대한 묘사가 계속되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정말로 순수하기 짝이 없는 '악'이란 아직 찾을 수 없다고, 순수한 '개의 힘'의 실체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그리고 이 '개의 힘'은 바레라와 아트 켈러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같잖다는듯 그 세력을 갈수록 넓혀나간다. 마약 유통을 통해 획득한 거대한 자본의 힘은 어디서나 절대적인 권력을 발휘하는데, 이는 개의 힘을 수그러뜨리기는 커녕 목줄이 풀린 것 마냥 더더욱 키워나가는 증폭제가 되어준다. 기본적으로 '정의(正義)'의 편에 서 있어야 할, 마약 카르텔을 뿌리뽑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할 기관들은 이들을 구성하고 있는 관료주의의 부패로 인해 제대로 돌아가기 힘든 시스템이 되어버린다. 목줄을 채우고 이를 꽉 붙잡고 있어야 할 그들의 기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개의 힘'은 멕시코 사회 전역을 뒤덮어간다. 그 과정을 중심 세력을 중심으로 한 마약 단속국 요원과 카르텔의 비등비등한 대립 대신 멕시코 사회의 시스템과 마약 전쟁에 개입한 미국과의 관계까지 포괄적인 시선으로 그 '힘'의 실체를 파헤치고 있다. 벗어날래야 벗어날 없는, 여전히 멕시코 사회를 뒤덮고 있는 '악'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 괴롭고 안타깝지만, 여전히 '개의 힘'을 몰아낼 가능성은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아 보인다.






 

핏불 같은 책. 일단 목줄을 풀어주면 이 스릴러는…… 인정사정없이 덤비고 공격해 와서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건 뭐든 갈기갈기 찢어 버린다._<워싱턴 포스트>





  소설이 함축하고 있는 '개'라는 녀석은 내내 할퀴고 물어뜯고 짖어댄다.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바레라 카르텔이 저지르는 끔찍한 범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장면을 지켜보다못해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보다 더 심하기야 하겠어, 그래도 얘들이 날뛰어봤자 여기까지겠지, 어쩜 그 이상을 보여줄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는 나를 사정없이 비웃는다. 아니, 우리를 뭘로 봤던 거야? 이 정도로 끝낼 줄 알았어? 하고 말이다.


  덕분에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지옥이 지구 위에 나타난다면 여기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개의 힘>에서 묘사되는 멕시코의 모습은 나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다. 마약 카르텔의 끊임없는 범죄는 단지 그들의 물질적인 욕망만을 연료로 삼지 않는다. 관성은 질량이, 그리고 가해지는 힘이 크면 클수록 강해진다. 처음에는 물질적인 욕망에서 출발했을지 모르겠으나 그들의 범죄가 늘어날수록, 그렇게 질량이 높아지고 또 이데올로기와 시스템이 부여하는 힘이 세어질수록 더더욱 멈출 수 없어 달릴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릴러 팬에게는 <개의 힘>이야말로 지옥에서 태어난 천국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앞서 이야기 한 것의 반복에 불과하지만, 뛰어난 구성과 힘 있는 문장, 그리고 각자의 개성이 뚜렷한 매력적인 등장인물들은 어마어마한 분량의 작품을 단숨에 읽어나가게 한다. 또 다른 의미의 '개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한 번 발을 담그면 빠져나오기는 커녕 갈수록 나를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스릴러의 세계가…….







어쩌면 그건 우리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고, 세월이 흐른 뒤 아트는 가끔 생각했다. 확실히 아트의 내면에도 잠재되어 있었다. 개의 힘._1권, p.55


좋소. 우리는 어떤 흙에서도 자라고 번식하는 철쭉나무 씨앗처럼 퍼져 나갈 것이오. 만약 시날로아를 차지하려는 우리의 거사에 그들이 거치적거린다면, 우리는 국가 전체를 차지해 버릴 것이오._1권, p.99


온두라스 밖으로 마약을 흘려보내는 사람은 양키 야구장에서 핫도그를 파는 사람만큼이나 경이롭다._1권, p.208


아트는 방아쇠를 꽉 쥐었다. 힘이 들었다. 아트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당기기가 힘들었다. 티오가 아트를 보고 싱긋 웃었다. 완벽한 사악함이었다. 개의 힘._1권, p.328


그 조직의 일부가 되도록 해. 그래서 그들이 너를 떼어내려면 전체를 잡아 뜯어내야 하도록 말이야. 그래야 널 떼어낼 일이 없을 게다._1권, p.378


신이 없다면, 필요한 것은 살아남기밖에 없었다._2권, p.126


코카콜라 판매자가 되겠어, 펩시콜라 판매자가 되겠어? 반드시 선택해야 하고 둘 다 선택할 수는 없어. 코카냐 펩시냐. 포드냐 시보레냐. 허츠 렌터카냐, 에이비스 렌터카냐. 모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거지._2권, p.138


아트에게 이 일을 처리할 힘이 있을까? 현 정부에 의해 은폐되어 버릴까? NAFTA에 집중하는 만큼 신경 써줄 다른 미국 기관으로 어떤 곳이 있을까?_2권, p.187


죽이는 일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지. 내 영혼을 피로 물들이는 일에 질렸어._2권, p.492


어쩌면 정원을 돌보고 신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는 일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인지도 몰라. 반대되는 모든 증거와 맞서서 말이다._2권, p.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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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의 뱀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아까워서 감히 펼치지도 못하고 있던 미치오 슈스케의 <구체의 뱀>을 드디어 읽었다. 막상 한 번 펼치니 손에서 놓지 못하고 한 번에─는 아니고, 자려다가 너무 잠이 안 와서 도로 일어나서 결국 끝까지 읽어버렸지만 어쨌든 한 번에─뚝딱 읽어지는 것이, 나는 왜 그리 안절부절 못한거람. 이렇게 좋은걸!

  하지만, 아깝기도 아깝다. 열일곱 소년이 마주한 아픈 진실이, 이런 형태로 맞닥뜨려질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결말에서 배어나오는 씁쓸함과 그 속에서 조용히 배어나오는 아픈 구원을 이미 나는 마주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번에 만난 미치오 슈스케의 '소년'은 열일곱이었다. 실은 가장 위태로운 나이, 열일곱.

  아무것도 모르기에 순진무구하지도, 그렇다고 세상으로부터 묻힐 수 있는 때도 덜 묻은, 어중간한 나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알지만, 그렇다고 그 밖의 세계가 어떤지도 잘 모르는 나이. 좁은 세계 속에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벌어진 일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나이. 자신의 위선과 거짓만은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그 행동이 무슨 일을 불러일으킬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나이.




  열일곱 소년 토모히코는 이혼한 부모님과 떨어져 이웃집 오츠타로씨 집에서 얹혀살게 된다. 집 곳곳에 침투한 흰개미들을 소독하는 것을 주요 업무로 삼는 오츠타로씨를 도와 토모히코는 주말이면 그를 따라 동네 점검을 나가곤 한다. 그리고 한 장소를 늘 지나가는 자전거를 탄 여인을 보곤 하는데, 7년 전 화재 사건 이후 목숨을 잃은 오츠타로씨의 딸 사요와 묘하게 비슷한 분위기에 늘 시선이 따라간다. 우연히 그녀가 사는 집을 알게 된 토모는 밤마다 늙은 집주인과 그녀의 정사가 벌어지는 집 마루 밑으로 숨어들어 소리를 훔쳐 듣는다. 그리고 화재로 인해 집주인이 목숨을 잃은 이후,자전거를 타던 그녀, 토모코와 접점이 생겨 이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토모히코는 거짓말을 시작한다. 그 거짓은 어떤 사건을, 그리고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키게 될까─.

 

 

 

 

 

  슬프고 음울한, 또 차가운 분위기가 소설의 전반을 지배한다. 그리고 그 분위기의 중심에는 '사요'라는 테마가 놓여있다.

  바닷가 마을에서 살고 있는 토모히코가 품은 낯선 여자에 대한 동경은 어린 시절 함께 놀았던, 지금은 세상에 없는 옆집의 사요의 이미지와 함께 겹쳐지면서 촘촘하게 엮여 소년의 묘한 심리가 굉장히 섬세하게 그려진다. 등장인물들의 마음 속에 각기 다른 이미지로 잠들어 있던 사요의 이해할 수 없는 묘한 행동은 열일곱 소년의 주변에서 꼬이기 시작한 사건이 터져나오면서 함께 기지개를 켜고는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하는 진실─과연 진실일까?─과 마주하게 한다. 미치오 슈스케는 이렇게 '사요'를 중심으로 하는 테마를 소설의 전반에 배치함으로써 소년의 성장이라는 주제에 '미스터리'를 어느정도 녹여냈다. 그리고 여기서 그가 마주한 열일곱 소년의 심리는 나아가 소라게를 닮은, 또 다른 소년들을 발견하게 했을런지도.

 

 

 

 

 

  토모히코의 세상은 스노돔과 같다. 스노돔 안에서 바라보는 바깥 세상은 굴절되어 눈에 제대로 들어오질 않는다. 그저 내 머리 위에 있는 커다란 돔만이 세상의 전부이고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나는 스노돔의 균형이 흐트러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스노돔이 살짝 흔들리며 머리 위에서 눈이 흩날리고 있노라면, 세상이 무너질 정도로 큰일이 벌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그 흔들림은 가라앉지만, 흔들림에 휩싸여있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은 채 스노돔의 바닥 안에 눈가루가 내려앉듯 도피처 안에 조용히 침잠되어간다. 그 때의 흔들림은, 의외의 장소에서 다시 파동을 불러일으킨다. 다시 흔들리기 시작한 나는 앞뒤 사정은 생각지도 않은 채, 오로지 나의 흔들림에만 집중한 채 스노돔 안의 세상을 부숴버린다. 깨어져버린 스노돔 밖에서 뒤바뀐 시선으로 바라본 안쪽의 세상은, 조금만 냉정했더라면, 조금만 덜 경솔했더라면 괜찮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후회를 덩어리째 삼킨 채 꺽꺽거리고 있노라면, 그 후회를 삼켜버린 것이 후회되어 또 후회한다. 어린 왕자가 만난 술고래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이 토모히코의 세상에서 섬세하게 그려지고있는 토모히코의 심리를 바라보면서, 나는 발견한다. 비록 지금에서야 스노돔 밖에 서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지만, 미칠듯이 후회하고 또 후회하며 마음 속에 덩어리를 품고 있던 나를. 토모히코를 둘러싼 가시박힌 스노돔은 아니었을지라도, 그 시절에는 그것만이 전부인 것처럼 답답한 후회덩어리로 가득 차 있던 나의 스노돔을.

 

 

 

 

 

  토모히코에게 '사요'는 어린 시절 세상의 전부였던 스노돔의 한가운데 놓여있는 눈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은 그 스노돔을, 세상을 통째로 흔들어버렸다. 하지만 어느 정도 스노돔 안에서 흩날리는 눈이 잠잠하게 가라앉을 때 쯤, 스노돔을 다시 한 번 부숴버리는 코끼리, '토모코'가 나타나고, 토모히코는 세상을 부숴버린 그 코끼리를 무자비하게 삼켜버린다. 하지만 그것이 모자가 아니라 코끼리를 삼켜버린 채 울고 있는 토모히코임을, 코끼리를 품고 눈물을 애써 삼키는 뱀임을 알아봐주는 '나오'가 있다. 그렇게 미치오 슈스케는 책의 말미에 이르러 어느정도 구원을 발견하게 해 준다.






  아름다운 세상이지만, 스노돔을 부숴버릴 필요도 있다. 스노돔의 눈가루는 자신의 흔들림을 기억하고 있기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스노돔을 부숴버리고 한 발짝 내딛어야 한다. 후회를 마주봐야한다. 후회했음을 후회하더라도.

 

 

 

 

 

 역시 좋다. 아니, 너무너무 좋다, 미치오 슈스케. 그는 이렇게 성장을 또 한 번 담아내는구나.






스노돔 속을 쳐다보는 사요의 눈은 어딘가 아득하게 먼 곳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흐려져 있었다. 투명한 유리구슬 안쪽에는 사요에게 '불쌍하다'는 말을 들은 눈사람이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_p.44~45


─그래, 속임수지. 하지만 토모, 기억해 둬. 어른이 되면이런 속임수가 중요해지는 법이지. 머지않아 토모도 혼자서 산만 솜씨 좋게 없앨 수도 있을 거야. 그럼 어른이야._p.110~111


마루 밑에서 기어 나왔을 때 만약 내가 소방차를 불렀다면, 아니면 창문을 꺠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면 목숨을 구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구했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나는 신고하지 않았다. 제멋대로이고 교활한 발이 나를 그 자리에서 도망치게 했다._p.128


만약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어느 시간으로 돌아갈까. 어느 시절의 나로 다시 한 번 살아 보고 싶을까. 어른과 어린아이만의 세상일까._p.217


이 사람 역시 '술고래'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짓이 싫고, 불안하고, 바보 같고, 신용할 수 없어서 또 돈을 치르고 아야메를 부를지도 모른다._p.269


콘크리트로 된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어린아이의 마술이라도 좋으니 그렇게 해서라도 모든 것을 없애 버리고 싶었다. 그 캠프장에서 오츠타로 씨는 내게 말했다. 어른이 되면 뭐든지 잘 없앨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나는 할 수 없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절대로 없앨 수 없다._p.295


─그날 밤, 어두운 방 한가운데에서 당황스러운 표증을 지은 나오를 앞에 두고 소리 내어 우는 내게 누가 똑같은 질문을 했다면, 나는 분명히 이렇게 대답했으리라.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_p.310


그로부터 몇 초 동안 내가 한 생각은 분명 헛된 공상이었으리라.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웃음소리가 어딘가로 멀어져 홀로 남겨진 듯 우두커니 선 내가 멋대로 그려 낸 하나의 이야기였으리라. 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는, 사람의 수만큼 있는 이야기 중 작은 하나였다._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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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의 고치 작가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본격 미스터리 단편집을 읽다 꽤나 매력적인 트릭을 마주하면 아니, 이 트릭을 단편에 이렇게 덜렁 써버리면 아깝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반면, 장편 미스터리에서 트릭을 둘러싼 수수께끼가 다 풀리면 의외로 깔끔한 해답에 어라, 이런 걸 장편으로 어떻게 늘여 쓰는걸까? 생각보다 단순한걸? 그런 생각도 든다. 뭐 이런… 도대체 그럼 뭘 쓰라는 건가? 중편? 큭큭.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창작의 고통에 머리를 쥐어뜯는 작가가 아니라 속편하게 그들이 완성시킨 수수께끼와 그 풀이를 무작정 받아들이는 독자의 느긋한 여유라는 거다. 답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그 답을 찾아가는 길이 앞으로 쭉 펼쳐지니까 뭐, 이런 걸까. 이렇게 발전 없는 미스터리 독자인 저에게도 한번에 트릭을 간파당하신다면 그거 정말 심각한 겁니다. 뭐, 그렇다고요.






  어쨌든 빈약한 동기 부여로 독자들의 아쉬움을 꽤나 남기고 있는 작가이기도 한, 하지만 신본격 미스터리로서 자신의 길을 묵묵하게 걸어가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하.. 저는 그를 이렇게 판단하기엔 작품을 너무 안 읽었습니다.ㅋㅋ)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을 또 만났다. 공교롭게도 작가 아리스 시리즈를 연달아 읽게 되었는데, 실제 <달리의 고치>는 전체 작가 아리스 시리즈 중에서도 두 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한다. 이렇게 두 번째로 전체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을 읽게 되었으니 뭐, 라는 식으로 내 나름대로 쓸데없는 의미를 부여하는 중이다.



  그러니까 그런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은 역시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는 꽤나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일단 '작가 아리스'로 한정해서, 그러나 시리즈가 이런 데 다른 게 또 뭐 다르기야 할까 싶긴 하다. 복잡해 보이는 트릭이 말 그대로 복잡하게 풀리면 그것은 현란한 트릭의 의미가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좀 아깝게 느껴질 정도로 깔끔할 때도 있지만. 이걸 어떻게 늘린 거야? 싶다니까.

  그러나 그 아쉬움을 뒤로 미룬다. 결국은 굉장히 복잡하게 보이는 수학 문제도 상당히 아름답고 간결한 풀이로 답을 제시할 때 비로소 가치가 빛나는 법이니까.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달리의 고치>는 그런 풀이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데, 그 측면에서는 앞서 읽었던 <주홍색 연구>보다 한 수 위다. 구구절절 말이 길었는데 본격적으로 <달리의 고치>가 뭔지 한 번 들어가 봅시다.






  살바도르 달리가 그림 뿐만 아니라 다른 디자인에 있어서도 두각을 나타냈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달리는 보석 디자인에도 손을 댔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 <달리의 고치>의 주인공 도죠 슈이치는 보석 상인이다. 꽤나 성공한 사업가로서 인정받는 중.


  주얼리 도죠의 사장인 그는 살바도르 달리의 어마어마한 매니아로, 어린애처럼 달리를 따라 똑같은 모양의 콧수염을 트레이드마크로 길렀다. 그의 이니셜은 달리와 똑같은 S.D.다. 생일 역시 5월 11일로, 도죠는 그런 사실도 자랑스러워한다고 한다.(p.16)

  여튼 그 도죠 슈이치가 자신의 별장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주말이면 늘 별장에 들러 '프로트 캡슐'에 들어가 명상에 잠기곤 했던 그가 월요일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가족이 경찰에 신고를 한 것. 별장의 프로토 캡슐에 들어가 있던 도죠 슈이치의 시체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둔기에 머리를 맞고 사망한 도죠 슈이치는 어째서 프로토 캡슐 안에서 발견되었나, 방 근처에서 핏자국이 왜 갑자기 사라졌나, 무엇보다 범인은 왜 그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수염을 잘라가 버렸나.


  타살임은 틀림없어보이나 뭔가 석연치 않은 사건 현장. 도죠 슈이치 살인 사건의 해결에 범죄 심리학자인 히무라 히데오와 그의 조수 겸 작가인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참여하면서 그들의 이야기가 독자에게도 공개가 된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






  괴이한 사건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장 검증과 그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무엇보다, 누가 도대체 어떤 이유로 그런 현장을 만들어 두었나. 보석상으로서 꽤나 재력을 갖춘 인물인 만큼, 그의 목숨을 노리는 동기는 어느 정도 존재해 보인다. 게다가 그에게는 연적까지 존재하고 있었으니, 거기에 속사정이 있는 것은 아닐까.

  덕분에 언제나 늘 훌륭한 살인 동기가 되어주곤 하는 '금전' 그리고 '사랑'에 둘러싸인 <달리의 고치>는 모호함 투성이인 현장의 메시지를 해석해나가면서 진행되어간다.






  그렇게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주어진 트릭을 큰 틀로 잡고 그 안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도죠 슈이치라는 한 인간의 삶을, 달리 매니아로서, 성공한 보석상으로서, 한 여자를 사랑했던 남자로서의 다양한 면모를 조명한다. 특히 사건 현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프로토 캡슐'을 통해 현대인으로서의 고뇌를 담아내고 있기도 하다.


  실은, 난해한 수수께끼를 풀이해 나가는 과정도 좋지만 무엇보다 이 <달리의 고치>의 큰 매력은 '고치'를 주제로 삼은 테마다. 어머니의 자궁속이 그야말로 지상 낙원이었다고 말하는 살바도르 달리처럼 도죠 슈이치에게 현실에서 도피해 안락함을 누릴 수 있는 장소는 바로 별장 그리고 명상에 잠길 수 있는 '프로트 캡슐'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화자인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그의 삶을 그려내면서 한결같이 동정적이고 또 따뜻한 시선을 담아내고 있는데, 그 역시 또 다른 자신만의 '고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가와와 히무라 뿐 아니라 도죠 슈이치의 죽음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을 입체적으로 그려내면서 현실을 떠나 이상적인 낙원을 꿈꾸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담아냈다. 그리고 나에게도 묻는다. 당신의 고치는 무엇이냐고.






  기묘한 수수께끼의 현장의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그려진 히무라와 아리스가와의 유쾌한 대화, 도죠 슈이치의 삶을 되짚어보면서 드러나는 그의 애정과 고뇌─그리고 이는 달리 매니아였던 도죠 슈이치 답게 달리의 삶, 달리의 뮤즈이자 연인이었던 갈라, 달리의 보석 디자인 등과 연결되어 그의 주변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 모두를 아우르며 누구나 품고 있는, 또는 갈망하는 낙원의 존재를 '고치'라는 형태로 그려내고 있는 구성까지 꽤나 두툼한 분량과 긴 호흡으로 이어가야 하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잘 어우러지게 담아내고 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문장을, 작품을 두 번 읽어보니 알겠다. 상당히 여운이 남는 그의 이야기는 신본격 미스터리의 매력 뿐 아니라 다양한 테마를 담아내려고 한다는 것을. 본격적으로 찾아나서보고자 한다. 이렇게 또 한 번 코를 꿰이는구나. 잘 부탁해요, 아리스가와 아리스.








어째서 피해자는 목숨뿐 아니라 아끼던 콧수염까지 빼앗겨야 했을까?_p.78


사랑하는 이성은 자신의 환영을 투영하는 스크린이나 마찬가집니다. 자기와 맞는 상대가 찾아오면 누구나 보석처럼 반짝이죠. 문제는 희소성의 유무겠죠. 같은 캐럿의 다이아몬드를 똑같이 세공해 같은 링에 끼우면 똑같은 반지가 완성되겠지만, 사람은 다르죠. 자기가 반한 사람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으니까요._p.242


영원한 아름다움이라니 소박한 신앙이다. 보석은 어차피 원소기호로 표시되며 적절한 화학반응을 일으키면 폭발하는 광물일 뿐이다. 살짝 우습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귀엽게 느껴졌다. 유치하다고 깔보는 게 아니라, 좋아하니까 좋아한다고 말하는 꾸밈없는 대답에 호감이 갔다. 보석의 광채는 영원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불어 본격 추리소설과 한신 타이거즈도 영원불멸이다._p.343


"히무라 교수님의 고치는 뭐지?"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리고─.

"학문을 빙자한 인간 사냥."

너무나도 자조적인 말투였다. 대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묻지 말 걸 그랬다. 나는 후회했다._p.373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본격 추리소설이라는 소우주를 그림으로써 구원받으려 했던 것이리라. 그리고 허구에 불과하지만 소설 속에서만큼은 완벽한 논리를 내걸고 세상을 찰흙처럼 주물럭거려 무언가에 실컷 복수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 마치 환자에게 치료의 일환으로 모형정원 만들기를 시키는 정신과 의사처럼 나만의 모형정원을 만들었던 것이다._p.384


누에는 고치를 짓고 그 안에서 번데기가 되지. 진주조개는 껍질 속으로 침입한 이물질을 수천 겹의 진주층으로 감싸 보석을 만들어. 인간도 마찬가지야. 인간의 고치 속에서도 갖가지 것들이 변화해 다양한 무언가가 만들어지겠지._p.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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