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의 뱀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아까워서 감히 펼치지도 못하고 있던 미치오 슈스케의 <구체의 뱀>을 드디어 읽었다. 막상 한 번 펼치니 손에서 놓지 못하고 한 번에─는 아니고, 자려다가 너무 잠이 안 와서 도로 일어나서 결국 끝까지 읽어버렸지만 어쨌든 한 번에─뚝딱 읽어지는 것이, 나는 왜 그리 안절부절 못한거람. 이렇게 좋은걸!

  하지만, 아깝기도 아깝다. 열일곱 소년이 마주한 아픈 진실이, 이런 형태로 맞닥뜨려질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결말에서 배어나오는 씁쓸함과 그 속에서 조용히 배어나오는 아픈 구원을 이미 나는 마주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번에 만난 미치오 슈스케의 '소년'은 열일곱이었다. 실은 가장 위태로운 나이, 열일곱.

  아무것도 모르기에 순진무구하지도, 그렇다고 세상으로부터 묻힐 수 있는 때도 덜 묻은, 어중간한 나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알지만, 그렇다고 그 밖의 세계가 어떤지도 잘 모르는 나이. 좁은 세계 속에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벌어진 일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나이. 자신의 위선과 거짓만은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그 행동이 무슨 일을 불러일으킬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나이.




  열일곱 소년 토모히코는 이혼한 부모님과 떨어져 이웃집 오츠타로씨 집에서 얹혀살게 된다. 집 곳곳에 침투한 흰개미들을 소독하는 것을 주요 업무로 삼는 오츠타로씨를 도와 토모히코는 주말이면 그를 따라 동네 점검을 나가곤 한다. 그리고 한 장소를 늘 지나가는 자전거를 탄 여인을 보곤 하는데, 7년 전 화재 사건 이후 목숨을 잃은 오츠타로씨의 딸 사요와 묘하게 비슷한 분위기에 늘 시선이 따라간다. 우연히 그녀가 사는 집을 알게 된 토모는 밤마다 늙은 집주인과 그녀의 정사가 벌어지는 집 마루 밑으로 숨어들어 소리를 훔쳐 듣는다. 그리고 화재로 인해 집주인이 목숨을 잃은 이후,자전거를 타던 그녀, 토모코와 접점이 생겨 이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토모히코는 거짓말을 시작한다. 그 거짓은 어떤 사건을, 그리고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키게 될까─.

 

 

 

 

 

  슬프고 음울한, 또 차가운 분위기가 소설의 전반을 지배한다. 그리고 그 분위기의 중심에는 '사요'라는 테마가 놓여있다.

  바닷가 마을에서 살고 있는 토모히코가 품은 낯선 여자에 대한 동경은 어린 시절 함께 놀았던, 지금은 세상에 없는 옆집의 사요의 이미지와 함께 겹쳐지면서 촘촘하게 엮여 소년의 묘한 심리가 굉장히 섬세하게 그려진다. 등장인물들의 마음 속에 각기 다른 이미지로 잠들어 있던 사요의 이해할 수 없는 묘한 행동은 열일곱 소년의 주변에서 꼬이기 시작한 사건이 터져나오면서 함께 기지개를 켜고는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하는 진실─과연 진실일까?─과 마주하게 한다. 미치오 슈스케는 이렇게 '사요'를 중심으로 하는 테마를 소설의 전반에 배치함으로써 소년의 성장이라는 주제에 '미스터리'를 어느정도 녹여냈다. 그리고 여기서 그가 마주한 열일곱 소년의 심리는 나아가 소라게를 닮은, 또 다른 소년들을 발견하게 했을런지도.

 

 

 

 

 

  토모히코의 세상은 스노돔과 같다. 스노돔 안에서 바라보는 바깥 세상은 굴절되어 눈에 제대로 들어오질 않는다. 그저 내 머리 위에 있는 커다란 돔만이 세상의 전부이고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나는 스노돔의 균형이 흐트러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스노돔이 살짝 흔들리며 머리 위에서 눈이 흩날리고 있노라면, 세상이 무너질 정도로 큰일이 벌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그 흔들림은 가라앉지만, 흔들림에 휩싸여있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은 채 스노돔의 바닥 안에 눈가루가 내려앉듯 도피처 안에 조용히 침잠되어간다. 그 때의 흔들림은, 의외의 장소에서 다시 파동을 불러일으킨다. 다시 흔들리기 시작한 나는 앞뒤 사정은 생각지도 않은 채, 오로지 나의 흔들림에만 집중한 채 스노돔 안의 세상을 부숴버린다. 깨어져버린 스노돔 밖에서 뒤바뀐 시선으로 바라본 안쪽의 세상은, 조금만 냉정했더라면, 조금만 덜 경솔했더라면 괜찮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후회를 덩어리째 삼킨 채 꺽꺽거리고 있노라면, 그 후회를 삼켜버린 것이 후회되어 또 후회한다. 어린 왕자가 만난 술고래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이 토모히코의 세상에서 섬세하게 그려지고있는 토모히코의 심리를 바라보면서, 나는 발견한다. 비록 지금에서야 스노돔 밖에 서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지만, 미칠듯이 후회하고 또 후회하며 마음 속에 덩어리를 품고 있던 나를. 토모히코를 둘러싼 가시박힌 스노돔은 아니었을지라도, 그 시절에는 그것만이 전부인 것처럼 답답한 후회덩어리로 가득 차 있던 나의 스노돔을.

 

 

 

 

 

  토모히코에게 '사요'는 어린 시절 세상의 전부였던 스노돔의 한가운데 놓여있는 눈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은 그 스노돔을, 세상을 통째로 흔들어버렸다. 하지만 어느 정도 스노돔 안에서 흩날리는 눈이 잠잠하게 가라앉을 때 쯤, 스노돔을 다시 한 번 부숴버리는 코끼리, '토모코'가 나타나고, 토모히코는 세상을 부숴버린 그 코끼리를 무자비하게 삼켜버린다. 하지만 그것이 모자가 아니라 코끼리를 삼켜버린 채 울고 있는 토모히코임을, 코끼리를 품고 눈물을 애써 삼키는 뱀임을 알아봐주는 '나오'가 있다. 그렇게 미치오 슈스케는 책의 말미에 이르러 어느정도 구원을 발견하게 해 준다.






  아름다운 세상이지만, 스노돔을 부숴버릴 필요도 있다. 스노돔의 눈가루는 자신의 흔들림을 기억하고 있기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스노돔을 부숴버리고 한 발짝 내딛어야 한다. 후회를 마주봐야한다. 후회했음을 후회하더라도.

 

 

 

 

 

 역시 좋다. 아니, 너무너무 좋다, 미치오 슈스케. 그는 이렇게 성장을 또 한 번 담아내는구나.






스노돔 속을 쳐다보는 사요의 눈은 어딘가 아득하게 먼 곳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흐려져 있었다. 투명한 유리구슬 안쪽에는 사요에게 '불쌍하다'는 말을 들은 눈사람이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_p.44~45


─그래, 속임수지. 하지만 토모, 기억해 둬. 어른이 되면이런 속임수가 중요해지는 법이지. 머지않아 토모도 혼자서 산만 솜씨 좋게 없앨 수도 있을 거야. 그럼 어른이야._p.110~111


마루 밑에서 기어 나왔을 때 만약 내가 소방차를 불렀다면, 아니면 창문을 꺠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면 목숨을 구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구했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나는 신고하지 않았다. 제멋대로이고 교활한 발이 나를 그 자리에서 도망치게 했다._p.128


만약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어느 시간으로 돌아갈까. 어느 시절의 나로 다시 한 번 살아 보고 싶을까. 어른과 어린아이만의 세상일까._p.217


이 사람 역시 '술고래'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짓이 싫고, 불안하고, 바보 같고, 신용할 수 없어서 또 돈을 치르고 아야메를 부를지도 모른다._p.269


콘크리트로 된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어린아이의 마술이라도 좋으니 그렇게 해서라도 모든 것을 없애 버리고 싶었다. 그 캠프장에서 오츠타로 씨는 내게 말했다. 어른이 되면 뭐든지 잘 없앨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나는 할 수 없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절대로 없앨 수 없다._p.295


─그날 밤, 어두운 방 한가운데에서 당황스러운 표증을 지은 나오를 앞에 두고 소리 내어 우는 내게 누가 똑같은 질문을 했다면, 나는 분명히 이렇게 대답했으리라.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_p.310


그로부터 몇 초 동안 내가 한 생각은 분명 헛된 공상이었으리라.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웃음소리가 어딘가로 멀어져 홀로 남겨진 듯 우두커니 선 내가 멋대로 그려 낸 하나의 이야기였으리라. 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는, 사람의 수만큼 있는 이야기 중 작은 하나였다._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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