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드 44 뫼비우스 서재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2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멸망한 다음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적군을 조직해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한다. 모든 반대파를 숙청한 그들은 러시아를 지배하게 되고, 1922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성립이 선언된다. 그리고 레닌 사후 집권한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를 내세우며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그 과정에서 트로츠키를 추방하고 반대파를 숙청한다. 강력한 정치적 억압과 노예나 다름없이 노동 인력을 착취해 거대한 규모의 산업화를 이루어낸 소련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모든 곳에는 국가의 눈과 귀가 열려 있었고, 조금이라도 국가에 반하는 사상을 품고 있는 이들은 세상에서 사라지는 곳에서, 자그만 행동조차 반역의 징조가 되어 서로를 믿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회는 얼마나 황량하고 삭막했을까. 진실을 거짓으로, 거짓을 진실로 믿으며 눈과 귀를 닫은 채 살아가는 것은 괴롭지 않았을까?



  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편할지도 모른다.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많은 이들이 닫고 있는 귀를, 감고 있는 눈을 열리게 하기 위해서 목청을 높여 소리치고 손을 들어올리는 대신 나 역시 함께 눈과 귀를 닫고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숨죽이는 일이 편하다. 어딘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에는 찜찜함이 남아있을지라도. 괴롭지 않았을까,하고 당시 소련에서 살아갔던 이들의 심정을 짐작하는 것은 성급하고 오만한 일일지도 모른다. 스탈린 체제 하의 소련에 비교하자니 조금 민망하지만, 도대체 내 귀와 눈은 얼마나 열려있을까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서방에 사회주의 국가는 완벽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던 소련에서는 모든 것이 완벽해야 했다. 사회주의를 통해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프롤레타리아들은 풍족한 삶을 누려야 했다. 어디서 일어날지 모를 범죄의 두려움 따위는 그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어야 했다. 소련은 범죄조차 일어나지 않는 완벽한 국가니까.



  그리고 그를 위해 국가 안보부 MGB 소속의 비밀경찰인 레오 스테파노비치 데미도프와 같은 이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이러한 국가를 향해 불순한 의도를 품고 살아가는 이들을 숙청한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일이 벌어지면 면밀하게 조사를 마친다. 이렇게 함께 조사하던 동료가 어느샌가 자신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혹독한 고문을 견디다 못해 죽음에 이르곤 한다.



  선로에서 놀다 기차에 치여 몸이 토막난 사건은 사건이어서는 안 된다. 사건이 아닌 사고일 뿐인데, 아이를 잃은 아버지는 아이의 죽음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고, 살인사건임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은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되어 그의 목숨은 물론이거니와 가족 전체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지만, 아이를 잃은 아버지는 그럼에도 실의에 빠진다. 레오는 그들에게 '사고'일 뿐이라고, MGB 하급요원이자 레오의 부하 직원인 아이의 아버지 표도르 안드레예프를 설득한다.



  그러나 전쟁 영웅이자 훌륭한 MGB 요원으로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하던, 진실 따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던 레오의 마음 속에서 의구심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그렇게 생긴 마음의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는 듯 그의 충성심이 시험받고, 여기서 생긴 균열은 점점 커져만 간다. 동료의 음모에 휘말린 레오는 급기야 지위가 강등되어 다른 도시로 전출되고, 사형을 당할 위기에 놓이게 된다. 그의 가족이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는 살인사건을 은폐하는 동시에 살인사건을 해결해야만 한다.








  <차일드 44>는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 아니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회에서 그 진실을 밝혀내기 위한 괴롭고도 긴 여정을 담아내고 있다. 그저 국가에만 충성하던 비밀경찰 레오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불신이 일상이 되어버린 소련 사회를 탁월하게 묘사하는 동시에, 완벽해야만 하는 국가에서 벌어져서는 안 되는, 절대로 인정할 수 없는 '범죄'를 파헤쳐가면서 진실에 맞닥뜨리게 하는 숨막히는 여정을 그려냈다.








  그 시대를, 그 사회 속에서 살아갔던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생각하고 있는 바를 입 밖으로 쉽게 내었다가는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가족들의 목숨까지 앗아가는,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없고, 옳은 것에 눈을 돌려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세상에서 그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은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시작은 마음 속에서 자그맣게 피어오르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조그맣게 벌어진 틈에서는 스스로가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문이끊임없이 새어나온다. 사랑이라 믿고 있었는데, 사랑이 아니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은 견고하다 믿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파괴되어 버렸다. 자그마한 흔들림은 굳게 막혀 있던 마음 한 구석에 틈을 내어줬다. 그리고 눈을 돌린 채 외면하던 진실이 봇물처럼 밀려오며 쌓여있던 둑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발을 딛고 서 있는 지면마저 흔들어버렸다.



  그러나 세상은 자신이 본 것을 인정하지 말라고 한다. 이를 인정하는 것은 잘못이자 반역이라 말한다. 아니, 그 이야기 조차 하지 않는다. 잘못과 반역 따위는 없다. 그저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세상은 진실을 대면할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세상은 진실을 마주하기 위한 레오의 여정에 힘을 실어줬다. 그것이 모두가 함께 고통받는 일이라 한들 이를 함께 나누었다. 세상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세상은 간절히 진실을 원하고 또 갈망했다.


  그리고 레오가 마주한 진실은…….

  


 


 

  책을 덮고 나니 이런 이야기도 있을 수 있구나,라는 기쁨과 이 책은 이미 읽어버렸다는 아쉬움이 공존한다. 아직 이 이야기를 읽지 않았다는 게 이토록 부러울 수가 없다. 도대체 이 책은 무슨 이유로 절판이 된 것인지, 책이 절판이 되도록 내버려둔 독자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이 이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톰 롭 스미스가 데뷔작으로 선택한 소설의 소재는 이미 완벽하게 그의 것이 되어버린 것 같다. 일개 독자인 나조차 톰 롭 스미스의 이야기에는 질투심이 솟아오른다.



 그가 짜내려간 소련의 사회는 정말 어떤 모습이었는지, 당시 소련 사회에서 벌어진 범죄가 여전히 은폐되어 꽁꽁 숨어있을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소설 속에서 레오가 걷는 여정은 참으로 눈물겹다. 진실을 마주하기란 이토록 어렵다.







표도르를 눈멀게 한 사사로운 감정에 그까지 휩쓸려서는 안 된다. 이 히스테리 때문에 선량한 가족이 위험에 처했다. 제때 바로잡지 않으면 살인에 대한 이 근거 없는 수다가 지역 전체로 퍼져나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불안에 떨게 되고, 새로운 사회의 근간이 된 이 말에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범죄란 존재하지 않는다._p.37


공포는 필요하다. 공포가 혁명을 지켜주었다. 공포가 없었다면 레닌은 무너졌을 것이다. 공포가 없었다면 스탈린도 무너졌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MGB 요원들이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것처럼 최대한 전략적으로 용의주도하게 지하철이나 시가 전차에서 은밀하게 속삭이는 식으로 이 건물에 대한 소문을 퍼뜨렸겠는가? 공포는 키우는 것이다. 공포는 그가 하는 일의 일부였다._p.93


대의, 대의, 대의, 대의. 이런 가혹한 방법들은 이 사람들은 적이다,라는 간단하고 설득력 있는 말을 거듭하면 정당회된다._p.101


진실보다 더 끈질긴 건 없어. 그래서 당신이 진실을 그렇게 증오하는 거야. 진실 때문에 당신 기분이 더러워지는 거지._p.106


그들의 도덕적인 나침반은 너무나 오랫동안 쓰지 않아서 통제력을 잃어버렸다. 사람들은 스스로 판단하는 법을 잊어버렸다._p.198


한 사람이 도대체 뭘 이룰 수 있겠는가? 이제 그에 대한 답이 나왔다. 200명의 삶이 파괴되었고, 한 청년과 의사 한 명이 자살했다. 그 청년의 몸은 기차에 치여 두 동강이 났다. 이것이 그의 노력의 결실이었다._p.314


거기다 거짓말도 해야 합니다. 누구에게도 조사하는 진짜 이유를 밝힐 수도 없는 일입니다.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됩니다. 대장님의 용감한 행동에 대한 대가로 가족들이 강제노동수용소에 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대장님 역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게 제 제안입니다._p.321








_20120423~20120424




* 이미지 출처 및 참고 : 알라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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