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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독 ㅣ 귀족 탐정 피터 윔지 3
도로시 L. 세이어즈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1년 9월
평점 :
희한하게도, 스티븐 킹의 작품 하나에서 무려 조세핀 테이 그리고 도로시 L. 세이어즈라는 두 여류작가의 이름을 만났다.
역사 탐정을 언급하며 역사 소설에서는 꽤 이름이 높았던 조세핀 테이(의 또 다른 이름일수도,ㅎㅎ)의 이름은 직접적으로 등장했지만, 도로시 L. 세이어즈의 이름은 직접적인 언급 대신 그녀의 페르소나이자 소설 속 주인공인 피터 윔지 경을 통해 간접적으로 언급된다. 등장인물 중 한 명이 '피터 윔지 경'을 닮았다 어쩌고 저쩌고...
그 때만 해도(고작 한 달 전이다) 피터 윔지 경이 도대체 누구인가, 하고 고개만 갸웃거리고 말았는데, 알고보니 세이어즈의 작품 속 주인공이었다. 이럴 수가..ㅋㅋ
스티븐 킹은, 꽤나 미스터리의 황금기 시절 두 여류 작가의 활약을 좋아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뭐 도일 경도 크리스티 여사도 좋아했겠지. 큭큭.
어쨌든 꽤 낯선 두 여류 작가의 작품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나와 도로시 L. 세이어즈의 첫 만남은, 국내에 소개된 피터 윔지 시리즈의 세 번째에 해당하는 <맹독>이다.
이전에도 누명을 쓴 사람들은 항상 있었잖아요.
바로 그겁니다. 그땐 제가 없었기 때문이죠.
-p.77
그런데 또 희한하게도, 우연의 일치인지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과 <맹독>은 상당히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소설을 썼다는 것, 그리고 이번 작품 속에서 '탐정'이 할 역할은 '누명을 벗기는 것'이라는 것이다.
과연 <맹독> 속에서는 어떻게 누명을 벗길지, 이야기를 들여다봤다.
이야기는 법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추리소설 작가인 해리엇 베인은 '자유연애'를 했던 전 애인 필립 보이스를 비소로 살해한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된다.
추리 소설 자료 수집을 위해 비소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헤어진 뒤에도 필립은 구질구질하게(?) 그녀에게 계속 매달렸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악랄하게도 독살이라는 방법으로 남자를 살해했다는 범행의 잔혹성 등을 근거로 판사와 배심원들의 마음은 상당히 그녀의 유죄로 마음이 기울어 있다.
그러나 피터 윔지 경의 충실한 친구가 배심원단 속에서 다른 이들을 설득하며 끝내 보류 판결을 내린 뒤, 피터 윔지 경은 해리엇 베인의 누명을 벗겨주리라 결심한다.
왜?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버리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누명을 벗기는 것은 쉬워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범인이 아니라면, 진범의 범행과 그 증거를 찾아내도록 경찰을 설득해야 하고, 경찰 역시 해리엇의 혐의를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피터 윔지 경은, 강력한 용의자로 보이는 인물의 주변에 스파이를 심어 그의 범행 동기 그리고 필립 보이스를 독살한 방법을 찾아나서기 시작한다.
해리엇 베인은 정말로 무고한 피해자일까? 그녀의 누명은 벗겨질 수 있을까?
못 보고 지나친 게 있을 거야. 그게 다네. 어쩌면 아주 명확한 뭔가가 있어.
-p.371
도로시 L. 세이어즈는 당대 애거서 크리스티와 이름을 나란히 하며 추리 소설 작가로서 명성을 높였다고 한다. 1930년 추리 소설의 황금기를 이루었던 주요 작가들이 모여 결성한 추리 클럽(The Detection Club)에 도로시 L. 세이어즈 역시 참여했다고 하는데, <맹독>은 클럽에서의 첫 작품이라고 한다. 당시 클럽의 회원들은 추리소설을 쓰는 데 있어 엄격한 규칙을 만들었고, 이를 준수하는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 핵심은 '독자와 페어플레이를 해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당시 런던 탐정 클럽(추리 클럽)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선서를 했다고 한다.
귀하는 자신이 쓰는 추리 소설의 탐정이 의뢰받은 사건에 대하여 기술적이고 성 실한 자세로 추적할 것이며, 하늘의 계시, 여성의 직감, 맘보잠보의 신, 야바위, 우 연의 일치 등에 절대 의존하지 않을 것을 맹세 합니까?
귀하는 갱, 음모, 살인광선, 유령, 최면술, 초능력, 중국인, 광인 등에 의존하지 않으며, 영원히, 절대로 비과학적이거나 미지의 독약을 사용하지 않을 것을 맹세 합니까?
또한 킹스 잉글리쉬를 사용하며, 매상을 올리고 싶다는 이유로 이 맹세를 저버리 는 일이 절대로 없다는 것을 서약합니까?
그리고 이 <맹독>에서는 그 방법을 거의 철저히 따라가고 있다. 독극물에 대한 사전 지식이 독자의 입장에서는 조금 부족하다는 것이 조금은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지만ㅡ개인적으로 나도 그랬다. 아니 힌트를 주면서 이건 어떻게 알아! 하고.ㅎㅎ
실은, 범인의 윤곽은 초반 사건의 개요 이후 피해자의 주변을 둘러싼 상황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누가 봐도 '이 사람이 범인이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과연 어떤 방법으로 독살을 했는가? 가 이 소설의 최대 과제다. '누가'가 아닌 '어떻게'를 파헤친다는 것 역시 추리소설의 초창기에 갖춘 덕목이기도 하다.
작가가 조금씩 보여주는 힌트와 함께 피터 윔지 경을 따라 읽는 재미는, 바로 황금기에 쏟아져나온, '추리소설의 정석'을 그대로 따르는 미스터리를 읽는 즐거움과 같았다. 그 전형적인 영국 소설에서 엿볼 수 있는 대화라니!
뭐, 사실 구구절절 이야기하기엔 이야기가 그리 길지 않다. 피해자는 나타났고, 그 범인을 쫓아가는 추리소설 그 자체의 양식을, 그것도 독자와의 페어플레이를 위해 공정성을 띠며 전개를 해 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의외인 것은, 이토록 치명적이고도 끔찍한 <맹독>이라는 제목과는 달리 소설 속에는 유머와 낭만이 녹아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 피터 윔지라는 캐릭터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당시의 보헤미안적인 자유 연애를 즐기던 여성 추리 소설가에게 한눈에 반해버린 귀족의 신분인 피터 윔지,라는 구도에서 이미 그 낭만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야말로 '신분을 뛰어넘은 로맨스'가 시작된 것이다.
실은 대부분은 피터 윔지 경의 충실한 하인 번터와 '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는 '스파이용' 직원들 중 한 명의 활약,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추리라는 활약을 그려낼 뿐이고, 마지막에 이르러서 해리엇 베인은 그 모습에 흔들린다,라는 것 뿐이지만. 피터 윔지와 해리엇 베인의 본격적인 연인으로서의 모습은 다른 작품에서 만나볼 수 있다고 한다.^^
사실 그것이 아니라 가짜 강령술로 결정적인 정보 수집을 위해 남의 집에 숨어 들어간다거나, 속성으로 자물쇠 따는 법을 배워 스파이로 숨어든 사무실의 기밀 문서를 몰래 지켜보는 등의 활약이 훨씬 돋보인다. 그것도 여성들이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 역시 쏠쏠한 재미 중 하나다. 게다가 누가 봐도 '도로시 L. 세이어즈' 본인을 모델로 했음이 틀림없을 '해리엇 베인'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본인과 비슷한지는, 해설에서 친절히 만나볼 수 있다.
치명적인 '독살'이라는 사건을 둘러싼 진실을 파헤쳐가는 과정, 그리고 그 못지 않게 40대의 중후한 중년의 매력을 내뿜고 있는 피터 윔지 경에게 찾아온 로맨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한 '치명적인 맹독'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는 로맨스', 그 둘을 적절히 아울러 시작된 탐정의 활약을 그려낸 깔끔한 미스터리다.
더불어 또 하나의 클래식 작가와의 만남을 가졌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즐거운 일이다. 도로시 L. 세이어즈의 피터 윔지 시리즈는 또 나의 욕심 채우기 목록에 오를 듯하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