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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의 기준은 무엇인가? - 48편의 어른 동화
돈 후안 마누엘 지음, 서진 편저 / 스노우폭스북스 / 2024년 12월
평점 :
<선과 악의 기준은 무엇인가?>에는 13세기 스페인의 현명한 왕 알폰소 10세의 조카, 돈 후안 마누엘 왕자가 남긴, 48편의 어른 동화가 담겼다. 표지에서 제목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출판인이라 ’출판‘으로 말합니다’라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글로써, 책으로, 국민의 한 사람, 출판인에 걸맞은 방식으로 행동하고자 부족함을 무릅쓰고 출간합니다.”라는 멘트가 적혀있다. 2024년 대한민국 비상계엄, 12.3 사태를 맞고 출판사에서 바로 출간한 책으로 보인다. 그러고보니 오늘이 12월 31일 마지막날인데 벌써 28일이 지났다. 그 사이 참 많은 일이 있었고, 그는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이 어수선한 시국에 이 책을 내놓은 편집인의 의도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왜 하필 선과 악의 기준을 묻는 걸까? 라는 질문을 가지며 책을 펼쳐본다. 1282년 스페인 왕가의 일원으로 태어난 돈 후안 마누엘이 평민들도 읽을 수 있도록 스페인어로 기록하여 문학사에 남았다는 책이다. 원제는 ‘루카노르 백작의 이야기, El Conde lucanor’이며, 젊은 루카노르 백작이 현명한 조언자인 파트로니오에게 다양한 문제에 관한 조언을 얻는 방식이다. 계엄령 사태를 두고 방송국마다, 언론사마다 유투버마다 다양한 소식과 의견을 쏟아놓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는 리터러시가 필요하다. 바로 그 리터러시, 그 분별하는 지혜를 파트로니오에게서 찾아보면 어떨지, 스노우폭스 출판사에서 제안하고 있는 책으로 보인다.
첫 번째 이야기는 ‘인간의 가장 훌륭한 덕목은 ’수치심(부끄러움)을 아는 것!‘에 관한 내용이다. 루카노르 백작은 파트로니오에게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덕목이 무엇이오?”(p.23)라고 묻는다. 많은 덕목이 필요하겠지만 그 중에 이것만큼은 꼭 기억하고 실천할 수 있는 덕목을 알려달라 한다. 이에 현명한 파트로니오는 이슬람 국가의 술탄이었던 살라딘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는 예루살렘을 탈환한 왕으로 위대한 업적을 달성해낸 사람이었다. 그가 어느 날 한 기사의 집에 머물게 되는데, 그의 아내를 탐하게 된다. 그래서 그 기사를 먼 변방의 부대의 지도자로 임명한 후, 홀로 된 아내를 찾아간다. 하지만 지혜로운 여인은 살라딘에게 자신이 요구하는 한 가지 –“모든 덕목의 근원이자 으뜸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는 것”을 간청한다. 그러자 살라딘은 두 음유시인을 데리고 답을 찾고자 세상을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만난 지혜로운 노 기사는 ’부끄러움(수치심)‘이라고 대답해주자 살라딘은 바로 그녀를 찾아가고 말해준다. 그러자 그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서 최고의 덕목인 부끄러움을 실천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에게 요구하신 일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껴주십시오.”(p.37)라고 이야기한다. 바로 이 수치심, 이것이 그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부끄러움을 느껴주고 “사과해요, 나한테” 해주었으면 좋겠다.
“사람은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의지보다 부끄러움 때문에 더 많은 선행을 하게 되며, 반대로 부끄러움 때문에 원래 하고 싶었던 부당한 행동을 멈추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때 느끼는 부끄러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을 때의 부끄러움은 얼마나 좋은 것이며 필요한 것입니까!”(p.38) 부연하는 설명을 일고 있자니 이 ’부끄러움‘은 손가락질 하는 나, 역시 경계심을 잃지 않고 늘 생각해봐야 할 덕목이다.
이 에피소드 외의 47편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기도 하면서, 단순한 우화들이면서, 우리가 알고는 있었지만 점점 멀어져가는, 인간이라면 응당 가져야 할 기본적인 덕목들을 곱씹게 한다. 2024년의 끝자락에 이런 책을 읽는 행운을 누린다. 2025년의 나는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진 한 나라의 대표와, 그런 마음을 똑같이 가진 국민의 한 사람이 되어보고 싶은 소망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