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책꽂이】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05/02/16]
 
박용성 회장은 전문가 못지 않은 필력으로 기고를 하고 강연을 한다. 그의 강연과 기고는 곧장 언론과 여론의 화제를 불러일으킨다. 올해 설날을 맞이해 밝힌 경기 회복을 위한 ‘선물 주고받기’는 모든 언론이 주목했고, 지난해 11월 말 “국가보안법 등 4대 입법 대신 기업의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법으로 난리를 피우면 원이 없겠다”고 밝혀 정부에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해외 출장 중간 중간에 남긴 글을 모아 1990년대 중반에 자서전 ‘꿈을 가진 자만이 이룰 수 있다’(동아출판사)를 내기도 했다. 요즘에도 그는 언론에 간결한 논리를 바탕으로 한 글을 자주 남긴다. 그러나 본인이 모든 글을 다 쓰지 못한다고 솔직하게 밝힌다. “쓰려는 ‘사실과 내용’을 제시하면 예전에는 장남이 글을 고쳤고, 요즘에는 직원들이 매만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책에 대해서 겸손해 하지만 박 회장은 스스로 편집장이라고 여긴다. 출판사 두산동아를 운영하고 있고 매달 편집회의를 소집해 백과사전 키워드를 만들어 나간다. 두산이 네이버 홈페이지에 공급하는 백과사전 키워드가 11만4000개일 때부터 박 회장이 참여했고, 올해 키워드는 17만 개를 넘어섰다. 그는 100만 키워드를 만든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사진 애호가이기도 해 세계 5대륙에 걸쳐 찍은 사진을 개인 홈페이지(www.yspark.com)에 올려놓았다. 외국 박물관과 미술관 홈페이지를 방문해 수집한 수백 장의 그림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드러내 보인 것이다.

특정 분야에서 경지에 오른 사람을 만나 책과 인생 이야기를 듣는 것은 큰 기쁨이다.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어느 한 측면에서만 바라볼 수 없는 경영자이다. 박 회장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깊이 있는 활동을 펼치는 이가 또 있을까.

그는 나라 안팎의 공식 직함만 족히 60개가 넘는 마당발로 유명하다. 두산중공업 회장이면서 대한상공회의소와 국제상업회의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프로야구단 두산 베어스의 구단주인 그는 국제유도연맹회장,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다. 업계에서 인정하는 아마추어 사진가이기도 하다. 경제계와 체육계를 포함한 전방위에서 다양한 이력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는 국내 어느 CEO보다도 언론에 자주 오르내린다. 정부나 정치권을 향해 할말은 하는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다. 사회의 어느 분야도 그에게는 성역으로 남지 않는다. 때로는 시사평론가처럼 통쾌하게, 때론 전문의처럼 세밀하게 우리 사회의 각 분야를 진단한다. 다소 보수적인 상의 회장이 그런 태도를 지녔기에 사람들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더 깊은 카타르시스를 느끼는지도 모른다.

어느 새 체육계와 재계의 ‘미스터 쓴소리’로 자리한 박 회장을 만나러 서울 중구 남대문로에 있는 대한상공회의소 빌딩을 찾았다. 24층 회장 비서실에서 보는 서울의 풍경은 빛과 그림자가 동시에 펼쳐진 듯했다. 서울역을 드나드는 열차와 남산의 청명함에서는 한국호의 동력과 활기를, 그 뒤편의 퇴락한 가옥들에서는 정체감이 전해진다.

◆잡지 애독자=박 회장 방은 여느 회장실과 달라 놀라움을 선사했다. 개인과 법인 등 회원사만 4만5000개가 넘는 대한민국 재계의 당당한 축인 상의회장 집무실에 그럴 듯한 서가가 없었다. “나는 본질적으로 장서가가 아닙니다. 책을 선물받거나 사게 되면 탁자 위에 올려놓고 눈에 띄는 것들을 꺼내 봅니다.”

박 회장은 책을 본 뒤에 보관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한다. 어느 책이라도 읽게 되면 필요한 부분을 한번 살펴 보고, 회사 자료실에 보내거나 주변에 나눠 주는 편이다. 오히려 그는 책을 ‘학대하는 사람’이라고 겸연쩍어한다. “외환위기 당시 김정현의 ‘아버지’(문이당)을 읽은 이후 단행본을 제대로 독파하지 못했습니다. 단행본은 시간이 없어 잘 읽지를 못해요. 그래서 자주 보는 게 국내외 종합잡지와 업계 잡지들입니다. 요즘 잡지는 두께가 두꺼워 몇 부분으로 나눠 자가용과 화장실 등에서 틈틈이 읽어요. 책을 학대한다고 비난하더라도 별 수 없어요. 자리에 주저앉아 책을 볼 성격도 아니고, 그렇다고 책 읽을 시간을 별도로 내지도 못해요.”

듣기 좋게 자신을 포장이라도 할 수 있으련만 솔직하고 담백하다. 박 회장의 말이 아니더라도 마당발인 그가 시간을 내서 단행본을 읽기는 어려울 것 같다. “신문과 잡지의 제목만 보는 경우도 많습니다. ‘잡독(雜讀)’과 ‘다독’을 즐기며 간혹 카탈로그 잡지를 보는 것도 독서로 여길 정도지요.”

그나마 자주 보는 게 월간지다. 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월간지를 통해서 시사 흐름을 놓치지 않고, 중공업 등 전문 잡지를 통해서 업계 소식을 챙긴다. 요즘에는 전자우편을 통해 들어오는 참고자료와 뉴스레터도 넘쳐난다. “각종 연구기관에서 보내주는 자료만도 일주일에 수십건은 족히 됩니다. 필요한 자료만 편집해서 개인 우편함에 저장하곤 합니다.”

그러나 박 회장의 겸손은 실은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는 자신을 낮춰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낡은 것은 멸해 가는데 새로운 것이 오지 않을 때 위기가 온다”고 말한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그는 변화를 인지하고 활용하는 데 적극적이다.

잡지만 볼 뿐 제대로 책을 보지 않는다고 하지만 주변에서는 박 회장을 지독한 독서가로 표현한다. 두산동아 최태경 사장은 “박 회장은 손에서 책을 내려놓는 날이 없고, 외국 출장을 가면 꼭 방문국의 서점에 들른다”고 전했다. 출장 중 시간이 없으면 공항 구내서점이라도 찾아 방문지의 문화를 살핀다는 설명이다. 파편화되고 분업화된 지식과 기술을 뛰어넘기 위해 다양한 분야에서 정보와 지식을 얻고 있는 것이다.

거칠 것 없는 표현력을 지닌 그도 책에 관해 말할 때는 늘 겸손하다. “나는 책을 읽는 게 아니라 보는 편입니다. 때로는 그림만 보기도 합니다. OB맥주를 경영할 때는 주류 관련 책에 관심이 많았지만 지금은 건축 관련 책에 눈길이 갑니다.”

시간이 없는 박 회장이 책을 사기 위해 활용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주말에 나오는 종합일간지와 경제신문의 서평을 모두 모아 활용한다. 이들 자료를 바탕으로 교보문고에서 한 달에 50만원 정도의 비용으로 책을 구입한다. 또 하나는 사내 홍보실과 전문가 그룹의 추천을 받아 도서를 구입하는 것이다.

◆여러 책을 동시에 읽는다=그에게 ‘요즘 읽는 책이 무엇이냐’고 질문하면 쉽게 추천하지 않는다. 오히려 “피터 드러커와 빌 게이츠 등의 명저를 추천해야 하는데 제대로 읽은 책이 없다”는 식의 대답으로 웃음을 자아낸다. 그러나 다양한 분야의 글을 언론에 투고하고, 각종 행사에서 촌철살인의 풍자와 비유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가 책을 읽지 않을 리 없다.

박 회장은 특정 책을 정해 한 권을 독파하지는 않는다. 수십 권을 꺼내들고 필요할 때마다 각 책의 부분부분을 읽는다. “텔레비전을 시청할 때 이 프로그램과 저 프로그램을 넘나들며 시청하듯 책도 그렇게 볼 수 있지요. 그렇게 하면 필요한 부분이 훨씬 잘 들어옵니다.”

여러 드라마를 한꺼번에 보더라도 잔영이 짙게 남긴 장면은 있는 법이다. 2세 경영인으로 그는 현대그룹 형제들의 경영권 분쟁을 다룬 ‘나는 박수받을 줄 알았다’(세상의 창)를 의미 있게 읽었다. 2004년 5월 SBS 주최로 디지털 컨버전스의 실체와 추세를 진단했던 ‘서울디지털포럼’의 원고와 토론 내용을 보완해 엮은 ‘커버전스의 최전선’(미래 M&B)도 그의 손길을 자주 탄다.

그는 또 한국적인 책과 사진집을 즐겨 본다. 출간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살림)은 여전히 찾는 책이고, 지난해 나온 ‘한국을 버려라’(청림출판)도 재미있게 읽었다. 서울대 박물관에서 펴낸 ‘그들의 시선으로 본 근대’와 ‘조선의 왕릉’(가람), ‘답사여행의 길잡이’(돌베개)도 시간 날 때마다 펼쳐본다. 보수적인 곳에서 자유로운 생각을 끊임없이 피력하는 이 60대의 CEO는 느리지만 진득하게 성찰하게 만드는 책들에 관심을 두는가 보다.

인터뷰 말미에 “해외에서 단행본을 요약해 준다는 외국 회사의 광고를 본 적이 있다”며 “비슷한 업체가 국내에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관심을 표했다.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그에게 필요할 것 같아 국내에도 독서 요약 서비스 업체가 있다고 알려주자 이내 알아봐야겠다고 했다.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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