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은 공공재다” [05/02/10]
미·염·프 인문학 선진국
장기적 안목 공적차원 투자
대학밖으로 실용학문 구축
“인문학의 위기는 한국사회 위기의 총체”라는 연구진의 판단은 의미심장하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물결이 유독 한국에만 몰아닥치는 것이 아님에도, 한국 인문학은 대책없이 무너지고만 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시장논리의 첨병이라 할만한 서구의 사례는 그런 점에서 부럽기 그지 없다. 이들 나라들은 “인문학이 지니는 공공재로서의 성격에 주목해 일찍부터 정부 또는 공적 차원의 인문학 지원체계를 구축”했다. 이는 “여러 실용학문의 뿌리를 튼튼하게 하는 동시에, 창조적 사고와 다양한 견해들이 살아숨쉬는 사회적 분위기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문제해결능력을 고양시키는 것”이다. 멀리 내다보는 국가 차원의 투자가 선진국 인문학의 ‘체질’을 강화시킨 셈이다.
미국은 이미 1965년 ‘국립인문재단(NEH)’을 설립했다. 한국의 학술진흥재단과 다른 점은 이 재단이 학계의 연구만 지원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 국립인문재단은 대학의 인문학 연구는 물론 일반시민들의 인문·문화 관련 활동을 지원한다. 인문사회연구회 연구진들은 이런 사례를 본받아 “문화관광부의 시민대상 문화업무와 교육부의 대학연구지원 기능을 통합하는 ‘인문정책연구원’을 설립”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인문학을 고루한 상아탑에 가둬놓지 말고, 시민에게 그 성과를 돌려서 새로운 자양분을 얻자는 것이다.
문학·사학을 비롯한 인문학의 여러 분야의 ‘컨텐츠’를 직·간접적인 ‘문화 수출품’으로 만들고 있는 영국도 인문학 중흥의 중요성을 웅변하는 사례다. 영국도 문화예술과 인문 영역을 한데 묶은 ‘예술인문연구소(AHRB)’를 설치하고, 이를 중심으로 각 인문학의 깊이를 넓혀가고 있다. 특히 예술인문연구소는 인문학계를 ‘지도’한다는 점에서 눈에 띈다. 매년 중점 연구분야를 정하고, 이에 대한 팀 연구를 장려하는 동시에, 그 성과를 디지털화시켜 곧바로 ‘문화 컨텐츠’로 변모시키고 있다. 오랜 전통을 바탕으로 인문학 분야에서 ‘자생적 경쟁력’을 확보한 유수의 대학들과 조화로운 상생관계를 구축한 셈이다. 연구진들은 “연구지원기관들이 행정가들로 구성돼 인문학에 대한 ‘지도’ 기능을 감당하지 못하는 한국의 경우와 뚜렷이 대비된다”고 지적했다.
세계 인문학의 또다른 산실인 프랑스는 ‘국립학술연구원(CNRS)’을 통해 다양한 학문분야간의 교류 활성화를 이뤄낸 경우다. 국립학술연구원이 실시하는 각종 연구 프로그램은 학문간 장벽은 물론 국적을 가리지 않는 여러 연구자들의 상호교류와 공동연구를 뼈대로 한다. 모든 연구결과는 웹사이트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공개된다. 연구진들은 “학제간 연구는 인문학이 보다 높은 현실적합성을 가지면서 사회과학, 자연과학과 함께 더 높은 수준의 발전을 이루는 데 도움을 준다”고 짚었다.
이밖에 교수평가 제도에서도 배울 게 적지 않다. 미국은 부교수 승진 때 대단히 엄격한 심사를 실시하지만, 이후엔 개인의 장기적 연구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하고 있다. 정부가 연구역량을 평가하는 영국도 조교수 재직 6년 동안 쓴 4편의 논문만을 교수 승진 심사 자료로 사용한다. 인문학의 미래는 ‘양’이 아니라 ‘질’에 있으며, 이는 멀리 내다보는 투자에 있음을 웅변하는 셈이다.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