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사람을 만들게 하려면…  [05/02/04]
 

‘책이 없다면 신도 침묵을 지키고 정의는 잠자며 자연과학은 정지되고 철학도 문학도 말이 없을 것이다.’

서울 지하철 전동차에는 이런 표어가 붙어 있다. 책의 역할과 중요성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출판인들이 이 표어를 본다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책 만드는 일에 보람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첨단기술의 발달과 함께 인터넷에는 요즘 온갖 정보가 넘쳐 나지만 책은 여전히 지식 전달과 사고능력 향상에 없어서는 안 될 정신의 인프라임에 틀림없다. 출판인들이 단순한 장사꾼이 아니라 영혼을 위한 문화상품 생산자라는 소명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몇몇 출판사 사장에게 이 표어 얘기를 했다. 대부분 반기기보다는 지금처럼 출판계 불황이 계속되면 책 만드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기는커녕 회사 유지도 어려울 지경이라고 한탄했다.

이들의 걱정이 엄살만은 아닌 듯하다. ‘단군 이후 최대의 불황’이라는 출판계의 상황은 수치로도 입증된다. 지난해 출판 통계를 보면 총발행 부수가 2.2% 감소했다. 대형 서점의 대표주자인 교보문고는 개점 23년 만에 처음으로 매출 감소를 기록했다. 동네 서점들의 어려움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출판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출판인 스스로가 나서야 한다. 사재기를 통한 베스트셀러 조작 의혹, 잘 팔리는 책 따라 내기, 인문서 외면과 실용서 치중, 손쉬운 번역출판 의존 같은 출판계의 고질이 산적해 있지만 출판인들은 아직도 정부의 지원 부족 등 남의 탓만 하고 있다.

게다가 24일 열리는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 회장 선거를 앞두고 출판계는 요즘 내홍을 겪고 있다. 출판사 사장 40여 명이 출협 개혁을 요구하는 선언을 했으나 명의도용 시비 등 부작용이 일고 있다. 단행본 출판사와 교재 전집류 출판사 간의 골 깊은 갈등 양상도 재연되고 있다.

출판인들은 집안싸움을 접고 어떤 책을 만들 것인가부터 고민해야 한다. 시대정신을 리드하고, 읽는 이의 욕구에 맞는 책을 만든다면 왜 독자들이 외면하겠는가.

1980년대 군부독재 시절, 이른바 사회과학 출판사들은 시대 변화에 한몫 했다. 사회 비판적인 책으로 386세대 대학생들에게 민주화와 사회변혁에 대한 열망을 심어 준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 공산권 붕괴 이후 출판계가 우리 사회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데는 그리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 때문에 1980년대 사회과학 출판이 ‘좌파 상업주의’에 그쳤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정치권의 386세대는 좌파 상업주의 출판의 대표적인 피해자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 서적에 빠져 대학 시절을 보낸 이들은 졸업 후 시대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탓에 아직도 수구 좌파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책은 나라의 문화수준을 보여 주는 중요한 척도 중의 하나다. 출판인들은 더 늦기 전에 좋은 책, 꼭 필요한 책을 만드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 않던가.


(동아일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