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펼치며] 투철한 작가주의 산물

지상으로 올라온 만화

나이 서른을 넘긴 독자분들 가운데는 아마 만화방에 얽힌 추억 한두가지 안가지고 계신 분은 없을 겁니다. 텔레비전이 귀했던 때에는 만화 몇 권을 보는 대가로 축구중계를 볼 수 있는 곳이었고, 변변한 놀이시설이 없던 때라 학교가 파한 후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세상물정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던 어린 시절, 만화방은 만화를 통해 바깥세상를 체험하게 하는 터전의 역할도 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때때로 만화방은 선생님들이 학생들 단속을 위해 몰래 급습을 하는 '불량한 공간' 구실도 했습니다. 또래에 비해 조숙한 동네 형들이 구석에서 개비 담배를 돌려 피웠고 불량식품을 맛 볼 수 있는 곳이었던 까닭입니다.

이런 이유로 부모님들은 자식들이 만화방에 가는 것을 꺼려했고 덩달아 만화는 좋지 않은 책이라는 딱지가 붙은 적도 있습니다. 이런 지적이 딱히 틀린 것은 아니어서 옛날 만화 중에는 미처 거르지 못한 '상스러운' 표현도 자주 나왔습니다.

저는 지금도 만화를 아주 좋아합니다. 집에서 뒹굴거나 생리현상을 해결하러 갈 때는 꼭 만화책을 찾습니다. 요즘은 허영만씨의 '식객(食客)'이라는 단행본을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첨에는 단순한 만화려니 생각했는데 보면 볼수록 감탄이 나옵니다. 내용의 치밀함 때문입니다. 만화가 아니라 숫제 음식 관련 전문서적이라 부를 만합니다.

허씨는 '대령숙수(待令熟手-조선시대 왕궁에서 왕실인사의 음식을 담당한 남자 요리사)' 이야기를 그리기 위해 수많은 관련자들을 만나면서 자료를 얻고, 생태탕 소재를 찾아 고깃배를 직접 타는 수고로움도 감내합니다. 숯불갈비의 정확한 고증을 위해 작업실에서 직접 불을 피우는 바람에 화재가 난 줄 알고 이웃 사무실 사람들이 대피하는 소동도 겪습니다. 자연히 만화의 내용은 풍부해지고 읽는 사람의 지식욕을 알차게 채워줍니다.

이원복씨의 '먼나라 이웃나라' 시리즈는 또 어떻습니까. 예외없이 저자의 박식함과 철저한 분석이 돋보입니다. 우리나라 만화의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렸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겁니다. 1981년부터 시작된 이 만화는 1987년 단행본 초판이 나온후 현재까지 국내에서만 1000만부 이상이 팔렸다고 합니다. 일본 중국 대만 태국 등에 수출되고 있으며 미국 진출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먼나라 이웃나라'는 최근 열두번째 책인 '미국 3-대통령 편'을 끝으로 20여년간에 걸친 긴 여정을 마감했습니다.

이씨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애지중지 키워온 아이들을 결혼시켜 보내는 마음"이라는 말로 시원섭섭한 감정을 털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다작을 할 수 없었던 이유로 세계 각국의 역사와 문화를 다룬 만화를 그리려고 일일이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하다보니 시간을 낼 수가 없었던 점을 들었습니다.

이들 작가에게서 철두철미한 프로의 냄새가 풍기지 않는지요. 저는 감히 우리 만화의 희망을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허씨나 이씨 같은 만화가들이 우리나라에는 적지 않습니다. 이제 만화에게 일방적으로 불량도서라는 '주홍글씨'를 붙이는 일은 삼가는게 옳은 일인 듯합니다.


(국제신문 염창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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