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출판부, 권위 빼고 대중곁으로  [05/01/30]
 
세계 어느 나라건 미래 사회의 모습은 대학가의 풍경 변화에서 잘 파악된다. 2005년 한국의 변화 모습도 대학 캠퍼스에서 먼저 느껴진다. 지식의 요람이라는 대학가의 겨울은 마냥 을씨년스럽다.

미취업이 일상화하고 생산적인 논쟁이 자리를 비켜준 사이에 낭패감과 열패감이 캠퍼스 공간을 야금야금 잠식해 온 게 벌써 몇 해째이다. 그러나 대학가가 지금 변화의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것도 대학 구성요소 중에서 가장 변화할 것 같지 않던 출판부가 변화의 고동 소리를 내고 있다.

대학 모퉁이에 자리했던 대학 출판부는 지금 ‘치열한 변화’를 몸소 체험하고 있다. 그동안 각 대학 출판부는 모교의 일부 교수가 상업출판사를 통해 책을 내며 ‘장안의 지가’를 높일 때에도 부러운 시선을 보내지 않을 만큼 현실에 안주해 있었다.

대학 출판부가 어떤 곳인가. 대학 부속기관으로 학위논문 편집과 별반 다를 게 없는 학술서나 교재를 만드는 관행에 젖어있던 곳이다. 학자적 양심과는 별개로 권위 있는 장막 뒤에서 일반 독자들은 물론 학내 구성원인 대학생들조차 이해 못할 책을 출간하고는 자족하는 일이 일상화돼 있었다.

그런데 그 대학 출판부가 대중 출판사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루자며 경쟁의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지난 연말 서울대학교 출판부가 ‘베리타스’ 시리즈를 내놓고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가 각종 대중서를 선보이자, 언론과 독자들은 ‘노처녀의 결혼 소식을 접한 부모의 심정’처럼 이를 반겼다.

고고한 구석에 자리한 채 일반인들과는 일정하게 거리를 둬 왔던 대학 출판부가 일반 단행본을 내면서 대중과의 접촉 밀도를 높이는 현장을 찾았다. 방송통신대 출판부와 서울대 출판부 등이 전하는 대학 출판의 변화하는 모습은 ‘낯설지 않은 기쁨’의 현장이었다.

지난해 5월 기존 출판부 안에 ‘지식의 날개’라는 독립 브랜드 출판팀을 꾸린 한국방송통신대학은 변화된 대학 출판부의 모습을 잘 나타낸다. 방송대 출판부는 그동안 수십만 학생의 수업 교재를 독점 공급하면서 교재 출판부로 인식돼 왔다. 그런 방송대가 ‘지식의 날개’ 출판사를 차린 것은 고답적인 대학 출판의 관행을 바꾸고 선도해보겠다는 의지의 산물이다. 방송대가 독립 브랜드의 출판사를 차린 것은 일반대 출판부와 달리 성인 학생들도 많고 일반 대중들이 낯설어하지 않은 이미지를 가진 것도 도움이 됐다.

‘지식의 날개’는 지난 9개월 동안 글로벌 기업의 현지화 전략을 다룬 ‘빅맥이냐 김치냐’와 세계적인 비즈니스 리더 55인의 성공 방식을 담은 ‘최고는 무엇이 다른가’ 등 10권의 책을 내놓았다. 출판사는 번역서 소개에 그치지 않고 ‘엽기·패러디 시대의 한국문학’이라는 국내 저자의 작품도 소개해 출판 대상의 범위를 넓혀 왔다. 물론 독자들의 반응은 호의적이다.

방송대는 책 판매 수익금의 1%를 한국복지재단을 통해 소년소녀 가장 돕기에 지원하고 있어 책을 사는 독자들도 나름의 자부심을 느낀다고 밝힌다. 독자들의 반응이 괜찮자 출판부는 올해 발행 건수를 지난해의 배 이상으로 늘려 명실상부한 독립 브랜드로 키운다는 내부적 합의를 이뤄 낸 상태다.

대학 출판부의 변화는 방송대에서만 확인되는 게 아니다. 각 대학 출판부는 이제 상호 영향을 미치며 한국 교양문화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서로 자극을 주고 있다.

국내 최대 대학 출판부를 가진 서울대도 적극적으로 독자에게 다가서고 있다. 서울대 출판부는 교양학술 도서로 대중과의 거리를 좁힌다는 목표로 ‘베리타스’ 시리즈를 기획하고 지난 연말 1차로 4권을 출간했다. ‘영화 속의 문화’ ‘역사 속의 의인(醫人)들’ ‘시간을 찾아서’ ‘스포츠 손자병법’이 그 책들이다.

학술적인 것보다는 문화와 예술, 디자인, 스포츠, 건강, 환경, 역사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 책을 출판 대상물로 삼았다. 서울대 재직 교수들이 출판기획회의에서 주제를 정하고 전공 학생들이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책을 펴낸 것이라 더욱 의미가 깊다. ‘스포츠 손자병법’을 내놓은 체육교육과의 나영일 교수는 “전쟁과 스포츠가 경쟁이란 차원에서 비슷한 점이 많아 ‘손자(孫子)’를 스포츠 측면에서 풀어봤는데 독자들이 좋아하는 것 같다”고 밝혔다.

이화여대 출판부의 변화 모습도 눈부시다. 자매 출판사 ‘글빛’을 독립 브랜드로 가진 이화여대 출판부는 지난해 14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중견 출판사의 대열에 당당히 합류했다. 이대 출판부는 ‘한국 문화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시리즈물 국문판 100종, 영문판 100종을 주제별로 5년 동안 지속적으로 내놓을 계획이다. 지난 1월 초에 ‘한국사 입문’과 ‘노리개’ 등 시리즈물 1차분을 내놓고 독자들의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 외에도 고려대 연세대 한국외국어대 성균관대 건국대 경북대 부산대 등 전국 주요 대학의 출판부가 상업출판사와 경쟁에 나설 태세를 단단히 갖추고 있다.

대학 출판부는 기획출판과 번역서 소개에 출판계 어느 조직보다도 능동적, 창의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조직이다. 학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다양한 공급자들과 그 공급자들이 내놓은 책을 기꺼이 읽어줄 학생으로 대표되는 수요자 집합은 어느 출판사보다 유리한 조건에 놓여 있다.

물론 대학 출판부가 무조건 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상업출판사가 감히 담당할 수 없는 영역에서 그 고유한 역할을 앞으로도 담당해야 한다. 일례로 한국외대가 발행하는 세계 각국어 사전은 상업출판사는 쉽게 손댈 수 없는 우리 문화의 든든한 보고다. 이 같은 작업을 위해서는 학내 구성원인 교수 인력을 적극 활용하는 한편 대학 본부나 동창회 차원의 재정지원을 적극 모색해 경영 압박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전문적 지식을 담은 출판물 출간이라는 영역에 발을 걸치면서도 ‘지식 대중화에 나서라’는 주장은 내부에서부터 나온다. 대학생들은 “교수들이 출판부에서 만들어 낸 책은 학내 판매용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며 “시중의 일반 도서들처럼 읽으면서 배울 수 있는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변화하는 세상만큼이나 대학 출판부가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잘 팔리는 책’과 ‘좋은 책’ 이라는 갈림길에서 항상 선택을 강요당하는 출판인들의 모습이 대학 출판부에서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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