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과 보편성  [2005. 1. 25]

[시대의 흐름에 서서] 노벨문학상과 보편성

그전에도 더러 받은 질문이지만,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시회의 일에 참여하면서 다시 한번 자주 받는 질문이 노벨문학상 수상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도서전의 주요 행사를 통해 한국문학이 독일과 유럽에 크게 진출할 것이고 그와 관련해 노벨상 수상의 가능성이 크게 커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그 배경에 있는 것은 이제 한국도 세계 국가 공동체의 떳떳한 일원이 되었고, 그 사실에 대해 세계적인 인정이 있어야 마땅하다는 느낌일 것이다.

-서구적 가치부합 수상 유리-

노벨상에 관한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농담 비슷하게 도대체 그것이 받을 만한 상인가 하고 거리를 두고 생각할 정도로 여유가 생길 때 받을 것이라고 말해 왔다. 또는 시카고 대학의 심리학자 칙센티미하이 교수가 노벨상 수상자에 대한 연구서에서, 노벨상 수상자들이 상보다는 계속되는 연구가 보람있고 의미있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전한 보고를 들어, 중요한 것은 외적인 인정이 아니라 자기 충실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의 여러 정황으로 보아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불원간에 나오고 말 것이다. 여기에 대해 조급하게 묻고 답할 필요가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 문제를 잠깐 생각해보는 것은 우리의 문화적 상황을 되돌아보는 의미는 가질 것이다.

노벨상을 수상할 만한 문학작품은 세계 여러 사회 여러 층의 독자에게 또는 여러 배경의 심사원에게 호소력을 가져야 하는 만큼, 세계문학으로서의 보편성을 지녀야 한다-흔히 말하여지는 이러한 생각은 과히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다만 이 보편성은 여러 가지로 생각될 수 있는 것이다. 우선 현실에 기초하지 않은 보편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주의적 입장이 있다. 그 관점에서 보편성이란 오늘 세계의 패권적 질서를 반영하는 어떤 기준을 말할 뿐이다. 수상에 로비와 판촉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은 이 현실주의를 조금 더 냉소적으로 취하는 또 다른 하나의 입장을 나타낸다.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현대적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 서구라고 할 때, 문학에 있어서도 서구 전통에 서 있거나 서구적 모범을 채택한 작품들이 문학의 보다 보편적인 기준에 맞는 것으로 생각되기 쉬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현실에 있어서 비슷하게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이나 작가가 경합이 되는 경우 더 유리한 것은 서구나 미국의 작가이기보다는 비서구의 작가일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보다 넓은 시각으로 오늘의 문학을 바라보려는 노력이 패권의 세계에도 존재한다는 증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각 안에서도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문제의식은 구미의 관점에서 정리된 것일 수 있다. 그것은 그 나름의 세계 의제를 가지고 있다. 보편적이란 그 의제에 맞아 들어간다는 것을 말한다.

-인간존재 자발성 호소력 커-

물론 문학의 우열이 반드시 어떤 의제의 범위 안에 있는 주제에 의하여서만 결정된다는 말은 아니다. 많은 것은 이야기와 표현의 절실함으로 결정된다. 그러나 표현의 수범에도 서구적 관점은 작용한다. 이러한 의제에 관계되는 것일 때 보다 보편적 내용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기 쉽다. 인권의 문제나, 인종적·정치적·종교적 분쟁 등을 주제로 가진 작가들이 상을 받은 예를 우리는 상당수 떠올릴 수 있다. 오늘날 어떤 사회가 부딪친 문제를 분석하는 데에 흔히 사용되는 개념적 도구인 계급, 인종, 성, 종교, 빈곤, 환경 파괴 등의 개념들도 서구적 발상에 이어져 있다. 이러한 개념들의 힘은 그 보편적 타당성에서 온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도 타당한 사회 이해의 수단이 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서구적인 가치 체계 속에서 쉽게 공명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은, 시대적 편향성을 피하기는 어렵지만, 문학의 세계적 평가 기준에 참다운 보편성이 작용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는 하나 보편성의 처방에 따라 쓰인 작품이 좋은 작품이 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문학의 진정성은 처방이나 의식적 고안을 넘어가는 데에서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인위적 구성을 넘어가는 인간 존재의 자발성을 보여줌으로써 참다운 호소력을 갖는다. 자폐적 심성이 천재의 특징의 하나라는 심리학의 연구가 있지만, 진정한 작가도 대체로 자신만의 관심과 표현에 자폐적으로 집착하는 면이 있다.

이것은 옹고집의 자기중심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집착이란 주어진 주제에 집중하는 능력과 훈련을 말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필요한 것은, 자신만의 주제를 보다 넓고 많은 가능성 속에서 검토하는 일이다. 작가가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는 경우 그는 보편적인 세계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는 사회의 문제에 전념하지만, 단지 그것을 보다 보편적인 문제의 지평에서 살피는 것이다. 이 지평은 오늘의 세계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많은 범례들이 구성하고 동시에, 골똘한 생각 또는 창조적 상상력이 열어 놓을 수 있는 삶의 가능성 일체를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주어진 삶의 현실 속에 그대로 들어 있는 가능성이다.

-다원화사회 성숙 이후에-

이것은 작가가 적어도 그 마음의 한쪽에서 사유의 보편성에 스스로를 맡기고 그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정해진 선악의 구도나 이념의 틀에 사로잡힌 작품이 진정한 보편성을 가진 작품으로서 성공하기 어려운 것은 그것이 이러한 사유의 모험을 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일체의 선악의 기준, 현실 이해의 추상적 체계가 없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구체적인 상황의 열린 가능성에 부딪칠 때, 해체되고 재구성됨으로써 다시 태어난다. 물론 이러한 재구성의 실험이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세상에는 관점에 따라서 얼마나 많은 선이 있을 수 있는가. 또 관점은 얼마나 많을 수 있는가. 헤겔은 두 개의 선이 양립할 수 없는 모순 속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을 비극의 정의로 삼았다. 또는 그의 생각을 다시 빌려, 구체적인 현실의 과정에서, “최대의 정의는 최대의 해”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관용과 동정 그리고 결단의 필요에 대한 실존적 진리는 확인된다.

이러한 생각의 모험은 모든 깊은 사상에는 물론 문학적 성취에도 들어 있는 것이지만, 이것은 유독 서구와 현대의 산물로 볼 수도 있다. 서구의 근대적 발달이 가져온 사회의 다원화가 삶과 그 표현의 다원성을 생각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한국에도 노벨상이 돌아올 때가 됐다는 느낌은 우리가 서양이 만들어 놓은 현대 세계에 진입하였다는 느낌에 병행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당면한 문제들을 현실의 넓은 변증법 속에서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것은 사회와 정치에서도 그러하지만, 문학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이런 점으로 판단하건대, 노벨상이 우리 차례에 돌아오는 것은 조금은 더, 그러나 너무 오래는 아니게, 기다려야 할 것이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경향신문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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