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펼치며] 술 취함은 작은기쁨, 책에 취함은 큰기쁨 [2005. 1. 20]

지금은 개인적인 이유로 술을 멀리합니다만 저도 한때는 말술을 마다하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다. 막걸리 서너말을 지고 갈 수는 없어도 먹고 갈 수는 있다는 말을 흔들림없는 진리로 받들었습니다. 근데 저는 사물에 어두운 무지렁이인 까닭에 술에 취할 줄만 알았지 이를 계기로 자신을 추스를 수 있는 지경에는 오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뜬금없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냐 하면 최근 한양대 정민 교수가 쓴 '죽비소리'(마음산책)란 책에서 뒤통수를 두들겨 맞는 듯한 글들을 본 때문입니다.

'대저 사람의 취함은 어떻게 취하느냐에 달린 것이지 반드시 술 마신 뒤를 기다릴 것은 없다. 붉은 꽃과 푸른 잎이 눈앞에 어질어질하면 눈이 혹 꽃과 버들에 취한다. 곱게 단장한 여인이 정신을 어지럽게 하면 마음이 혹 어여쁜 여인에게 취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책이 사람을 달콤하게 취하게 하며 몽롱하게 만드는 것이 어찌 한 섬이나 다섯 말 술만 못하겠는가'.

조선 중기의 문인 이옥 선생의 '묵취향서(墨醉香書)'에 나오는 글이랍니다.

정 교수는 '술 먹고 취하는 것만이 취하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여인의 자태에 취하는 것도 취하는 것이지만 이토록 책에 달게 취해 몽롱한 흥취를 느껴보는 것이야말로 정말 거나하게 취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매일 술에만 취하고 여색에만 취하는 주정뱅이 호색한은 이 거나한 흥취를 알 길이 없으리라'는 주석을 달아 놓았습니다.

뼈마디가 섬뜩하지 않는지요. 저는 다섯 말 술을 먹고 갈 궁리만 했고 그냥 대책없이 취할 생각만 했지 책을 읽어서 다섯 말 술에 취한 것만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송시열 선생은 '서화상자경(書畵像自警)'이란 글에서 처절한 책읽기 자세를 보여줍니다.

'고라니와 사슴의 무리. 쑥대로 지은 집. 창 밝고 사람은 고요한데 배고픔을 참고서 책을 보노라'라고 썼습니다. 그대로 자리에 앉아 책만 읽으며 한 생을 마치리라는 비장한 각오가 엿보이는 듯합니다. 딴은 고등교육을 받았답시고 책읽기를 과시용으로 여기는 저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자세입니다.

김굉 선생은 또 어떻습니까. 선생은 '책 속에 엄한 스승과 두려운 벗이 있다. 읽는 사람이 진부한 말로 보아버리는 까닭에 마침내 건질 것이 없을 따름이다. 만약 묵은 생각을 씻어 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가만히 보면 넘실대는 성인의 말씀이 어느 것 하나 질병을 물리치는 영약이 아님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눈 앞의 영약을 던져두고,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처방만 찾아 이리저리 우루루 왔다갔다 했다는 반성이 듭니다. 배울 자세는 갖추지 못한 채 '저 책은 너무 관념적이야' '요즘 책은 알맹이가 없어' 등 갖가지 이유를 대면서 책을 멀리한 것도 부끄럽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학문에만 몰두했던 조선시대의 유생들과 현대사회 구성원들을 단순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고 또 모두가 목숨을 걸고 책읽기를 할 필요는 없다라는 자위를 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선인들의 저런 자세만큼은 꼭 따라하고 싶다는 생각은 감출 길이 없습니다.

(국제신문 염창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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