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유감  [05/01/18]
 
어느 신문사의 신춘문예 시상식에 갔다. 희곡 부문 심사를 맡은 이유도 있었지만 신춘문예에 관계된 과거의 한 충격적인 사건을 떠올리며,이제 막 작가로 입문하게 된 팔팔한 글쟁이들의 상기된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었다.

그 날,사회자가 소설 부문의 수상자를 호명하자 가슴에 꽃을 단 여자가 연단에 올라가 인사를 하고는 곧이어 수상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식장이 소란해지더니 상을 받으려는 여자가 시상식 관계자들에 의해 식장 밖으로 끌려 나갔다. 진짜 수상자는 따로 있는데 엉뚱한 사람이 선수를 치며 수상자 행세를 한 것이었다.

근 20년이 지난 오래 된 일이지만 강제로 연단에서 끌려나오던 그 여자가 “내가 당선자야” 하며 절규했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식장의 분위기가 숙연했던 점도 인상 깊었다. 한 사기꾼의 난동을 본 것이 아니라 열병을 앓는 문학도의 비명을 들은 느낌이었다. 신춘문예에 여러 번이나 응모했지만 계속 고배를 마신 뒤 정신적 착란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글을 쓰는 일은 때로 독배를 들고 죽음에 이르는 일만큼이나 자멸의 경험을 겪게 하는데,그런 시련 속에 엮어낸 글이 선택되지 못하자 절망감에 환각을 느꼈을 것이다. 당선의 영광을 갖지 못한 좌절보다는,도달할 수 없는 욕망을 포기하지 않은 작가의 자괴감이 폭발한 일이라고도 생각된다.

그런데 요즘의 신춘문예 시상식장에서 결코 그런 소동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씁쓸한 기분으로 확인하였다. 신춘문예에 청춘을 걸고 덤벼드는 예비 작가도 줄어들었고 당연히 시상식이 열리는 식장의 분위기도 무덤덤하다.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일이 작가가 되는 길이라고 여기지 않을 뿐 아니라,문학 내에서조차 느닷없는 스타의 탄생을 반기고 글을 쓰는 일에 고전적 단계를 밟는 것이 남루한 절차로 여겨지기도 한다.

문화계의 커다란 행사이던 신춘문예가 언제부터인가 뒷전으로 밀려나 아예 신문지면에 당선작을 싣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어쩌면 앞으로 신춘문예라는 장치가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희곡을 배제하는 신문사도 늘다보니 그나마 몇몇 언론사에 희곡 분야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연극인 입장에서는 고마워해야 할 일이 되었다.

아무나 쓸 수 있는 글쓰기의 자유와 남용이 넘치는 공간이 존재하고,즉물적이며 인상적인 단상에 동질감을 느끼는 전자 매체 독자들의 위세에 언론은 시대의 요구를 수용한다. 그러나 활자문화의 퇴락으로 문학의 위기가 오고 영상문화에 치여 연극이 사멸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어깨를 짓누르며 현실로 다가와도,문단이나 무대는 영원히 가라앉지 않는다. 침체 속에서도 새로운 견고한 작품이 태어나고 매력을 느끼는 작품을 향한 독자나 관객들의 응원은 창작자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어준다.

이 글을 쓰는 중에 일본의 신춘문예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일본에서는 텔레비전에서까지 나서며 신춘의 신예작가를 격려하고 여전히 떠들썩하게 축하행사를 한다고 한다. 작가를 중시하는 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면 문학을 상품으로 포장해서 파는 상술의 다른 얼굴일 수 있지만,아무튼 신춘문예가 사라지지 않는 역사라는 점이 부럽다. 지난한 우리의 문학사도 숱하게 많은 작가들을 배출했고 ‘문학청년’이라는 이제는 고어가 되다시피 한 오래된 정서를 지닌 말이 신춘문예 덕분에 더 많이 회자되곤 했다. 당연히 신춘문예는 건강을 지키며 문학을 등에 업고 끄떡없이 계속 가야 한다.

문득 궁금하다. 그날 그 해프닝을 벌이며 “내가 당선자야”를 외치던 과한 순정으로 신춘문예의 벽을 넘고 싶어 했던 그 사람이 지금도 문학을 놓지 않았는지.


(한태숙 연출가·극단 물리 대표)=국민일보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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