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펼치며] "TV를 끄니 책이 보이네"   [2005. 1. 12]

인간의 잔인함이란 끝이 없는 것인지, 요즘 저의 관심사는 온통 이종격투기에 쏠려 있습니다. 눈 찌르기나 급소차기 등 몇가지만 제외하고는 모든 기술이 허용되는 이종격투기는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파괴본능을 자극하는 가장 짜릿한(?) 경기인 듯 합니다.

그런데 제게 생긴 문제는 이종격투기 경기가 공중파 방송에서는 중계가 안되고 위성방송이나 케이블로만 시청이 가능하다는 데 있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도 볼 수는 있으나 실시간 중계가 되지 않는 단점이 걸렸습니다. 결국 이종격투기의 묘미를 제대로 즐기려면 별도의 돈을 들여 방송시스템을 들여 놔야 하는데 이 비용이 만만찮아 선뜻 결정을 내리기가 힘들었습니다. 근데 잘 아는 직장 후배가 자기의 집에 설치된 위성방송기구를 저에게 건네주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귀가 솔깃해 그 이유를 물어보니 "가족들을 위해서"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하릴없이 리모컨으로 채널 검색이나 하다보니 자신에게나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화는 그 정도로 끝났습니다만 돌아서서 생각을 해보니 조금 머쓱해졌습니다. 그러면서 후배가 참 대견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의 경우, 지금도 퇴근을 한 뒤 집에서 쉴 때면 아무런 생각없이 리모컨을 붙잡고 "뭐 재미있는 프로그램없나"하면서 TV에 매달리기 일쑤인데 케이블 방송까지 들어오면 그 정도가 더욱 심해질 것 아니냐는 걱정도 떠올랐습니다. 이거, 제가 세상을 잘 못 살고 있는거 아닌가 하는 우려마저 머리를 스쳤습니다.

얼마전 교육방송(EBS)에서 'TV가 나를 본다―20일간 TV 끄고 살아보기'란 프로그램을 방송한 적이 있었습니다. 20일 동안 131가구가 TV를 끄고 생활하며 달라진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것입니다.

결론은 명쾌했습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부터 TV를 보기 시작해 밥을 먹거나 숙제를 할 때도 TV에서 눈을 떼지 않던 아이들이 TV를 끄고 나니 부모와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책을 보는 시간도 늘어났습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TV를 안보면 책을 읽게 될 것이란 가정이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닐 겁니다. 독서만이 가치있는 것은 아닐테고 볼만한 프로그램을 다 보고서도 남들 못지 않게 책을 읽는 사람도 많습니다. 현명한 목수가 연장 탓하는 걸 보셨습니까. 중요한 것은 책을 읽으려 하는 자세일 겁니다.

'TV를 끄자'란 말이 나온 것은 새삼스런 것은 아닙니다. 이런 주장은 꽤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는데, 다만 TV에 중독된 사람들이 이를 벗어나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EBS의 방송 이후 TV를 멀리 하자는 움직임이 우리사회에는 제법 만만찮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모양입니다. 심지어는 컴퓨터를 겨냥해 '코드를 뽑자'라는 움직임도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그 열정이 책 읽기 등 좀 더 생산적인 곳으로 옮겨 갔으면 좋겠습니다.

이종격투기를 보기 위해 위성방송을 설치하려고 했던 제가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부끄럽습니다만 최근 우리사회에서 불고 있는 이런 흐름은 참 바람직하다는 생각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은 어떠신지요.


(국제신문 염창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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