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60년 을유문화사·현암사 [05/01/06]
 
[책과 길] 설립60년 을유문화사·현암사…격랑의 현대사 담아낸 우리시대 ‘큰 그릇’

1945년,을유년은 한국 출판계에 역사적인 해로 남아있다. 광복과 함께 빼앗긴 말과 글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일제 말기 강제로 출판활동을 중단당했던 정음사,삼중당,박문서관 등이 묵은 먼지를 털고 다시 문을 열었다. 젊은 지식인들은 문화입국을 표방하며 의욕적으로 새로운 출판사 설립에 나섰다.

미 군정당국이 공포한 ‘군정법령 19호’에 따라 45년말까지 등록한 출판사는 모두 49개. 새로 간판을 내건 30여개의 신생 출판사도 포함돼 있었으며 이 가운데 을유문화사와 현암사,탐구당,두산동아,학원사 등 5개가 지금까지 출판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올해로 ‘갑년(甲年)’을 맞이한 이들 출판사의 60년 여정에는 현대사의 격랑과 출판계 안팎의 부침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창업자 정진숙(93) 회장이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을유문화사’는 45년 12월 1일 혈기방장한 30대의 젊은이 4명이 설립 주역이었다. 훗날 한국은행 총재를 지낸 민병도씨가 재정을,정 회장이 살림을,문인이자 편집경험이 풍부했던 조풍연·윤석중씨가 출판기획 및 편집을 공동으로 책임졌다. 이듬해 2월 한글을 익히기 위한 글씨본인 이각경의 ‘가정글씨체첩’을 처음으로 내놓은 을유문화사는 그해 무려 35종의 책을 펴내며 호기롭게 출발했다. 47년에는 10월 9일 한글날을 맞아 ‘조선말큰사전’(전 6권) 가운데 1권을 펴냄으로써 한국출판계에 획을 그었다.

그러나 6·25전란의 와중에 사옥이 불타면서 출판사는 빚더미에 올라섰고 설립동인들도 차례로 떠나가는 시련을 겪었다. 정 회장 단독경영체제로 전환된 ‘을유’는 재건작업에 박차를 가해 54년에는 진단학회와 함께 최초의 한국통사인 ‘한국사’ 출판을 기획,65년까지 전 7권을 완간했다. 이어 60∼70년대에는 ‘세계교양사상전집’ ‘한국학백과사전’ ‘세계문학전집’ 등 굵직한 기획물들을 내놓으며 대표적 출판사로 성장했다. 을유의 성장세는 80년대 들어서면서 대내외적인 환경변화와 정 회장의 대외활동으로 다소 주춤해졌지만 2000년 정 회장의 손자인 정상준 상무가 합류하면서 다시 활력을 되찾고 있다.

창업자(현암 조상원)의 장남인 조근태(63) 사장과 편집자 출신의 형난옥(46) 전무이사 공동대표 체제로 운영되고 있는 ‘현암사’는 45년 12월 대구에서 시사종합지 ‘건국공론’을 창간하며 설립됐다. 현암사가 출판계에서 날개를 단 것은 59년 일제의 잔재인 ‘육법전서’를 대체하는 ‘법전’을 출판하면서 부터다. 도매상에서 선금을 받아 제작비를 대고 실용신안특허까지 받은 ‘법전’은 판매 첫날 매진돼 웃돈이 붙을 정도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현암사는 그러나 70년대 초반 사운을 걸고 추진한 ‘육당 최남선 전집’이 난항을 거듭하면서 심각한 경영난에 처하게 된다. 60년대 중반 대학졸업과 함께 입사한 조 사장은 편법 대신 정공법으로 맞섰고 80년대 들어 황석영의 ‘장길산’,이동철의 ‘꼬방동네 사람들’,최순우의 ‘한국미술 5000년’ 등 베스트셀러를 내놓으며 재무구조 개선에 성공했다. 90년 형 전무가 편집장으로 영입되면서 현암사는 한국의 자연과 문화를 포괄하는 기획물들을 잇따라 성공시키며 한 단계 도약했다. 90년 ‘우리가 정말 알아야할 우리꽃 100가지’를 내놓은 이후 현재까지 51종이 출간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시리즈는 확고부동한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았으며 현암사는 한국학 출판의 대표주자로 부상했다.

대구에서 ‘대양문화사’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학원사’는 52년 창간한 학생교양지 ‘학원’이 공전의 인기를 모으며 출판사로서 입지를 굳혔다. 59년 발간한 ‘학원사 대백과사전’을 필두로 ‘문예대사전’ ‘철학대사전’ 등 다양한 부문의 사전을 출간했고 여성지 ‘여원’(55년),농촌잡지 ‘농원’(64년),‘주부생활’(65년) 등을 잇따라 창간하며 잡지출판의 선두주자가 됐다. 현재 창업주(김익달)의 2세인 김영수 회장이 경영을 맡아 여성지와 단행본 등을 출판하고 있지만 한때 ‘잡지왕국’으로까지 불렸던 전성기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을유’와 ‘현암사’ 등이 창업에 이어 수성에도 성공한 것과 달리 ‘탐구당’은 세대교체에 실패하면서 사세가 위축된 경우다. 은행원 출신의 홍석우(86) 회장이 광복직후 설립한 탐구당은 50년 지리,세계사,영어,공민 등 우리나라 최초의 문교부 검인정교과서를 발행하고 52년에는 대한검인정교과서의 창립을 주도하는 등 초기 교과서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1964년부터 308종을 발행한 ‘탐구신서’는 대표적 문고본 중 하나로 자리잡았고 65년에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을 영인,출간해 국학연구 활성화에도 기여했다. 하지만 2세들이 출판사 경영에 뜻을 두지 않은데다 전문경영인 체제도 세우지 못한 상태에서 홍 회장이 와병,최근에는 물리·생물 등의 대학교재를 펴내는 것으로 맥을 잇고 있다.

김상문(90) 전 회장이 설립한 ‘동아출판사’는 주인이 바뀌면서 이름도 ‘두산동아’로 바뀌는 비운을 겪었다. ‘동아전과’ ‘완전정복’ 시리즈 등을 내면서 참고서 시장을 석권,연 매출 1000억원대의 출판재벌로 성장했던 ‘동아출판사’는 84년 펴낸 ‘동아원색세계대백과사전’ 때문에 빚더미에 올라 85년 두산그룹에 경영권이 넘어갔다.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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