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독서계획 어떻게 세울까  [05/01/06]
 
[책세상]새해 독서계획 어떻게 세울까

무슨 책 읽을지 방향·주제부터 선택
구입비용·시간 등 고려 가능한 책의 권수 결정
'독서 다이어리' 만들어 실행여부 스스로 점검을

'독서와 음악 감상.' 이력서나 프로필의 취미 기입란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취미가 아닐까 한다. 시쳇말로 하면 '만만한 게' 독서와 음악 감상이다. 1년 동안 겨우 책 한 권만 읽는 사람의 취미가 독서고,택시 탔을 때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만 듣는 사람의 취미가 음악 감상인 경우는 그 얼마나 많은지.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독서와 음악 감상'이 취미라고 말하는 건 '나는 별다른 취미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경우가 많다.


말 꺼낸 김에 취미(趣味)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세 가지 뜻이 있다. 마음에 느껴 일어나는 멋이나 정취,아름다움이나 멋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능력,(전문이나 본업은 아니나)재미로 좋아하는 일이나 좋아하는 것. 그렇다면 독서 취미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느껴 일어나는 멋이나 정취,책 내용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능력,(교수처럼 직업적으로 책을 가까이 해야 하는 처지가 아니면서) 재미로 좋아서 책을 읽는 것.

결국 취미가 독서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읽어 그 내용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능력을 길러 갖추어야 한다.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고 읽는 게 아니라,어디까지나 재미로 좋아서 자발적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 요컨대 이해 능력과 자발성이 관건이라 하겠는데,문제는 이해 능력과 자발성도 책을 꾸준히 읽어야 생긴다는 점이다. 적어도 독서에서는 양질전화의 법칙이 진리다. 어떤 책이 되었든 가리지 말고 일단 많이 읽어야 한다.

일단 많이 읽게 되면 자연스럽게 책을 보는 눈,감식안과 판단력이 생기게 되어 있다. 이 단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민한다. '좋은 책은 어떤 책일까?','좋은 책을 고르는 기준은 뭘까?' 하지만 그런 고민은 애당초 잘못 설정된 고민이다. 단적으로 말하면,좋은 책과 나쁜 책은 없다. 그냥 책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책을 읽는 독자,나 자신이 있을 뿐이다. 요컨대 좋은 책이란 '나에게' 맞는 책이며 나쁜 책이란 '나에게' 맞지 않는 책이다. 여기에서 '맞는다'는 건 지적 수준이 맞는 책일 수도 있고,내가 지금 처한 상황에서 필요로 하는 책일 수도 있으며,저자의 주장에 '맞아! 맞아'를 연발하며 공감하게 되는 책일 수도 있다.

책 을 많이 읽어서 나에게 맞는 책이 어떤 건지 판단할 수도 있게 되었다면,이제 독서 계획을 세워볼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독서 계획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올 한해 몇 권의 책을 읽을 것인가', 즉 책의 수효부터 생각한다. 하지만 독서 계획에서 책의 수효는 부차적인 문제다. 중요한 것은 독서의 방향 혹은 독서의 주제를 정하는 일이다. 윈스턴 처칠의 예가 있다. 처칠은 영국 제4경기병 연대 소속으로 1896년 인도로 갔다. 인도에서 그는 촌음을 아껴가며 독서에 몰두했다. 특히 국제 정세와 정치 및 경제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에 집중했고,역사서도 각별히 챙겼다. 마치 나중에 영국 수상이 되어 국제 정치 무대에서 크게 활약하게 될 것을 예감이라도 한 듯이 말이다.

필자의 경우를 예로 들면,필자는 올 한 해 서양 미술사 도서를 집중적으로 읽을 계획을 세웠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E H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예경)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읽어서 서양 미술사의 전체적인 얼개를 파악한다. 그리고 이주헌의 '서양화 자신 있게 보기'(학고재)를 읽어서 서양 미술사 이해에 필요한 기본 개념과 감상법을 익힌다. 그리고 노성두의 '고전미술과 천 번의 입맞춤'(동아일보사)을 읽어서 서양 고전 미술과 친해진다. 그리고 현대 미술에 관해서는 최형순의 '현대 미술을 위한 변명'(해토)을 출발점으로 삼아 본다. 이상 네 권의 책을 읽은 뒤에는 서양 미술사의 개별 사조나 화가에 관한 책들을 읽는다.

그 렇다면 부차적인 문제로 들어가서,과연 몇 권의 미술사 도서를 읽을 것인가? 지금 계획으로는 약 50권을 생각하고 있다. 매주 한 권 꼴이다. 과연 50권을 다 읽을 수 있을까? 읽을 수 있다. 50권 모두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책에 따라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경우도 있겠지만,한 권의 책에서 중요하다고 판단한 부분,특별히 흥미가 가는 부분만 읽는 발췌 독서 혹은 밑줄 긋기 독서를 할 작정이다.

또 하나 부차적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문제,즉 책 구입 비용은 대략 얼마나 될까? 미술 도서는 다른 분야 도서에 비해 가격이 비싼 편이다. 도판 자료가 많이 들어가 있고 고급 종이를 사용하는 책이 많은 데다가,미술 작품 사진 사용료를 지불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50권이라면 넉넉하게 잡아도 100만원을 넘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독서 계획을 요약하면 결국 이렇다. '올 한 해 나는 서양 미술사를 독서 주제로 잡아서,입문 성격의 책과 통사(通史) 성격의 책들을 기본 틀로 삼고,서양 미술사의 보다 세부적인 문제들을 다룬 책들을 읽어나간다. 읽을 책의 수효는 50권으로 잡고 도서 구입비로 100만원을 책정해 놓는다.'

이 게 독서 계획의 끝일까? 아니다. 새해 새 결심으로 구입한 다이어리의 주간 일정표에 앞으로 구입할 서양 미술사 도서 목록을 적어 놓고,언제 어느 부분을 읽었는지도 적어 놓는다. 신문 서평에 소개된 서양 미술사 도서들 가운데 눈길을 끄는 책이 있으면,신문의 해당 부분을 오려 다이어리에 붙여 놓는다. 독서 계획의 실행을 점검하는 일종의 독서 다이어리를 작성하는 것이다. 인터넷을 잘 활용하는 사람이라면 블로그나 게시판을 통해 독서 계획을 갈무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매년 주제를 달리하면서 독서 계획을 세워 여러 해를 실천한다면,다른 사람들이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보게 되는 날, 요컨대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자신의 지적인 성장의 발자취라고 할 수 있는 독서 다이어리 여러 권을 들춰보는 재미도 보너스로 주어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퀴즈 하나를 풀어보자.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독서 계획은? 정답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신라시대 유물인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다. 모르긴 해도 세계적으로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독서 계획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유교 경전을 습득하고 실행할 것을 두 사람이 다짐하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는데,'시(詩),상서(尙書),예기(禮記),춘추전(春秋傳)을 차례로 습득하기를 맹서하되 3년으로 하였다'라는 부분이 있다. 사뭇 결연하기까지 한 독서 계획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오늘날의 독서인들이 독서 계획을 세우는 데 그런 결연함까지 발휘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독서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리라는 것만큼 유익하고 뜻 깊은 새해 새 결심도 없으리라.


(표정훈 출판평론가)=부산일보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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