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기획'이 아니다! (기획회의, 2004.12.)
 

지난 12월 10일에 있었던 북에디터의 송년회 자리에서 어느 편집자로부터 "(편집자가 갖춰야 할) 기획 마인드와 교정·교열 마인드는 무엇이 어떻게 다르며 어느 쪽이 더 강조되어야 하는가"라는 요지의 질문을 받았다. 질문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나는 좀 뜨악해질 수밖에 없었다. 편집자에게는 그저 '편집자의 마인드'가 필요할 뿐, 백 걸음을 양보해서 출판물의 '기획'에 임하는 데 어떤 자세(마인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심지어 교정·교열에 그와는 다른 무슨 특별한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것은 상상조차 해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은 언젠가 이 지면에 실린 "정답을 찾지 말고 의견을 구하라"라는 제목의 글에서 지적했던 바와 같이 교정·교열 작업에 대한 심각한 오해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기획'에 대해서도 상당한 오해가 잠재해 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일례로 출판 아이템에 대한 '아이디어 제시' 정도를 놓고 '기획'이라고 뻐기곤 하는 편집자를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분위기는 사실 출판 동네에서 그동안 출판 기획이 얼마나 주먹구구로 이루어져 왔는지를 생생하게 방증할 뿐이다. 모든 매체의 기획이 그러하지만, 출판물의 기획이란 저자에 의해 책이 씌어지는 순간부터 독자의 손에 들어가 읽히는 순간까지의 전 과정을 구상해 내는 일이다. 가령 마케팅에 대한 구체적인 관점이 확보되지 않은 기획을 기획이라 할 수 있겠는가. 지질부터 제본 형태에 이르기까지 제작의 방향이 포함되지 않았거나 디자인의 통일을 기하기 위한 컨셉이 제시되지 않았어도 마찬가지 반문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유독 책이라는 상품의 가장 중요한 전달 수단인 '문장'에 대한 구체적인 고려만이 이른바 '기획'에서 생략되어도 무방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일까. 아니, 문장 교열처럼 자질구레한(?) 일에는 신경쓰실 겨를이 없으시다는 자칭 '기획자'들께서 기획의 가장 핵심적인 과정의 하나라 할 수 있는 필자 선정을 하실 때는 무슨 기준으로 하신다는 것일까. 물론 '문장'만이 필자 선택의 유일한 관건은 아니겠지만, 필자의 문장을 살펴보지도 않고 집필을 의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두 번 말하면 잔소리지만 책을 기획하는 사람에게는 '문장'을 보는 자신만의 안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것은 '교열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인드'와 전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기획자가 디자인 컨셉을 제시한다고 해서 직접 디자인을 하지 않는 경우도 많듯이, 기획자가 직접 자신이 기획한 책의 문장을 만지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기획자가 디자인을 모를수록 디자인 컨셉이 모호하게 뭉뚱그려져 하나마나한 원론 수준을 맴돌게 되고 결국 디자이너와의 효율적이 소통에 심각한 장애가 초래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듯이, 제 입으로 "문장 교열은 잘 모른다"고 부끄러움도 없이 떠드는 기획자가 제시하는 교열의 방향이 도대체 얼마나 '실제적인 내용'을 담지할 수 있을 것인가. 요컨대 '집행력'을 담보하지 않은 기획은 기획이 아니다.

이런 딱한 사정은 '교정·교열'에 대한 오해에도 어김없이 작용한다. 도대체 책 전체의 기획 방향을 염두에 두지 않고, 필자가 애써 작성해 온 원고를 단 한 글자라도 고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아마도 많은 편집자들이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좋게 보아야 시대착오이며, 심하게 말하면 무책임한 일이다. 우리는 지금, 필자가 원고 용지에 육필로 써내려간 원고에 편집자가 온갖 조판 지시를 첨부한 '원고'를 교정쇄와 대조하며 교정(校正)을 하던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만일 예전처럼 작업 지시서로서의 원고 용지가 존재하던 시대라면, 교정을 하는 사람이 책의 내용과 기획의 방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면 당연히 훨씬 더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겠지만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작업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교정을 하는 사람에게는 그저 한 글자의 잘못도 놓치지 않는 '꼼꼼함'이 다른 누구에게보다 더 필요할 뿐이라고 여겼음직하다.(그 시절에도 감히 필자의 '문장'을 교열하는 것은, 그 책의 '책임 편집자'나 할 수 있는 일이었지 단순히 '교정 업무'만을 맡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원고'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필자가 보내온 원고는 이미 워드프로세서로 깔끔하게 타이핑이 되어 있으며, 필자가 원고 작성상의 실수로 오타(誤打)를 냈다 하더라도 그것이 순수한 의미의 오타인지 필자가 고의로 낯설게 표현한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본래적 의미의 '원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이핑을 이용한 원고 작성의 수월함은 육필로 원고 용지에 써내려갈 때에 비해서 실수로 인한 오자 발생의 가능성을 엄청나게 증가시켰다. 이 딜레머는 단순하게 오·탈자를 확인하는 작업조차도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문장의 맥락과 흐름을 총체적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로 만들어 버렸다. 요컨대 이제 교정과 교열을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어렵사리 수긍을 한다 해도 또 한 가지의 결정적인 문제가 남아 있다. 책의 기획 방향과는 무관한 '문장 교열'의 절대적 기준이 따로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다. 그리고 그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것을 정확히 숙지하여 철저하게 실현시키는 것이 '교열하는 사람이 갖춰야 할 마인드'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런 식의 기준 따위는 존재한 적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으며, 존재해서도 안 된다. 편집자가 '교열'이라는 이름으로 필자의 원고에 '훼손'을 감행할 수 있는 유일한 목적은 오로지 그 책의 상뭄으로서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것이며, 그것은 애당초 원고의 내적 필연성으로부터 유래한 자기 완결성에 근거한다. 따라서 이때 문장 교열의 유일한 준거는, 그 책의 핵심 독자에게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효과적으로 전달되고 있는가일 뿐, 다른 준거가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핵심 독자'가 구체적으로 누구인가를 상정하지 않고 또 저자가 그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어떤 의미에서는 '저자보다도 더 잘') 이해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저자에게 귀속되는 저작물에 어떻게 함부로 '교열'을 가할 수 있을 것인가. 요컨대 이러한 성격의 준거를 확보하는 것을 '교열자의 마인드'라고 할 때, 그것은 '기획자의 마인드'와 전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장을 다듬는 과정도 또는 지면을 디자인하는 과정도 모두 책의 '기획'을 구체적으로 실현해 내는 과정의 일부이다. 기획의 컨셉과 방향을 공유하지 않고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닌데도, 마치 '기획'은 저 높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대단히 창조적인 일이기라도 한 양 제대로 된 소통과 공유의 과정을 생략한 채 "시키는 일이나 열심히 하라"는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출판사가 아직도 많다. 나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그 알량한 '기획'의 정체를 알다가도 모르겠거니와 그렇게 해 봤자 '시키는 일'(?)인들 제대로 될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더 우스꽝스러운 일은 그런 엉터리 '기획'을 밀어붙이곤 하는 자칭 '기획자'들일수록 디자이너나 편집자들의 능력과 자질이 모자라다는 개탄을 입에 달고 다니며 자신의 무능과 무책임을 전가하기에 바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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