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허구 뒤섞고, 인문·소설 아우르고…  [04/12/31]
 
[사실·허구 뒤섞고, 인문·소설 아우르고… Faction·지식소설, 불황 속 ‘대박’]

다 빈치 코드, 검은 꽃, 연금술사, 미쳐야 미친다, 살아있는 한자 교과서 등 강세

올 한 해 우리 도서 시장은 극심한 불황에 시달려야 했다. 전반적인 경기 침체의 여파 속에 책을 구입하기 위해 지갑을 여는 손길이 그 어느 해보다도 줄어든 것이다. 도서 시장이 불황 국면에 빠진다는 것은 독자들이 선택과 집중의 원리에 충실해진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예전 같으면 한 번 서점에 갈 때마다 책을 두세 권 사던 사람이 한 권 사는 것으로 줄이게 된다. 그 결과, 팔리는 책과 팔리지 않는 책의 간격은 더욱 커진다. 그래서일까? 올해 우리 출판계는 매출 규모의 양극화가 심해졌다. 최상위권의 몇몇 출판사와 그 아래 출판사들의 매출 규모의 간격이 커져버린 것. 이런 현상은 내년에도 계속되리라는 것이 많은 출판인들의 전망이다.

그런 가운데 올 한 해 가장 많이 팔린 단행본은 두 권으로 나온 댄 브라운의 소설 ‘다 빈치 코드’(베텔스만)였다. 12월 말 집계로 100만부가 넘게 팔린 이 책은 올해의 유일한 단행본 밀리언셀러가 된다. 밀리언셀러급 도서가 나오면 일종의 파생 도서들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다 빈치 코드’도 예외는 아니어서 ‘다 빈치 코드의 진실’(시몬 콕스, 예문), ‘다 빈치 코드 깨기’(어윈 루처, 규장), ‘성배와 잃어버린 장미: 다 빈치 코드의 비밀’(마가렛 스타버드, 루비박스), 심지어 보드 게임 ‘다 빈치 코드’(게임올로지)도 나왔다.

2003년 미국에서 돌풍을 일으킨 이 소설은 40여개 언어로 번역되어 1000만부 넘게 팔렸다. 이야기는 루브르박물관 관장 자크 소니에르의 살해 사건에서 시작된다. 복부에 총을 맞은 소니에르는 죽기 전 자신의 주위에 원을 그리고 벌거벗은 채 팔과 다리를 활짝 펴, 시신이 다 빈치의 스케치 작품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 모습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더구나 시신 옆에는 뜻을 알 수 없는 글이 적혀 있다.

소니에르의 손녀이자 프랑스 사법경찰 암호해독요원 소피느뵈는 이를 할아버지가 자신에게만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남긴 암호라고 판단한다. 살해범으로 몰린 하버드대 기호학 교수 로버트 랭던과 소피느뵈는 암호를 풀며 진실에 접근해간다. 이들은 소니에르가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아이작 뉴턴, 빅토르 위고 등이 수장을 맡았던 시온 수도회의 수장이었고, 시온 수도회는 900여년 동안 막달라 마리아의 시신을 일컫는 ‘성배’와 예수와 마리아의 관계가 나와 있는 비밀문서를 지켜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작품이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은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가 혼인하여 그 사이에서 아이까지 태어났다는 내용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 오른쪽에 앉아 있는 인물이 바로 예수의 아내 막달라 마리아라는 것. 이에 따른다면, 오늘날 우리가 널리 받아들이고 있는 예수 이미지는 기독교회가 1000년에 걸쳐 조작한 허구가 된다. 당연히 미국 기독교계가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 사실과 허구의 교차와 중첩

위의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이 ‘다 빈치 코드’는 사실과 허구의 경계, 논픽션과 픽션의 경계를 절묘하게 넘나든다. 역사적인 사실인가 싶으면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이고, 상상력의 산물인가 싶으면 역사적인 사실처럼 보인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진실이 아니며, 진실은 그 너머 어딘가에 감춰져 있고, 그 감춰진 진실을 역사적인 실마리를 통해 밝혀나간다’는 게 기본 설정이다. 또 하나의 큰 특징은, 도서평론가 이권우의 표현을 빌려서, 지식 소설이라는 데 있다. 독자들은 추리 과정을 따라가면서 서양의 종교, 역사, 미술, 철학사상 등에 걸친 방대하고 다양한 지식을 접할 수 있다. 이런 특징은 올해 번역, 출간된 ‘단테 클럽’(황금가지), ‘자본론 범죄’(생각의 나무), ‘임프리마투르’(문학동네), ‘진주 귀고리 소녀’(강) 등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사실과 허구의 교차와 중첩이라는 특징은 본래 역사 소설의 특징이기도 한 바, 올해 우리 문단 안팎에서 크게 주목받은 대표적인 소설, 김영하의 ‘검은 꽃’(문학동네)도 좋은 예가 된다. 대한제국의 패권을 놓고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에 돌입했던 즈음인 1905년 4월, 영국 기선 일포드 호가 조선인 1033명을 싣고 제물포항을 출발해 멕시코로 향한다. 그들은 대륙식민회사의 농간으로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 채무노예로 팔려간 것이다. 의무 기간 4년에 걸쳐 그들은 여러 농장에 분산 수용되어 착취당한다.

계약기간 만료 후에도 그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멕시코 전역을 떠돈다. 멕시코에 불어닥친 혁명과 내전에 휩쓸렸고, 과테말라 혁명군은 그들에게 거액을 제시하며 참전을 요청한다. 42명의 조선인들은 과테말라 북부 밀림지대에 도착, 정부군과 교전하면서 ‘신대한’을 국호로 새로운 국가를 세우지만, 정부군의 소탕 작전에 대부분 전사한다.

작가 김영하는 멕시코와 과테말라 현지에 석 달 동안 체류하면서 이 작품을 마무리 지었다. 멕시코 유카탄반도의 농장을 찾아 다녔고, 과테말라의 밀림에도 들어갔으며, 스페인어를 듣고, 남미 음식을 먹으며, 과테말라에서 차별 받는 마야인들과 만나기도 했다. 그밖에도 대한 제국 시대에 관한 자료를 광범위하게 모으기도 했다. 광범위한 취재와 조사가 없었다면 나올 수 없는 작품인 셈이다.

‘다 빈치 코드’의 작가 댄 브라운도, 다 빈치가 자신의 작품에 여러 비밀을 숨겨놨다는 미술사 강의를 들었던 대학 시절의 관심에서 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유럽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기도 했으며, 집필을 위해 수천 종에 달하는 자료 조사와 검토에만 1년을 보냈다. 치밀하고 방대한 자료 조사와 천착에 근거하지 않는 ‘골방의 상상력’만으로는 더 이상 독자들에게 어필하기 힘들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한편 1993년에 다른 제목으로 다른 출판사에서 나왔지만 별 반응을 얻지 못했고, 새로운 출판사에서 다시 낸 2001년에도 반응이 신통치 않다가 작년 말부터 불이 붙기 시작해 지금까지 40만부 가까이 팔린 소설이 있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문학동네)인데, 이 작품은 일반적인 의미의 소설이라기보다는 성인들을 위한 우화에 가깝다.

* 우화 형식 담은 처세서도 강세

책 좋아하는 양치기 산티아고는 계속 같은 꿈을 꾼다. 양과 함께 놀던 아이가 자신의 손을 잡아끌어 이집트 피라미드로 데려가는 꿈이다. 어느 날 책을 읽고 있는 그에게 한 노인이 나타나 가지고 있는 양의 10분의 1을 내놓으면 피라미드에 묻혀 있는 보물을 찾는 길을 가르쳐주겠다고 말한다. 산티아고는 노인에게 값을 치르고 금으로 된 흉패 한가운데 박혀 있던 흰색과 검은색 보석 ‘우림과 툼밈’을 받아든다. 그리고 꿈과 희망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나 결국 삶의 참 의미를 발견한다.

문학적 완성도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소설은 아니다. 대신에 일종의 자기계발서 성격이 강하다. 이른바 뉴에이지풍인가 하면, 성장 소설 혹은 교양 소설로도 보이고, 소설이 아니라 그냥 우화로도 보인다. 바꿔 말하면 쓰임새가 넓고 다양한 소설, 일종의 범용성(汎用性)에서 강점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와 달리 소설이 아닌 처세실용서로 분류되지만 소설 혹은 우화의 형식을 갖춘 베스트셀러로 스펜서 존슨의 ‘선물’(랜덤하우스중앙)이 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에서 이미 우화 형식으로 큰 성공을 거둔 스펜서 존슨은 ‘선물’에서도, 한 소년이 성인으로 성장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소년이 마침내 깨달은 것은 이렇다.

행복과 성공을 원한다면 바로 지금 일어나는 것에 집중하고, 바로 지금 중요한 것에 관심을 쏟으라는 것. 과거보다 나은 현재를 원한다면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돌아보고 그것에서 소중한 교훈을 익혀 지금부터 다르게 행동하라는 것. 현재보다 나은 미래를 원한다면 멋진 미래의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지금 당장 계획을 실천으로 옮기라는 것. 수많은 처세실용서의 핵심 내용을 압축적으로 정리해 놓은 셈이다.

* 인문서+실용서 ‘새 장르’도 눈길

이제 인문 분야로 눈길을 돌려보자. 올 한 해 인문 분야에서 가장 큰 화제를 모은 책은 정민 교수(한양대)의 ‘미쳐야 미친다’(푸른역사)이다. 18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을 중심 테마로 삼아,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한 가지 주제에 미쳐서 끝장을 보고야 마는 일종의 매니아 문화에서 찾고 있는 책이다. 남들이 이상하다고 손가락질을 하든 말든, 출세에 보탬이 되든 말든 혼자 뚜벅뚜벅 걸어가는 정신, 혹은 이리 재고 저리 재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성실과 노력으로 일관한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표구에 미쳐 하루 종일 옛 그림 수선에 매달린 방효량, 좋은 돌만 보면 벼루를 깎은 정철조, 수석에 미쳐 돌을 주우러 돌아다닌 이유신, 담배를 너무 좋아해 담배에 관한 기록을 주제별로 모은 문헌 ‘연경(煙經)’을 펴낸 이옥, 비둘기 사육에 열중해 ‘발합경’을 남긴 유득공, 앵무새 이야기를 집대성한 이서구도 있다. 조선의 선비라고 하면 유교 경서에만 몰두하는 도덕군자부터 떠올리던 통념에 일침을 가하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이 큰 인기를 모은 까닭으로, 오늘날을 사는 우리들 각자의 삶을 반추해볼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이 책은 단순히 옛날 사람들 가운데 이런 특이한 사람들도 있었다는 걸 ‘알려주는 데’ 그치지 않고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는?’이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일종의 ‘인문 실용서’로 볼 수도 있다. 출판에서 인문 분야와 실용 분야의 결합은 최근 몇 년 사이 두드러진 추세이기도 하지만, 이 책은 특히 우리 옛 인물과 고전에 관해 미처 몰랐던 사실들을 밝혀준다는 미덕까지 더해져 있다.

이런 특징은 조선의 과거 시험에서 마지막 관문으로 임금이 묻는 질문에 답해야 하는 책문(策問) 가운데 중요한 것을 가려 뽑아 번역한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김태완 엮음, 소나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이 많은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까닭은 내용의 동시성(同時性), 즉 오늘날의 우리 현실에 대입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단순히 책문 내용을 번역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엮은이가 오늘날의 현실과 관련지어 책문을 해설하는 부분이 이 책의 백미다.

예컨대 명종 이후 훈구 세력의 붕괴와 함께 국정을 주도하게 된 사림 세력은 잔존하는 훈구 세력을 포용하지 못했다. 관료로서의 훈련을 쌓지 못한 사림 세력은 정국 운영에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고, 결국 조선의 관료 사회는 동서 붕당으로 갈라져 누적된 모순 개혁에는 손도 대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이 책은 옛 것, 옛 문헌을 통해 오늘날의 현실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한편 여러 서점에서 인문 분야로 분류되어 큰 인기를 모은 ‘살아있는 한자 교과서’(강민경 외 지음, 휴머니스트)는 보다 더 직접적으로 실용성을 포괄한다. 한자의 배경이 되는 문화와 역사에 관한 인문 교양서인가 싶으면, 그런 문화와 역사를 배경 삼아 한자를 배울 수 있는 실용서 성격도 강하다. 예컨대 고대 중국의 역사가들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어휘를 선택했다. 엇비슷한 세력이 싸울 때는 공(攻)자를 쓰고, 강한 세력이 약한 세력을 칠 때는 벌(伐)자를 썼다. 상대의 잘못을 응징할 때는 토(討)자를 쓴다. 이런 원리를 알게 되면 우리가 자주 쓰는 ‘공격’이나 ‘토벌’ 같은 말의 의미를 더욱 가려서 정확하게 쓸 수 있다.

이상 몇 권의 베스트셀러를 통해 도서 시장에서도 더 이상 순수한 것만으로는 독자들에게 어필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문 지식과 추리, 인문 지식과 문학적 상상력과 실용성 등을 두루 결합한 책들이 각광받는 추세인 것이다. 또한 문학이든 인문이든 철저한 자료 조사와 취재에 바탕을 둔 책이 강세를 나타내고 있다. 허구와 사실, 상상력과 구체적인 자료, 어떤 의미에서는 이질적인 것들을 효과적으로 결합시키는 능력이 저자에게나 출판기획자에게나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보이는 가상현실이 범람하는 시대의 징표인지도 모르겠다.


(표정훈 출판평론가)=주간조선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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