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천 너울거리는 굿판처럼 만들것”  [04/12/30]
 
중견 건축가 김원이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건물로 풀었다.

김씨는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 들어서는 ‘태백산맥 문학관’ 설계를 최근 끝냈다. 한국전쟁 전후 격동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태백산맥’을 기념하는 문학관은 내년 2월 착공 예정이다. 위치는 읍내가 내려다보이는 벌교 회정리 언덕. 보성군이 40억원의 예산을 들여 세우는 태백산맥 문학관은 대지 3500평에 건물은 연면적 500평 규모다.

국립국악원·통일연구원·영화진흥공사 종합촬영소·러시아 대사관·남산 빙 갤러리 등을 설계한 김원씨는 유난히 역사와 문화 유산 보존에 관심이 많은 건축가다.

그는 ‘태백산맥’을 읽은 적이 없다. 1943년생 동갑인 소설가 조정래씨와는 지난 6월 평양 어린이병원 준공식에 함께 참석하면서 처음 알게 됐다. 지난 11월 중순, 조씨가 ‘태백산맥 문학관 설계를 맡아 달라’며 김씨가 소장으로 있는 서울 동숭동 ‘광장 건축’ 사무실을 찾아왔다. 이틀 뒤 김씨는 ‘태백산맥’의 무대인 벌교를 찾아갔다. 직원을 전부 끌고 갔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소설에 대해 토론했다. “젊은이들은 다 읽었더군요. 달달 외다시피 하는 직원도 있었어요.”

벌교 전답, 뻘, 중도 방죽, 얼마 전 복원된 현부잣집 등을 둘러본 건축가는 설계의 뼈대를 다음과 같이 잡았다고 한다. “우리 현대사가 엄청난 질곡의 터널을 지나왔구나. 작가란 손전등을 들고 터널로 들어가 묻혀버린 역사를 긁어낸 뒤 그 조각조각을 꿰어 밝은 햇빛 위에 드러내는 사람 아닌가. 살풀이 굿판을 벌이자.”

건축가는 동굴과 굿판을 건물 안으로 끌어들일 생각이다. 땅을 10m 정도 파고 들어가 긴 터널을 만든다. 그 끝은 넓은 홀이다. 관객이 마주 서게 될 높이 10m·폭 40m 벽에는 대형 벽화를 그릴 예정이다. “제한된 빛이 들어오는 텅 빈 홀에 김소희 명창의 구음이 흐르면 어떨까 합니다.” 어두운 방을 지나서는 높이 18m의 유리탑으로 올라가게 된다. 문학관 한쪽에는 억새밭을, 반대쪽에는 대나무 숲을 조성한다.

옥상은 굿판처럼 꾸민다. ‘태백산맥’을 영화로 만든 임권택 감독과도 만났다는 김씨는 “임 감독이 ‘문학관이 흰 천 너울거리는 굿판 같았으면 좋겠다’고 했다”며 “내 생각도 그렇다”고 말했다. 자연스럽고 절제된 건축 스타일로 유명한 김씨는 이번에도 한 발 물러선 듯한 건물, 멀리서 보면 그저 언덕에 유리탑 하나 서 있는 듯한 디자인을 펼칠 예정이다.

“‘어때 놀랐지’ 식의 과장은 피할 생각입니다.” “살아 있는 작가의 작품이 주제라 좀 어려웠다”는 그는 이념에 예민한 세대부터 ‘라면이 맛있어서 먹는’ 젊은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가장 문학적인 건축가’상을 받기도 한 김씨는 전북 고창 질마재의 미당 시문학관도 설계했다. 시인 서정주를 기리는 문학관은 키워드를 ‘바람’으로 잡고 폐교를 살리는 한편 소박한 탑을 세웠다.

김원씨는 ‘태백산맥 문학관’이 들어서는 벌교가 “개발이 비껴간 동네, 옛 상처와 추억이 그대로 남아 있는 동네라 착잡하면서도 다행이었다”고 말한다.

김수근 문화재단을 설득해 시인 이상이 살던 서울 통의동 집을 사들이게 한 그는 그곳에 이상이 운영했던 ‘제비다방’을 부활시키는 것이 꿈이다. 미당 서정주 시인이 살던 서울 남현동 ‘봉산산방’의 리모델링을 맡기도 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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