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정담] '을유문화사' 이끄는 할아버지와 손자  [05/01/02]
 

'해방 60년, 출판 60년'의 새해를 맞는 정진숙(93) 을유문화사 회장의 감회가 남다르다. 1945년 을유년, 문화 입국의 정신으로 창립한 출판사가 '회갑'을 맞았기 때문이다. 창업자가 현역으로 경영 60년을 맞는 기업은 우리 재계에서도 유례가 드문 일. 그 출판계 산 증인이 '을유 21세기'를 이끌고 있는 손자인 정상준(37)상무와 함께 출판 문화를 짚어봤다. [편집자]

▶ 정진숙 회장=지난해 6월 위암 수술을 한 걸 가지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은 데 괜찮아. 지금도 꼬박꼬박 반주를 해도 멀쩡한 거 보면 몰라. 맥주 한 잔 마시는 게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어.

▶ 정상준 상무=100년, 200년이 넘도록 '을유'브랜드를 살려가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지난 세월 아쉬웠던 점은 없습니까.

▶ 정 회장=인연을 맺은 모든 이들에게 고맙다는 생각만 들어. 참 고생 많이 했지. 힘들었던 일들도 90이 넘어 생각해 보니 다 괜찮았다고 생각해. 앞으로도 괜찮을 거야. 한국전쟁 당시 종로2가 YMCA 건너편 옛 영보빌딩에 있던 사무실을 인민군들이 점령했었지. 을유 식구들은 숨어서 피해 다닐 수밖에 없었어. 그들이 우리 책들을 바리케이드로 사용하다가 철수할 때 모조리 태워버려 초창기 책 일부가 없어진 게 좀 아쉽다 할까?

▶ 정 상무=민병도 전 한국은행 총재, 아동문학가 윤석중 선생님, 작가 조풍연 선생님과 할아버지 이렇게 4명이 의기투합해 을유를 창립했지요? 그러면 그분들이 창업동인이시군요.

▶ 정 회장=1945년 12월 1일 을유년의 '을유'를 따서 출판사를 차렸지. 내가 34세 때 일이야. 나는 전무를 맡았고, 민병도씨가 사장, 주간이 윤석중, 편집국장은 조풍연씨였어. 해방 직후엔 출판사가 그야말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45년 9월부터 12월까지 4개월 만에 45개가 새로 등록했지. 46년의 출판사 수는 150개였고, 47년엔 584개사로 급증했어. 억눌렸던 민족 문화를 회복시키려는 사회적 열망이 출판이란 형식으로 분출한 거라고 봐. 우리 4명 역시 '건국 사업'을 목표로 내걸고 출판을 시작한 거야. 그런데 이제 내가 '골동품'이 된 것 아닐까.

▶ 정 상무=지금까지 5000여 종을 펴냈는데요. 할아버지께서 특히 기억에 남는 책은 무엇입니까.

▶ 정 회장=첫 책은 46년 2월 1일에 펴낸 '가정글씨체첩'(이각경 지음, 글쓰기 교육서)이었지. 가격이 4원이었는데 하도 잘 팔리니까 광주에서 해적판이 나돌기도 했어. 홍명희의 '임꺽정', 청록파 시인들의 '청록집' 등이 초기에 낸 책이었어. 하지만 무엇보다 애착이 가는 것은 '우리말 큰 사전'(전 6권)과 '한국사'(전 7권)야. 각각 10년간의 공을 들여 만들었거든. 아마 50대 이상으로 책 좀 읽었다는 사람들은 '을유 문고'시리즈를 많이 기억할 거야. 75년에 100권을 완간한 '세계문학전집'도 당시로선 국내 처음이었어.

▶ 정 상무=기억나는 필자들은 누구입니까.

▶ 정 회장=해방 이후 70년대까지 당대를 풍미한 지식인들에게 을유는 일종의 사랑방이었어. 이상백 전 서울대 교수가 특히 생각나네. 강의 끝나면 거의 내 사무실에 들렀고 필자들을 많이 소개해 줬지.

▶ 정 상무=80년대 이후엔 을유의 활약상이 좀 뜸했는데요.

▶ 정 회장=그 부분이 마음에 걸려. 대한출판협회 회장을 14년 동안 지냈고, 한국출판금고를 만들어 30년 동안 이사장을 지내면서 출판사 일을 좀 등한히 해서 그런 거 아닐까. 그래도 다른 출판사들이 잘 안 내는 책들을 꾸준히 펴냈어.

▶ 정 상무=파주출판문화단지에 가면 할아버지 아호를 딴 '은석교'란 다리가 있고, 또 출판계에선 '을유 창사 화갑기념준비위원회'를 결성해 다양한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는데 아마 그런 점을 기억하기 때문이겠지요.

▶ 정 회장='뒷방 늙은이'를 그렇게까지 생각해주니 참 고맙지. 내가 한 게 뭘 있다고….

▶ 정 상무=교보문고 설립(1980년)과도 인연이 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정 회장=절친하게 지냈던 신용호 전 교보생명 회장이 광화문 네거리에 빌딩을 짓는다는 말을 듣고 나서 '서점을 만들어 달라'고 거의 3년 동안 만나기만 하면 부탁했어. 내가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을 맡고 있을 때야. 교보문고의 탄생 비화지.

▶ 정 상무=올해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한국이 주빈국으로 참석합니다.

▶ 정 회장=한국 출판이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야. 요즘 출판계가 어렵다고들 하는데, 옛날에 비하면 정말 많이 발전했어. 우리 세대에선 생각도 못했던 별의별 책들이 쏟아져 나오잖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은 세계에 우리를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야. 하지만 기대는 큰 데 반해 준비가 부족한 것 같아 걱정이다. 국가적 망신 당하지 않으려면 내일 네일 따지지 말고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해. 한만년 전 일조각 대표가 너무 일찍 갔어(2004년 79세를 일기로 타계). 출판계를 위해 크게 일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 정 상무=출판 철학을 말씀해 주세요.

▶ 정 회장=해방 직후 어느 날인가 찾아 뵌 위당 정인보 선생이 내게 "출판은 새 나라 교육.문화발전의 초석이 되는 건국사업이다"고 하신 말씀이 큰 자극이 됐지. 출범 당시 일제에 말살된 우리 문화.역사.문자와 말을 다시 찾아 소생시킨다는 거창한 목표를 세운 것은 그 때문이야. 요즘 세대들은 생각이 다를 수도 있겠지. 우리 세대는 출판과 민족문화 창달을 분리해 보지 않았어. 돈이 안 되는 책이라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펴냈었지. 지금은 그런 소박한 생각으로 출판하는 이들은 별로 없는 거 같아.

▶ 정 상무=그렇습니다. 아무리 다매체.다채널 시대라지만 읽기와 쓰기는 문화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조계사 옆 서울 종로구 수송동의 현 사옥은 언제 세우신 겁니까.

▶ 정 회장=원래 우리 가족이 살던 2층 적산가옥을 헐고 74년에 건물을 지은 거야. 이 터에 있던 집 2층에서 네가 태어났단다.

▶ 정 상무=출판계 후배들에게 해 주시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 정 회장=다른 사람이 낸 책을 베껴내는 일은 하지 말았으면 한다. 스스로 계획해 연구하고 새로운 것을 창안해 내는 게 중요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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