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펼치며]아쉬운 토종 베스트셀러 [04/12/28]
어릴적에 동무들과 동네어귀에서 신나게 놀 땐 시간 가는줄 모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다가 뉘엿뉘엿 해가 서산에 걸리기 시작하면 늘 "좀 더 놀았으면 좋겠는데…"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곤합니다. 시간이란 것이 그런가 봅니다. 평소에는 잊고 살다가 막바지에 다다르면 꼭 다 털어내지 못한 먼지처럼 마음 한 구석에 싸한 느낌으로 밀려옵니다.
어느덧 이 '책장을 펼치며'난에 올해 마지막 글을 올리게 됐습니다. 시간이 정말 후딱후딱 지나가버렸습니다. 묵은 해를 보내며 "나는 진짜로 한 점 흠없이 한 해를 보냈다"라고 자부하시는 분은 아마 손에 꼽을 정도일겁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좀 더 치열하게 사는건데…"라고 자신을 질책하실 것 같습니다.
한해를 정리할 겸해서 이런저런 자료를 뒤적이다 올해는 어떤 책들이 잘 팔렸는지가 궁금해졌습니다. 한국출판인회의가 전국의 온·오프라인 서점 등의 도서판매 부수를 근거로 해 집계한 베스트셀러 순위를 보니 특이한 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댄 브라운이 쓴 '다빈치 코드'란 책이 12월 중반을 기준으로 무려 16주나 연속해서 1위에 올라와 있었습니다. 시중에 나온지 6개월 남짓만에 100만부 이상을 팔았다고 합니다. 그외에 '천사와 악마' '단테클럽' '진주 귀고리 소녀' '4의 규칙' '곤두박질' 등의 책도 상당한 판매실적을 올린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출판가에서는 이런 역사추리소설류의 책들을 '팩션(faction)소설'이라 부릅니다. '사실(fact)'과 '허구(fiction)'가 결합했다는 뜻입니다. 소설적 재미에다 독자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요소들이 많은 점이 독자들을 사로잡은 비결이라 여겨집니다.
실용서와 평전의 강세도 올해 출판가에서 주목할만한 일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합니다. 찬찬히 살펴 보니 불황에서 이겨 내는 법, 장사 잘하는 법 등을 다룬 책들이 올해에 꽤 많이 나왔습니다. 연초에 이순신 바람이 분 것을 시작으로 최근 장보고에 이르기까지 인물을 조명한 책들도 짭짤한 인기를 누렸습니다. 게릴라의 전설 체 게바라 관련 책들은 항상 일정 수준의 독자를 확보하고 있고 얼마전에는 그람시 평전도 출간됐습니다.
그런데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자니 언짢은 부분도 조금 있습니다. 우리 작가가 쓴 소설을 거의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연초에는 김훈씨의 '칼의 노래' 등이 제법 선전을 했고 지금은 박완서씨의 '그 남자네 집'이 상위권에 올라 있습니다만 전반적으로 외국 작가들의 팩션소설 돌풍에 휘말려 기를 펴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오죽했으면 부산 토박이 서점인 동보서적이 달마다 펴내는 '책소식'을 통해 "…우리 문단에 반가운 소식…박완서씨의 소설이 '드디어' 순위권내에 진입…"이라는 감격에 찬 글을 썼겠습니까.
'다빈치 코드' 등의 팩션소설처럼 속도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적 욕구를 채워주는 것도 아닌데 굳이 사명감에서 우리 소설을 읽자고는 말을 못하겠습니다. 독자가 우리 소설을 외면하는 이유를 작가들도 알아야 합니다. 다만 내심 우리가 그동안 우리 것에 대해 조금 무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은 듭니다.
네 밤만 더 자면 한 해가 저뭅니다. 내년 이맘때에는 지금의 아쉬움들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