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 매출 감소 [04/12/22]
 
[만물상] 교보문고 매출 감소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은 알아주는 애서가였다. 책이 물에 젖거나 손때가 묻지 않도록 셀로판지로 싸서 들고 다녔다. 20세 때는 탑골 공원 옆에서 서점 ‘마리서사’를 경영했다. 정지용 김기림 김광균 이봉구 오장환 장만영 김수영 등 시인 소설가 화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1956년 박인환이 31세 때 종로에서 술을 마신 후 돌아와 “아! 답답해” 하며 숨을 거둔 그의 집은 복개되기 전 중학천변에 있던 세종로 135번지였다. 책과 서점을 그토록 좋아하던 박인환의 집 자리에 지금 한국 최대의 서점이 서있으니 인연치곤 기이하다.

▶교보생명 창업자 신용호는 1980년대 초 광화문에 거대한 사옥을 지으며 지하공간을 어떻게 쓸까 고심했다. 서점을 해보라고 권한 게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이었다. 이병철은 일본을 자주 드나들며 ‘기노쿠니야’ ‘마루젠’ ‘산세이도’ 등 대형 서점의 운영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지식산업은 신용호의 꿈이기도 했다. 금싸라기 땅에 웬 서점이냐며 반대도 많았지만 신용호는 결단을 내렸다. 81년 교보문고가 개점하는 날 이병철은 신용호의 손을 꼭 쥐고 “잘했다”며 부러워했다.

▶23년 동안 광화문 교보문고는 우리나라 서점의 상징이었다. 매장 면적 2700평에 서가 길이 60리(24.7㎞), 그동안 1억5000만권(백두산 높이의 1000배)의 책이 이곳에서 팔렸다. 한국의 지적 흐름은 일단 이곳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흘러갔다. 모기업 교보생명은 기업 이미지 면에서 교보문고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개업 이래 한 번도 전년에 비해 매출이 떨어진 적이 없던 광화문 교보문고가 올해 처음 매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IMF 외환위기 때도 없던 일이다. 작년에 비해 0.91% 떨어진 것이다. 경기 침체로 돈이 없어 씀씀이를 줄이게 되자 일차적으로 문화 분야가 피해를 입고 있다.

▶배부르고 등 따습다고 책을 읽게 되는 게 아니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痴)라고 불렀다. 서출(庶出)에다 영양실조로 어머니를 잃은 극빈 속에서도 책만 읽는 바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영-정조 르네상스’로 일컬어지는 조선 후기 문예부흥은 정조에 의해 규장각 초대 검서관으로 임명됐던 이덕무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어려움을 헤쳐나갈 정신의 힘은 결국 책 속에 있다. 가난할 때 읽는 책이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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