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펼치며] 책방골목은 값진 문화상품 [2004. 12. 7]

무릇 세상의 모든 물건들은 시간이 지나면 값어치가 떨어지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것이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낸 공산품이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나라 승용차의 폐차 주기는 7.6년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기능과 아름다운 모양을 가진 새 차가 나오면 얼른 타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들의 심리일겁니다.

반면 이런 상식을 비웃는 물건들도 많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숨어 있는 고대유물이나 고려청자를 비롯한 도자기, 장인의 정신이 깃든 그림, 수백년이 지나도 본래 음색을 잃지 않는 수제 악기 등은 세월이 흘러갈 수록 더욱 찬란한 빛을 냅니다. 물론 책도 여기에서 빠질 수 없습니다.

'헌책'이라고 말하면 젊은 세대들은 손사래를 칠지 모릅니다. 도처에 깔린 것이 신품이고 능력만 된다면 얼마든지 새 것들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까닭이겠죠.

하지만 세상의 이런 외면과 달리 헌책은 때때로 훌륭한 문화상품이 될 수 있습니다.

영국의 웨일즈에 Hay On Wye(헤이 온 와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세계 최초, 그리고 세계 최고의 헌책방 마을입니다. 리처드 부스라는 이 곳 출신의 청년이 1961년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헌 책방을 열면서 신화가 시작됩니다. 부스는 특유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전국을 돌며 쓰레기로 취급되던 헌책을 종류를 가리지 않고 마구 사들였고 희귀본들을 되팔아 큰 수익을 남겼습니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인구 1500여명에 불과하던 이 마을에 40개가 넘는 서점이 들어섰습니다. 책을 사기는 고사하고 읽는 사람조차 없던 이곳이 개점 10년 만에 명실상부한 책마을로 탈바꿈했습니다. 나아가 부스는 만우절이었던 1977년 4월1일 헤이 온 와이 마을을 독립국으로 선언하고 자신은 왕의 자리에 오릅니다. 오늘날 헤이 온 와이는 'Kingdom of Books'로 전세계에 알려져 있으며 매년 5월 열리는 축제 때는 이 조그만 마을에 수만명의 관광객이 몰립니다.

헤이 온 와이에 비교하기는 부족하지만 부산에는 중구 보수동에 책방골목이 있습니다. 저는 부산에서 학창시설을 보내지 않은 까닭에 보수동에 대해 느끼는 바가 그다지 없습니다만 주위 사람들의 이 곳에 대한 추억은 상당합니다. 신학기가 되면 책을 팔고 사고, 또 교환하려는 책 보따리가 줄을 이었으며 개인이 가지고 있던 값진 고서들이 흘러 나와 수집가들을 들뜨게도 만들었다고 합니다. 한번이라도 책방골목 순례를 하지 않았다면 지성인의 대열에 끼지 못할 정도였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랬던 보수동 책방골목이 이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북적거리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50여개의 서점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는 분들은 물론이고 이 곳에 얽힌 추억을 가슴 저리도록 가지고 계신 분들도 안타까워합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최근 보수동 사람들이 책방골목 살리기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습니다. 홈페이지도 만들었고 그동안 띄엄띄엄 열렸던 책방골목축제를 내년에는 전시민 축제로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역사 관련 단체와의 연계도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책방골목 회생이라는 대의에 동감하신다면 관심을 기울여 주십시오. 짬을 내 책방골목을 한번쯤 들러주시길 독자여러분들께 권해봅니다. 저도 가보겠습니다.


(국제신문 염창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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