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에게 우리 그림책을” [04/12/12]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 '우리그림책展'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있는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 한쪽에 300여권의 그림책이 전시되는 뜻깊은 자리가 마련됐다. 오는 19일까지 ‘우리 아이에게 우리 책을’이란 주제로 열리는 전시회는 1980년대 초 우리 그림책이 처음 만들어진 시기부터 90년대 후반 붐을 타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그림책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동화작가와 도서관·출판사 관계자들이 지난 6월 모임을 결성한 ‘우리책 사랑모임’(cafe.daum.net/booksforchildren)의 첫 결과물이 바로 이 전시회다.

이제 그림책이라면 아이뿐 아니라 어른이 읽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질적인 면에서 눈부시게 성장하고 출판계에서도 그림책 시장이 어느 정도 형성된 지금, 왜 ‘우리 그림책’이 화두일까.

모임의 발기인인 동화작가 채인선(42)씨는 그림책이 아이들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매개물임을 강조한다. “4년 전 우연히 뉴질랜드 서점에 들렀는데, 외국 그림책과 자기네 그림책이 따로 전시돼 있었어요. 왜 그렇게 진열했느냐고 안내원에게 물으니까 아이들에게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해서라고 말하더군요. 폐쇄적인 것과는 개념이 달랐어요. 정체성을 가져야 자기 문화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고, 그런 뒤에야 더욱 열린 마음으로 밖의 것을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요.”

특히 아이들의 첫 책이 그림책이란 점을 감안하면 ‘우리 그림책’의 발자취는 더욱 중요해진다. 역사와 사회, 문화 등 우리 모습을 처음 만나는 곳이 바로 우리 그림책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10명 안팎의 회원들이 모여 부랴부랴 전시회를 준비했다.

1981년 출간되기 시작한 ‘그림나라 100’(동아출판공사)은 우리 그림책의 출발점이다. 빨간 표지가 유독 눈에 띄는 김형석의 ‘사과의 기도’를 비롯해 윤석중의 ‘달항아리’, 윤후명의 ‘섬에서 온 아이’, 박완서의 ‘7년동안의 잠’ 등 굵직한 작가들의 그림책이 눈길을 붙잡는다. 80년대 후반 외국 그림책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우리 그림책도 한층 세련돼졌다. 특히 류재수의 ‘백두산 이야기’(1988)는 현대 우리 그림책의 효시로 꼽히며 힘있는 색채가 돋보이는 그림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후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차츰 다양한 형태의 그림책이 등장한다. ‘한지돌이’ ‘떡잔치’ ‘갯벌이 좋아요’ 등 우리 민족의 생활 모습을 담은 책뿐 아니라 ‘우리 순이 어디 가지’ ‘심심해서 그랬어’ 등 생태계를 세밀화로 그려낸 그림책들이 선보였다. 1996년 출간된 권정생의 ‘강아지똥’은 그림뿐 아니라 텍스트의 중요성도 알리는 계기를 마련하며 꾸준히 인기를 모으고 있다.

2000년에 들어서면서 그림에도 다양한 시도가 이뤄졌다. 김재홍 그림의 ‘동강의 아이들’, 김동성 그림의 ‘메아리’ 등은 옛 시절의 기억을 서정적인 색채로 담아냈다. 텍스트 없이 그림만으로 이뤄진 류재수의 ‘노란 우산’은 2001년 미국 ‘뉴욕타임스 올해의 우수 그림책 10권’에 선정되기도 했다. 권윤덕의 ‘시리동동 거미동동’은 제주도의 풍경을 독특한 그림으로 풀어냈고, 김향수 그림의 ‘구름빵’은 오려붙이기를 통해 더욱 생생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지금 우리 그림책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그림작가 한병호(42)씨는 세분화, 전문화를 꼽는다. “창작동화에만 그림작가들이 쏠려 있는 상황이에요. 생태 분야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다른 분야는 여전히 부족하죠.” 특히 그림책이 장르의 구분이 아닌 형식의 구분이란 점에서 인문, 예술, 자연 등 그 안에 들어와야 할 다양한 콘텐츠도 함께 풀어야 할 숙제이다.

채인선씨는 이번 전시회가 그림책의 방향을 정하는 데도 일정부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껏 작가들이 어떤 주제를 정할 때 개인의 창작에만 의존해 왔어요. 흐름을 읽으면 자기 글의 방향을 더 쉽게 정할 수 있잖아요.”

그는 “유명한 외국 그림 작가의 이름을 외우는 부모들이 그러한 관심의 반만이라도 우리 그림책에 쏟으면 분명 더 좋은 그림책을 만드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동화작가 김남중(34)씨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림책이 어느 정도 성장을 이룬 지금 우리 그림책이 무엇인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어요. 단순히 우리 것에 대한 보호가 아니라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이뤄져야 할 것 같아요. 특히 우리 그림책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가능하도록 통로를 마련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죠.”

이번 전시회는 전국 어린이도서관을 순회하며 열릴 예정이다. 이와 함께 ‘우리 그림책 분리 진열’ 운동도 함께 벌일 계획이다. 이번 전시회가 우리 그림책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 채인선씨의 바람이기도 하다.

“세계화 국제화 시대에 정체성은 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지만 우리 세대와 달리 지금 커가는 아이들은 한국적인 정서 속에서 자라기가 힘들어요. 어느 게 우리 것인지, 남의 것인지 구별할 줄 알아야 두 문화의 장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닐까요. 날마다 그림책이 쏟아져 나오는 지금 자본 논리에만 매달릴 수 없어요. 그 안에 지켜내야 할 것들이 있는데, 경쟁 논리에만 머무르다보니까 너무 쉽게 지나쳐버린다는 점이 제일 아쉬운 부분이죠.”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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