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마당] 박노해 시인의 새벽 [04/12/13]
 
그의 변화에 대한 환영과 비판
'부드러운 혁명가'의 길

‘사회의 한 귀퉁이에서, 노동자가 피곤한 육신과 생활을 가누며 시를 쓰더라도 그리 놀라운 일은 못 된다…’

1985년 2월 한국일보 문화면에 이런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원고지 7장 정도 되는 기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그러나 그가 쓴 시가 평단의 주목을 받고 시집이 출판되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경이로운 일이다. 노동자 시인으로 알려진 박노해의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이 나온 지 4개월 반 만인 지난 주부터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처음으로 박노해 시인과 그의 시가 신문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정교하고 세련된 언어의 탑들 가운데, 땀과 기름 냄새 나는 노동자의 육성으로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 시집은 시인과 우리 사회에 질풍노도의 시대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예언이었다. 그 후 그는 6년의 수배생활과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으로 8년의 수감생활을 했다.

박 시인은 “그 기사를 쓰고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느냐?”고 물었지만, 그것은 그리 용기있는 기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과격하거나 위험한 시인이 아닌 것처럼 보이려고 애써 온건한 시를 인용한, 용기없는 기사이기도 했다. 인용 시는 ‘통박’과 ‘평온한 저녁을 위하여’ 두 편이었다.

‘노동의 새벽’이 나온 지 20년이 흘렀다. 20주년 기념 헌정앨범이 제작되고, 10일 이화여대 강당에서는 뜨거운 분위기 속에 ‘스무살 공순이의 노래’ 공연도 열렸다. 장사익 황병기 신해철 윤도현밴드 등이 참여했고, 고(故)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 전순옥씨도 ‘시다의 꿈’을 불렀다.

여러 성향의 유명 음악인들이 1970~80년대 젊은 노동자들이 겪은 고난과 인간적 외침, 쓰라림 등을 하나의 그리움처럼 열창한 것이다. 음반과 공연 수익금은 모두 외국인 노동자를 돕기 위해 쓰일 예정이다. 절판됐던 ‘노동의 새벽’도 재출간되었다.

박 시인은 그 동안 자신의 모든 저서를 거둬들였고, 정치나 언론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4년째 묵언(默言) 중이다. 그는 특별사면된 직후 언론에, 특히 보수신문에 자신의 변한 철학과 동시에 변하지 않은 신념을 과감하게 밝혔다. 아연했고 혼란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환영한 반면, 또 많은 이들은 강하게 비판하고 공격했다.

지금 그는 ‘나눔문화 운동’을 이끌고 있다. 함께 일하는 젊은이는 과거 주사파 운동가나 대학 총학생회장 출신들이 많고, 후원자는 각계각층에 넓게 퍼져 있다고 한다.

‘나눔문화’를 통해 그가 이루려 하는 바를 포착하기는 쉽지 않다. 추상적으로는 나눔과 영성, 평화 등이고, 현실적으로는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과 인간적 지원, 이라크 전쟁 반대,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배려 등 같다.

묵언이 끝나지 않는 것을 보면, 비판과 공격으로 받은 그의 상처가 꽤 깊은 모양이다. 비판자들은 아직도 그의 행위가 ‘타협인가, 변절인가’ 하는 의혹을 거두지 않은 듯하다.

여기서 그처럼 80년대 노동운동의 최첨단에 섰던 대표적 두 인물을 떠올린다. 김문수씨는 지금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되어 진보세력을 공격하고 있다. 사노맹 활동을 함께 했던 백태웅씨는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교수가 되어 있다. 이들은 타협인가 변절인가 발전인가.

박 시인처럼 과거 8년간 감옥에 있었고, 출옥 후 ‘생명운동’을 폈던 김지하 시인으로 생각을 옮겨본다. 그 역시 한때 맹렬한 비판을 받으면서도 사상적 순례를 계속했다. 사상의 중심을 ‘생명’에서 ‘율려’로 옮기기도 했다.

박 시인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는 법정에서 “나는 노동자이며 시인이며 혁명가”라고 단호하게 밝힌 바 있다. 그는 지금도 변함 없는 길을 가는 듯하다. 노동의 형태만 달라졌을 뿐, 그는 지금도 가난한 노동자이며 시인이다. 다만 강성 노동운동과 거리를 두는 대신, 외국인 노동자에게 관심을 확대한 부드러운 혁명가가 되어 있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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