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포럼]앙드레 쉬프랭의 충고 [2004. 11. 26]

미국 출판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지식인 사회의 존경받는 원로 앙드레 쉬프랭(69)이 지난주 한국을 다녀갔다. 그는 ‘역사란 무엇인가’로 잘 알려진 E. H. 카, 세계적 언어학자이며 비판적 지식인 놈 촘스키, 노벨상을 받은 스웨덴 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 등 수많은 저자들을 발굴해 무명의 지식인에서 세계적 유명 인사로 키운 장본인이다.

프랑스 출신 판테온사 대표 쉬프랭이 서울에 온 건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회사 대표인 페터 바이트하스, 출판유통 변호사 베레나 지히, 출판인 프랑크 투르만(KNV 사장), 영국의 피터 킬본, 브라이언 그린, 일본의 마에다 간지 등 거물 출판인들과 함께 한국 출판유통진흥원이 주최한 ‘한국출판포럼 2004’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세계화에 따른 출판계의 득실과 인류 미래의 향방에 관한 이 포럼은 양질의 책보다는 팔리는 책만 내고 있는 세계 출판계가 인수·합병을 거듭하면서 연예·오락·영상물과 연계된 다국적 복합출판기업 중심으로 재편되는 추세와 독립계 서점들의 급감, 책방 네트워크의 소멸, 책 안 읽는 사회 등 역경 속에서 출판유통의 활로 등에 대해 이틀 동안 스터디했다.

본격적인 토론은 인사동 뒷골목에 마련된 주최측과 외국 초청인사들의 저녁 식탁에서 더 활발하게 이어졌다. 쉬프랭은 미국출판 50년의 추이를 지켜본 세계 지성계의 리더답게, 세계화로 인한 영미 출판계의 위기와 미국 내 미디어 환경의 변화가 세계 다른 나라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하고 있었다.

“내가 최초로 낸 책이 카프카의 첫 책이었어요. 처음 600권을 찍고, 다시 800권을 찍었죠. 요즘 같으면 불가능한 일이죠. 대형 출판사들은 수익성 계산서를 미리 뽑아보고 등급이 낮은 책은 아예 중소업체로 미루거나 기획을 폐기하니 문화다양성 측면에서도 가치 있는 책들이 죽어버리죠. 학술서적을 내는 대학출판사도 마찬가지예요. 예전엔 컬럼비아대 출판부에서 유일하게 한국 책을 냈었지만 이젠 안 해요. 옥스퍼드대 출판부도 출판환경이 변했다며 현대시 출판을 중단했고, 학술적으로 중요한 ‘오푸스’와 ‘모던 마스터스’ 시리즈, 가치 있는 계열출판사 클라렌든프레스도 아예 없앴죠.”

책이 안 팔리니 팔리는 책 발굴에 혈안이 되고, 더 많은 종류의 책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양이 늘었다고 내용의 다양성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전파매체와 인터넷에 빼앗긴 독자들은 엄청난 쓰레기 정보 속에서 헤엄치고 있다. 강대국 위주 정보의 오버플로(overflow) 현상이 심해질수록 그 정보의 질을 변별하는 판단력과 새로운 창의력을 길러줄 독서·출판의 필요성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그러나 실제론 책이 더 많이 출간될수록 더욱 더 서로를 열심히 베끼고 있을 뿐, 적지만 가치 있는 책들의 출간은 점점사라지고 있다는 게 쉬프랭의 분석이다. 인류의 미래를 책임질 열린 마음과 비판적 사고력의 원천인 인문학적 교양의 부재는 독서 부족 때문이다. 나 역시 한국의 현실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장 큰 문제는 복합미디어의 등장과 ‘대중 취향에 맞추는 눈치보기’가 세계를 지배하게 됐다는 점이다. 쉬프랭은 이라크전쟁 발발 후 2년간 미국의 65개 방송국이 모두 한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제대로 된 비판서적이 한 권도 못 나온 점을 예로 들었다. 모두 미국인 75%가 “이라크 내 무기사찰은 옳은 일”이라고 응답한 여론조사 결과가 나온 뒤의 일이다. 쉬프랭은 촘스키의 비판서를 7000부 찍었지만 신문들이 실어 주지도 않았다고 했다. 지적인 작은 출판사와 의미 있는 이견(異見)들이 실종된 이후의 세계엔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문학 역사 철학 신화의 복원을 꿈꾸며 가시밭길을 가고 있는 한국의 출판인들을 위해 쉬프랭은 대기업 위주의 출판사 인수·합병 방지와 정부의 직접 지원, 인터넷을 통한 저자들의 다양한 출판 콘텐츠 전달과 소량 고급 출판의 활성화를 제안했다. 모두 국가가 출판의 중요성을 인식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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