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新풍속도  [04/11/23]
 
[문화산책―김병종] 언어의 新풍속도

종이 위의 언어가 전부이던 시절과 이동전화 컴퓨터의 언어가 대세를 이루는 오늘의 언어문화는 사뭇 달라져버렸다. 법정 스님이 근래 쓴 책을 소개하는 글에 ‘폭력의 시대…. 적게 보고 적게 듣고 적게 말하라’는 구절이 있었다. 건강 서적 같은데서 ‘적게 먹으라’는 말을 자주 접했지만 ‘적게 보라’ ‘적게 들으라’ 그리고 ‘적게 말하라’는 권유는 참 인상적이었다.

유학서는 학문에 입문하는 자에게 필수로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라고 권유하고 있는데 이 시대에는 이미 많이 보는 것도 많이 듣는 것도 모두 미덕이 아닌 것 같았다. 그만큼 볼 것,들을 것이 많은 것 같은데 실상은 보아서 좋은 것,들어서 유익한 것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 글을 읽으면서 문득 말의 값어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산 속에 혼자 사는 스님은 TV도 휴대전화도 없는 적막 속에서,그러나 소음 속에서는 들을 수 없는 영혼의 모음(母音)을 듣는다고 했다. 현대인들이 놓쳐버리는 대자연의 신비하고 아름다운 소리들을 듣는 것이다. 사람의 입으로 토해지는 말 대신 나무와 바람과 새들과 산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동전화의 발달과 함께 말의 홍수시대가 왔다. 하루 종일 말 속을 부유하는 느낌이다. 광장과 골목과 자동차와 지하철과 사무실 그 어디서고 수많은 말들과 부딪친다. 본디 말에는 말씀이라고 높여 한자로도 말씀 언(言)이라 했건만 오늘날의 말 값은 말씀 언을 달기가 무색할 정도이다.

얼마 전 한 잡지를 보니 어느 교수 한 분이 휴대전화 없이 사는 것이 화제처럼 떠올라 있었다. 교수 일 외에 지역에서 많은 일에 종사하는 그 분이 휴대전화 없이 지낸다는 것은 신선했다. 초기에는 공인이 그럴 수 있느냐고 비난이 빗발쳤지만 이제는 다들 그러려니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휴대전화 없이 사는 삶의 정신적 여유와 넉넉함이 매우 소중하여 자신은 약간의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휴대전화는 가질 맘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도 암중모색처럼 그 요망한(!) 기계를 없애버릴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청하지 않았는데도 지겹게 또 올라오는 성인광고의 문자 메시지들로부터 시작하여 열에 아홉은 불필요한 전화,받기 싫은 전화이니 참 짜증이 난다. “아아! 휴대전화만 없다 해도 훨씬 평화로울 텐데” 하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나만 없앤다 해서 해결날 사항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대중목욕탕 하고도 사우나에 들어와서까지 휴대전화를 받는 세상이니 말이다. 어느 의과대학 교수 분 얘기로는 산부인과에 진료받으러 와서 진료대에 누워서까지 휴대전화를 받는다니 손들지 않을 수 없다. 말이 많다보면 쓸 말이 별로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도 말이 많은 세상이 된 것일까.

어떤 글에 보니 인간 소외현상의 하나라고 하였다. 문명의 가속화 현상으로 점점 인간이 소외되고 그 소외와 공허가 견딜 수 없어 말을 많이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서로 끊임없이 말을 주고 받음으로써 존재를 인정하고 인정받으려 한다는 것이다. 언어적 확인으로 실존을 확신해야 안심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말 없이 서로의 눈빛만을 보고 돌아서도 정이 변치 않던 그런 시대는 이제 소설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이 가을 열흘쯤만이라도 휴대전화 울리지 않는 곳에서 살고 싶다. 나도 한번 가랑가랑 울리는 풍경소리와 소슬한 바람소리들 속에 밤을 맞고 싶다. 후두둑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을 깨고 싶다. TV와 컴퓨터 불빛이 없는 곳에서 어스름 저녁 빛을 맞고 싶다. 휘영청 떠오른 달빛을 보고 싶다. 새벽 미명 속에 깨어나는 나무와 풀들을 보고 싶다. 말 없음 속에 자연의 말들을 듣고 싶다. 아무도 해하지 않은 그 무욕한 말들을.

(김병종 화가·서울대 교수)=국민일보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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