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회 한국일보문학상 후보작 점검 <2> [04/11/16]
 
한국일보 문학상 본심의 대상작품 가운데 김경욱의 ‘장국영이 죽었다고?’, 김영하의 ‘은하철도 999’, 윤대녕의 ‘고래등’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특유의 유머로 그린 '이미지의 은하'
▲ 김영하 '은하철도 999'

김영하는 변신의 작가이다. 첫 작품집 '호출'에서는 소설 미학의 급진적인 가능성을 탐색했고, '아랑은 왜'에서는 소설 쓰기에 대한 흥미로운 성찰들을 보여주었으며, '검은꽃'에서는 영웅이 아니라 개인이 역사소설의 주인공일 수 있음을 입증한 바 있다.

최근에 발표된 단편들은 일상적 삶에 잠재된 다양성들을, 현실과 환상의 경계선 주변에 절묘하게 배치하는 솜씨를 보여준다. 단편 '은하철도 999' 역시 그러한 작품이다.

주인공은 강남역 스타벅스 앞에서 우주정거장 체류 희망자 모집 광고를 보았고, 이러저러한 사건을 경험한 뒤에 '은하철도 999'의 주제가를 흥얼거리며 모집 버스에 올라탄다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에는 두 가지의 전제가 숨어있다. 하나는 인간과 세계 모두가 기호와 이미지들로 구성된 은하(galaxy)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은 기호와 이미지로 구성된 은하를 떠도는 유목민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잠재된 기호-이미지와 세계가 방출하는 기호-이미지는 서로 접촉하고 부딪힌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소설적인 간지러움'이 생겨난다.

다양한 기호와 이미지가 충돌하는 우리의 삶 속에는 이미 언제나 소설이 꿈틀거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작품은 말한다. 기호와 이미지는 실체 없는 환상이나 허구가 아니라, 우리의 몸과 소설적 육체성의 문제라고. 작가 특유의 유머 속에서 전복적인 상상력이 은은하게 배어나는 작품이다.

대중문화에 매혹 당한 섬세한 관찰자
▲ 김경욱 '장국영이 죽었다고?'

소설은 작가가 지닌 세계관의 표현이고, 사회적 상황의 반영일 수도 있으며, 문학적 전통에 대한 반복과 전복의 과정이기도 하다. 소설가 김경욱은 대중문화의 기호와 이미지를 통해서 자신의 세계관, 사회적 상황, 문학적 전통을 이야기하는 작가이다. 단편 ‘장국영이 죽었다고?’는 2003년 4월 1일에 투신자살한 장국영을 둘러싸고 벌어진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피씨방에서 채팅을 하다가 장국영의 죽음을 알게 되고, 그가 출연했던 영화 ‘아비정전’에 대한 개인적인 추억을 더듬어간다.

그리고는 번개를 하러 나갔던 극장 앞의 풍경을 살펴보니, 자신도 모르는 상태에서 장국영 관련 플래시몹에 참여하고 있더라는 내용이다. 연배가 지긋한 세대에게는 전쟁과 빈곤의 경험이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겠지만, 젊은 세대에게는 대중문화가 삶의 기념비이고 추억의 매개항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국영은 한 세대의 문화적 기념비이다.

하지만 플래시몹에서 보듯이, 장국영에 대한 세대론적인 추억은 집단적이고 익명적인 퍼포먼스 속에서 휘발될 따름이다. 개인의 추억마저도 균질적인 정보로 환원되어 무한복제되는 시대의 문화적 초상이 여기에 있다.

김경욱에게 소설이란 대중문화에 매혹 당한 시선인 동시에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섬세한 관찰의 체계이다. 그는 대중문화의 기호를 통해서 현대성의 알레고리를 바라본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다시 묻는 작가
▲ 윤대녕 '고래등'

윤대녕은 은어(銀魚)를 닮은 작가이다. 첫 작품집 ‘은어낚시통신’에서 삶의 시원과 존재의 근원을 향해 힘겹지만 아름답게 거슬러 올라가던 모습을 기억한다. 은어가 힘이 부쳤던 것일까. 어느 작품부터라고 적시하기는 힘들지만, 지난 몇 년 동안 그의 작품들은 알게 모르게 서로 닮아 있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하천으로 거슬러 오르지 못하고 물결에 떠밀려 가는 은어가 연상되기도 했다. 하지만 단편 ‘고래등’은 윤대녕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예감하게 하는 작품이어서 주목의 대상이다. 고향에서 영어 선생을 하던 아버지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고향을 떠났고, 타향을 전전하면서 고생 끝에 처자식들 몰래 기와집을 샀는데, 정작 그 집에서 살지는 못하고 가끔 들러 커피나 마신다는 이야기이다.

비평가 김윤식이 지적했듯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지만 온정주의에 빠지지 않은 작품이다.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집(존재의 근거)에 대한 이야기이고, 동시에 인간의 보편적인 운명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래등이란 무엇인가.

고향을 떠나 자리를 잡은 전셋집 문 앞에 달아놓은 외등(外燈)인데, 그 모양이 고래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어디 그뿐이겠는가. 고래등은 내가 있어야 할 장소, 또는 그곳에 있으면 내가 살아서 존재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는 장소를 표시하는 기호가 아니겠는가. 이를 두고 존재의 적소성(適所性)이라고 할 것이다. 윤대녕이 다시 묻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김동식ㆍ문학평론가)=한국일보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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