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문학--그것은 자유·민주를 향한 투쟁입니다  [04/11/15]
 

이시영·김형수·신용복 시인에게 듣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어제·오늘·내일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첫술에 배부르랴 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없어라 많지 않아라/
모래알 하나로 적의 성벽에/ 입히는 상처 그런 일 작은 일에/ 자기의 모든 것을 던지는 사람은

-김남주 ‘모래 알 하나로’-

모래 알 하나로 시작한 지 오는 18일이면 꼬박 30년째이다. 1974년 11월 18일 서울 광화문 의사회관 앞. 고은 시인을 비롯한 30여 문인들의 외침이 시민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문학인 101인 선언’은 김지하 시인 석방 요구와 함께 창작 신앙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외침으로 시작됐다. 유신 시절 ‘인간 본연의 진실함’을 외친 그들의 목소리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자실)란 이름으로,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족문학작가회의’(작가회의)로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 12일 찾은 서울 마포구 아현동 작가회의 사무실. 30년이란 시간은 작가회의의 모습에도 변화를 줬다. 20평 남짓한 사무실이 70여평의 공간으로, 문학인 101인은 이제 1100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의 외침을 필요로 하는 곳도 바뀌었다. 강산이 세 번 바뀔 만큼 기나긴 시간을 앞만 보고 달려온 지금 창립 30돌은 그들에게 숨고르기를 권한다. 30년이란 시간이 남긴 기억을 이시영(55), 김형수(45), 신용목(30) 시인으로부터 들어본다.

74년 ‘문학인 101인 선언’의 떨림을 기억하는 이시영 시인은 작가회의의 태동을 4·19혁명에서 발견한다. “1960년 3·15 부정선거로 폭발한 4·19혁명은 근대 시민사회의 성숙을 가져왔습니다. 60년대 김수영 신동엽 시인에 이어 축적된 문학 운동이 70년대 유신체제에 들어서면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란 이름으로 극명하게 세상 밖으로 드러난 셈이죠.”

◆30년이란 시간이 남긴 흔적을 찾아=세 시인의 공통점은 작가회의에 굵직한 일이 있을 때 젊은 시인으로 참여했거나 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어린 나이로 ‘문학인 101인 선언’에 참여한 이시영 시인은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고은 시인이 그 전날 동대문에서 떠가지고 온 천에 ‘우리는 중단하지 않는다’를 써내려 갔습니다. 80년대까지 30명이 넘는 구속자를 내면서도 끊임없는 투쟁을 벌였습니다. 민주주의를 향한 열정을 그대로 지켜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죠. 하지만 자유실천만 했다면 여기까지 이어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투쟁을 통해 자기 문학을 꾸준히 변화시켰기에 가능했습니다. 74년 당시에도 황석영의 ‘객지’와 신경림의 ‘농무’라는 거대한 재산을 이미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뒤 살아있는 문학을 생산하는 문인들이 끊임없이 중심에 서 있었고, 지금도 작가회의이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문학 생산자란 위치가 가장 큰 자부심이죠.”

1980년 정부의 탄압 속에 활동을 멈춘 자실은 84년 재창립을 가졌다. 이때 자실에 가입한 김형수 시인은 자실의 의미를 ‘문학인들의 창작실천, 운동 조직, 이론이 함께 성장’한 데서 찾는다.

“5·18을 겪으면서 제가 가졌던 문학에 대한 관심이 전면 수정됐습니다. 이후 자실의 행동에 관심을 가졌고 등단 이후 이곳에서 활동하게 됐습니다. 포스터를 붙이고 농성을 하면서 현실이란 것이 얼마나 삼엄한 것인지 새삼 깨달았죠. 사회의 부조리에 대항해 젊은 에너지를 쏟아부은 선배들과 함께 하면서 화려한 과거를 갖게 됐습니다. 이제 남은 걱정은 화려한 과거들이 우리를 통과하면서 초라한 미래로 바뀌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것입니다.”

자실이 탄생할 무렵 태어난 신용목 시인은 2000년 등단하면서 회원 활동을 시작했다. “90년 거대한 사회 이슈의 끝자락만을 맛본 저에게 선배들의 경험은 미학이 사회학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기회였습니다. 이제는 사회현상들을 하나의 큰 맥락에서 보기는 힘들어졌습니다. 대신 사안별 반응을 해야 하죠. 달라지지 않은 점은 인간에 대한 애정, 사회에 대한 애정을 저변에 깔고 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민족이란 개념은 여전히 유효한가=30년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민족’은 낡은 틀로 혹은 미래의 걸림돌로 지적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민족문학이 여전히 유효함을 강조한다. 김형수 시인은 “민족문학이 열린 공간임”을 주목한다. “한 시대의 미학적 기준은 지배자의 용모란 말이 있습니다. 거기에 문제의식을 담고 저항해 자연의 용모를 기준으로 가져왔습니다. 그것을 제국주의 국가는 문학으로 지칭하고 침탈당한 사람은 민족문학으로 내세운 것이죠. 그 가치의 유효성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일제시대와 함께 시작한 근대문학은 우리 공동체를 네 개로 갈라 놓았습니다. 일제와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들, 그들에게 협조한 친일파, 평범한 삶을 살다 징발당한 사람들, 결국 이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자신이 살던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죠. 마지막으로 남은 이들이 그들을 기다리는 가족입니다. 그렇게 나누어진 갈래가 다시 모일 기회도 찾지 못한 채 산업화를 거쳐 지금에 이른 것이죠. 돌아간 고향은 이미 예전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삶의 뿌리를 찾지 못한 채 2대, 3대가 살고 있는 것이죠. 문학도 같은 상황입니다. 우리의 근원을 확보해야 민족문학을 버릴 것 아닙니까.”

신용목 시인은 “민족문학의 새로운 개념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세계문학을 지향해 쓴다고 해도 민족을 토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은 더 복잡한 얼개 속에서 민족문학이란 개념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죠. 자본주의가 전 세계적인 물결을 이루면서 민족이란 개념이 희미해진 경향도 있지만, 더 넓은 각도에서 바라보면 여전히 삶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시영 시인은 분단이 지속되는 한 민족문학은 여전히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로 본다. “한번도 제대로 된 민족국가를 이뤄보지도 못한 채 민족문학의 의미를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민족문학이 젊은 세대에게는 버거운 짐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결코 쉽게 버릴 수 있는 짐도 아닙니다.”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미래는=신용목 시인은 18일 열릴 30주년 기념식 행사에서 민작의 시련과 환희의 순간을 회고할 선언문을 이영주 시인과 함께 작성할 계획이다.

이시영 시인은 “평화 생태 보편적 규제를 향한 목소리”에서 민작의 미래를 엿본다. 특히 그러한 목소리에 힘을 싣기 위해 살아있는 문학 생산자라는 본연의 위치를 견고하게 지켜나갈 것을 주문한다. 범아시아 작가들과의 연대 구축, 남북민족작가대회 등 네트워크 형성에 힘쓰고 있는 김형수 시인은 “민작 30주년을 맞아 한국 문학이 발전하면서 파생된 문학적 칸막이의 해소”를 바람으로 꼽았다. “그 자리에 자연의 용모를 기준으로 한 미학을 통해 전 세계를 이끌어가는 구심점 역할에 우리 문학이 서 주었으면 하는 것이 소망입니다.”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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