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책의 운명

전통적인 독서의 계절로 꼽히는 10,11월을 맞았는데도 올해는 출판계의 형편이 말이 아니다. ‘단군 이래의 불황’이라는 표현이 어제 오늘의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난해까지는 책이 판매되는 커다란 흐름은 살아 있었다. 올해는 ‘대박’도 없고 ‘반짝 상품’도 없다. 인문·사회출판은 1990년대 중반 잘 나가던 때에 비해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고 문학과 아동도서는 매기가 끊긴지 꽤 된다.

책을 주인공으로 한 두 권의 소설이 신간으로 나와 있다. 유고슬라비아 작가 조란 지브코비치의 ‘책 죽이기’와 이탈리아 작가 안드레아 케르베이커의 ‘책의 자서전’은 책의 우울한 종말을 예견한다.

‘책 죽이기’는 세상을 빛내온 지적 생명체인 책이 멸종 위기로 치닫는 과정을 유머와 재채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책 읽기가 얼마나 불편하고 성가신지를 조목조목 들춰낸다. ‘책의 자서전’은 60세 된 책이 자신의 지나온 과정을 돌이켜보는 내용이다. 태어날 당시에는 ‘걸작 중의 걸작’으로 인기를 모았고 여러 작가들에게 지적 영양분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영화와 인터넷에 자리를 빼앗기고나서 자신의 가치를 후세에 전하고 싶다고 외치지만 애서가의 서가 한 귀퉁이에 갇힐 뿐이다.

이 두 권의 책은 디지털 시대의 책의 종말을 말하고 있지만 책이 외면당해가는 과정을 통해 오히려 책이 인간사회에서 얼마나 가치있는 발명품인지를 강조한다. 책을 통하지 않고서는 세상 사람들이 각자의 앞에 펼쳐져 있는 산을 넘을 수 없음을 웅변한다.

책 읽는 힘은 사회의 활력을 보여주는 일종의 지표가 되기도 한다. 미국 출판 통계사 보커가 발표한 통계보고에 의하면 2003년 미국의 도서출판은 19%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기·역사·종교서 등이 두 자릿수의 증가율을 보였고 특히 청소년 도서의 출판은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중국도 2003년에 12%의 증가율을 보였다. 중국은 특히 사상 서적과 항공·우주과학도서의 성장이 주목할 만하다.

일본은 전에 없는 출판 불황이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몇 백만부의 베스트셀러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인터넷과 휴대전화의 보급률이 가장 높은 한국사회에서 출판이 가장 급속하게 쇠락해가고 있음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문자 매체의 지성적 성찰력과 논리력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는 사회의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처세술 분야의 책만 명맥을 유지하는 사회의 병적 징후에 대한 처방이 나와야 한다. 책의 죽음을 수수방관해서는 안된다.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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