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선도 괴팍도 좋다… 상식적인 글은 쓰지말라"  [04/11/14]
 
앉아서 자료 찾아선 안돼… 현장체험 뒤 써야
문체·주인공 설정 등 모범답안 연구해 보기도
상금받아 뒤풀이 하고나니 원피스 한벌값 남아

내년도 신춘문예 공고가 나오는 11월 초부터 마감일인 12월 초까지, 그 한 달 동안 우리 땅의 문학적 에너지는 최고조에 오른다.

수백만 명이 신춘문예의 열병과 추억을 떠올릴 것이며, 그중 몇 십만 명은 지금부터 응모 원고에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세계 어떤 나라에도 없는, 80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만의 문화적 콘텐츠’다.

지금 한창 원고를 다듬고 있을 미래의 작가들을 위해 신춘문예 출신 소설가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다. 멀리는 40년 전부터 가깝게는 4년 전까지, 이 시기 가슴 두근대며 원고를 고치고 또 고쳤던 이들이다.

글쓰기의 먼 길을 출발하기 위해 신발끈을 여미는 이름 모를 후배들을 위해 소설가 최인호(1966·‘견습환자’·조선일보), 하성란(1996·‘풀’·서울신문), 윤성희(1999·‘레고로 만든 집’·동아일보)씨는 “독선도 괴팍도 좋다. 상식적인 일은 하지 말라” “신춘문예는 당선자 몇 명보다 응모자 수십만 명을 위한 축전(祝典)” “고교 3학년 때부터 투고를 시작, 내리 여덟 번을 떨어진 다음에 당선됐다”고 말했다.

▲최인호=당시 상금이 10만원이었다. 그걸로 어머니 틀니를 해드렸다. 지금도 신춘문예가 가까이 오면 가슴이 설렌다. 나는 당선되던 1966년 한 해에만 작품 10개를 써서 모든 신문에 응모했고 소감까지 미리 써두었다가 건방지단 소리를 듣기도 했다. 11월까지 놀다가 벼락공부하듯 열흘 만에 집중적으로 작품을 만드는 것도 나무랄 일은 아니다.

▲윤성희=떨어지고 나면 ‘심사위원의 취향이 구닥다리였다’고 욕하는 사람이 있지만, 시류에 편승할 것 없이 자기 목소리를 내서 쓰면 된다.

(해마다 ‘신춘문예용 작품이 있다’는 비판이 높다. 특정 신문사와 심사위원 취향에 맞춰 소재·주제·문체를 택하는 작품이 적지 않고, 그중 당선작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하성란=상금으로 뒤풀이를 하고 나니 원피스 한 벌 값이 남았다. 작품에서 비가 오는 것보다 눈이 오는 것이 유리하다는 얘기까지 있었다. 나는 모범답안이 있다고 생각하고 10년을 공부했으며 주제, 문체, 끝마무리, 주인공 설정까지 모두 통계를 내기도 했다. 자신만의 문학을 하는 것은 이러한 관문을 통과하고 난 다음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윤성희=사람의 능력이 얼마나 좋으면 신춘문예용을 따로 쓰겠느냐. 다만 작품의 앞부분이 재미없으면 아예 안 읽는다는 건 맞다.

▲최인호=(나도) 심사 때 첫 장만 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 소설의 중요한 테크닉은 주제가 앞을 리드하는 것이다(시작이 중요하다).

▲하성란·윤성희=‘신춘문예에도 유행이 있다’고 수군거리며 ‘올해의 트렌드’를 점치는 응모자들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자료를 앉아서 구하지 않고 현장에서 체험을 한 뒤 쓰는 것이다. 그런 작품이 당선된다.

▲최인호=신춘문예는 신성한 제사를 집전하는 문학적 사제를 키우는 작업이다. 신춘문예를 광범위하게 심화시키고 이 땅의 문학 청년들의 가슴을 뜨겁게 흥분시켜 달라. 그래서 내 밥그릇을 빼앗길 것 같은, 질투심 나는, 패기 만만하게 좋은 작품을 쓰는 작가가 나왔으면 좋겠다.

▲하성란=어떤 사람이 우체국에 가서 대신 부쳐 주면 당선작이 나온다더라는 징크스도 있었다. 정작 그 본인은 아직 등단을 못했다. 셸리의 시처럼 ‘늦가을에 서서 겨울을 건너뛰고 봄을 생각하는’ 등단 양식이 신춘문예라고 생각한다. 우리 땐 친구끼리 장난으로 당선통보 전화를 걸기도 해서 나는 거꾸로 신문사에 재확인했다. 소설은 모방하면서 배운다.

▲윤성희=신춘문예에 응모하면 한 살 더 먹는게 아니라 두세 살을 더 먹는 것 같다. 우체국에 가서 응모작을 부치던 일, 1월 1일, 쓰레기가 날리는 것 같은 분위기 속에 (다른 사람의) 당선작이 실린 신문뭉치를 사들고 쓸쓸하게 들어오던 일, 그리고 당선 통지를 받았을 때의 행복한 기억은 지금도 나에게 소설을 쓰게 하는 가장 귀중한 힘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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