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04/11/14]
 
[편집자레터] 그 많던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몇 개월 전에 독자 한 분이 북리뷰 담당 기자의 일과가 궁금하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온 적이 있습니다. 저의 일과는 출근길 전철 안에서 시작합니다. 책을 읽고 계시는 분들의 손에는 과연 어떤 책이 들려 있나 살피는 거지요. 그래야 독자들과 함께 호흡하는 북섹션을 내놓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드물게 책을 읽는 사람을 만나면 꼭 책 제목을 확인한답니다.

요 며칠 사이에는 인생이 뭔지, 죽음이 뭔지를 곱씹게 하는 미치 앨봄의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을 읽는 아주머니를 보며 가을에 아주 잘 어울리는 책을 잡았다고 생각했고, 회사원처럼 보이는 사람의 손에 『필리핀의 정치변동과 정치과정』(정영국 지음)이 들린 것을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같은 소설을 원서로 읽는 사람도 부쩍 눈에 띕니다. 이번 주 편집자 레터의 제목은 어떤 사람이 읽는 영어책 제목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Where Have All the Intellectuals Gone?』이라고.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박완서씨의 소설 덕에 제목이 쉽게 외워졌습니다. 인터넷을 뒤졌더니 작가는 영국의 좌파 지식인 프랭크 푸레디였고, 천박해진 지식계를 질타한 이 책을 놓고 영국 지식인들 사이에 논쟁이 뜨겁다는 기사도 떴습니다.

영국도 한국과 상황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푸레디는 지식계와 문화계가 실용적인 면만 좇다 보니 예전에 비해 많이 천박해졌고, 그 결과 토론문화가 쇠퇴하고 정치 무관심이 팽배하게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인터넷 시대 시민들의 ‘참여’라는 것도 실은 우리로 치면 민주화운동처럼 몸과 맘을 바친 노력이 전제되지 않은 것이어서 자칫 ‘체제순응주의(conformism)’로 빠질 위험이 있다는 분석도 눈길을 끕니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긴 안목으로 사회의 흐름을 앞서 볼 줄 아는 지식인들이 설 땅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현실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기도 하지요.

영국에서 9월 초에 출간된 책을 11월 서울의 전철 안에서 읽는 그 독자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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