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 진실과 현실적 진실 [04/11/12]
 
<동아일보>는 제1면에다 ‘국어교과서 맞습니까’(2004. 10. 14)를 크게 실었다. 국립국어연구원이 초중고 국정교과서 문장분석을 토대로 작성한 이 기사에서 내 눈이 잠시 머문 곳은 문장 오류 사례의 하나로 지적된, “그 날은 프랑스어의 마지막 수업이 있었다”였다. ‘수업이 있었다’는 ‘수업이었다’로 해야 맞는다는 것. 아마도 그러하리라.

아직도 중학교 교과서에 알퐁스 도데(1840~1897)의 단편 <마지막 수업>이 실려 있을까. 궁금하여 현행 중학 국어교과서(제7차년도)를 잠시 살펴보았으나, 보이지 않았고 다만 어느 학생이 쓴 <마지막 수업을 읽고>라는 짤막한 독후감이 실려 있었다. 그 끝대목이 이러하다. “나는 자기 나라 말도 못쓰게 된 프란츠가 너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라고.

프랑스가 프로이센(독일)에 패배한 1871년에서 73년 사이에 쓴 소품들을 모은 <월요 이야기> 첫머리에 놓인 <마지막 수업>은 ‘알사스의 소년(un petit Alsacien)’이란 부제를 갖고 있다. 주인공 소년은 프란츠(Frantz). 선생은 아멜(Hamel). “놈들은 저 비둘기들에게도 독일어로 노래부르라고 하지 않을까”라고 프란츠 소년은 분노하고 있다.

이 소설을 그동안 우리 국정교과서는 줄기차게 실어서 가르쳤다. 그만한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 민족은 36년간 일제 식민지 체제 속에 편입되어 있었다. 일제 통치부가 조선어까지 식민지 체제 밑에 두고자 한 것은 저 악명 높은 조선어학회 사건(1942. 10) 이후이다. 이 무렵 국민학교에 다닌 나는 기묘한 장면 속에 놓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학교 내에서는 누구나 일본어로 말해야 하며 만일 어긴다면 벌을 서야 했음이 그것. 초급학년인 우리 또래에겐 일본말 사용이란 누가 보아도 무리였다. 학교에서도 이를 감안, 한 가지 조건을 달아놓았다. 표현코자 하는 일본어를 모를 경우엔 상대방에게 ‘조선말을 써도 좋겠는가’라고 일본말을 사용해 양해를 구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긴 해도 이것은 어린 우리들에겐 가혹한 행위임에 틀림없었다. 잠꼬대까지 간섭해 들어왔으니까. 학교 가기가 싫어지기에 앞서 두려웠던 것이다. 프랑스 작가 도데는 이러한 체험 세대의 심사를 어쩌면 그토록 용케도 잘 드러냈을까. 여기까지가 문학이며 소위 문학적 진실이 깃드는 영역이다.

현실적 진실은 이와 별개로 있었다. 앞에서 주인공 소년 이름과 선생 이름을 미리 보였거니와 소년 이름은 프란츠 곧 독일계임이 판명된다. 선생은 그러니까 프랑스계이다. 알사스 지방은 또 어떠한 곳인가. 한 연구자가 밝혀놓은 바에 의하면 독·불 국경지대인 이곳은 당초부터 압도적으로 독일어 사용지대라는 것. 1910년대 이 지방 주민 94.6%가 독일어를 사용했다는 것. 주민 100인 중 프랑스어(50%), 방언(86%), 독일어(82%) 등 세 가지가 사용되었고, 특히 방언 사용은 제2차 대전 후 프랑스령으로 된 1946년엔 90.7%로 되어 있지 않겠는가(다나카 가츠히코, <말과 국가>, 1981). 독일계 소년이 “놈들은 저 비둘기들에게도…”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현실적 진실은 문학적 진실과 별개로 존재하고 있다. 모르긴 해도 소설 <마지막 수업>이 가장 감수성 예민한 그 나라 중학생용 교과서에 지속적으로 실린 사례란 우리의 경우뿐인지도 모를 일이다. 중요한 것은 문학적 진실과 현실적 진실을 가릴 줄 아는 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쯤 이 나라 중학생도 그런 수준에 와 있지 않을까.

(김윤식 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한겨레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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