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타고 헌책방 나들이  [04/11/12]
 
<1> 곳곳에 있는 헌책방 즐기기

강변역에서 광화문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에 헌책방이 여러 곳 있어요. 먼저 자양동에서 <대성서점>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수동에서는 <천지서적>을 만날 수 있고요, 한양대학교 옆 한양여고 건너편에서는 <조은책방>을 만날 수 있습니다. 동대문운동장 둘레에서 꺾어 들어가면 황학동과 청계천에 줄줄이 늘어선 헌책방도 찾아갈 수 있고, 청구역 둘레에는 <헌책백화점>이란 곳이 있습니다. 동대문운동장에서 혜화동 쪽으로 접어들면, 혜화여고 자리 옆에 <혜성서점>이 있고, 삼선동까지 넘어가면 <삼선서림>이 있어요.

헌책방을 즐겨 다니지 않는 분들에게는 깜짝 놀랄 일일 수 있습니다. 아니, 헌책방이 여기저기에 그렇게 많단 말야 하면서요. 이밖에도 여러 곳이 더 있는데, 이렇게 많은 헌책방이 서울 시내 곳곳에 있다는 걸 아신다면, 틈틈이 즐겁게 헌책방 나들이를 할 수 있고, 멋진 책을 살뜰하게 즐길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수첩에 헌책방 연락처와 얼추 찾아가는 길을 적어 놓고 다닌다고 합니다. 일을 보거나 누구를 만날 때 그곳 둘레에 헌책방이 있으면 약속장소로 먼저 가서 헌책방을 찾아보거나, 일을 마친 뒤 조금 느긋하게 시간을 남겨서 잠깐씩 찾아가서 책을 즐긴다고 해요.

헌책방 나들이도 삶입니다. 누구를 만나기로 했을 때 헌책방에서 만나도 좋고, 잠깐 헌책방에 들러 만날 사람에게 선물할 책 한 권 값싸게 사는 일도 좋아요. 괜찮지 않나요? 좋은 읽을거리를 천 원이나 이천 원, 또는 삼사천 원에 한 권 사서 건네는 일 말입니다. 자기가 읽을 책도 하나 사고 동무에게 선사할 책도 하나 산다면 그만큼 마음이 푸짐하고 거뜬해질 수 있습니다.

<2> 느긋하게 구경하는 책

집으로 가던 자전거를 잠깐 멈추어 헌책방에 들어갑니다. 오랫동안 자전거를 탄 터라 다리도 쉬고 머리도 채우고자 헌책방에 들어갑니다. 자전거를 접어서 책방 한켠에 세워 둡니다. 가방은 자전거 위에 얹고 둘레둘레 책을 구경합니다.

1980년판 <한글 맞춤법 풀이(김계곤 지음), 문성출판사(1980)>가 보이는군요. 이미 바뀌어 버린 맞춤법이라(1989년에) 쓸모가 없는 책이라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저에게는 쓸모가 있습니다. 맞춤법이 달라져 온 흐름을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되거든요.

자양동 <대성서점>에는 기독교 쪽 책이 퍽 많습니다. 오래 묵은 <기독교사상> 잡지부터 요새 것도 퍽 많이 있어서 이쪽 자료를 찾는 분들에게 크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를 들춰봅니다. 그러다가 <기독교사상> 1960년 10월호 한 권을 집습니다.

이런 잡지는 철 지난 책이지만 잘 살피면 종교계에서 퍽 훌륭한 일을 한 분들이 남긴 좋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1960년 10월호에는 김재준 목사가 쓴 '기독교학교의 기초이념'이란 글이 있군요. 다른 분 글들도 퍽 괜찮습니다. 그리고, 책 앞에 있는 머리글을 읽다 보니 1960년 10월 우리 사회가 어떠했는가 얼추 짐작이 됩니다. 긴 글 가운데 두 단락을 옮겨 보겠습니다. 맞춤법은 그때 것 그대로 적습니다.

.. 4월혁명의 역사적인 과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실시된 총선거가 끝난 지도 1개월반이 지났고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선출을 끝맺은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다. 그러나 국회는 아직도 국회법의 개정을 완결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교섭단체의 구성을 위시하여 지방자치법의 개정, 경찰중립법안의 심의등 시급히 처리 해야할 일들을 미루어 논 채 일시에 비대해진 민주당내의 파쟁으로 여-야의 구별조차 석연치 않은 형편이다. 혁명을 통하여 독재정권을 타도해 버린 지 5개월이 가까와 오는 지금까지 국회와 정부가 이 모양이고 보니, 행정질서는 극도로 문란하여 지고 치안 또한 엉망이어서 무장간첩이 백주에 서울시내를 출입하고 강력범들이 검, 경 간부들의 무시 무시한 담화 발표에 아랑곳 없이 날뛰고 있으며, 부정축재자의 처리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서 필수품들의 생산이 급속도로 저하 되고 있고 한편 밀수품은 나날이 그 범람도가 늘어서 국민 경제를 크게 위협하고 있는 형편이다 .. "새 정부와 국회에 바라는 것 - 머릿글"

참 곧은 목소리입니다. 더구나 안타까운 우리네 지난 역사예요. 얼마 앞서 '한기총'이라고 하는 모임에서 시청 앞 집회를 해서 '부시 존경'과 '정권 타도'와 '국보법 그대로 둘 것'들을 외쳤잖습니까. 이런 형편없는 주장이나 외치는 사람들과 견줘 지난날 <기독교사상>이란 잡지를 엮은 분들, 또 그때 글을 쓴 분들 생각이나 마음가짐은 참으로 돋보입니다. 이런 목소리를 들려줘야 종교계도 바로서고, 사회와 나라도 바로설 수 있지 싶어요.

<3> 헌책에서 느끼는 역사

<小瀧淳謹 지음-명치천황 어제일일일훈(御製一日一訓),天泉社(1942)>이란 책도 구경합니다. 퍽 오래된 책입니다. 일본 책이기에 읽지는 못하지만, 한자를 읽으며 줄거리를 짐작해 봅니다. 아, 이 책은 우리로서는 일제 강점기 때 '명치천황'이 '황국신민'에게 '하루에 한 가지씩 가르칠 것'을 '하사하신' 이야기를 모았군요.

이 책을 누가 보았을까요? 지난날 이 땅에서 한국사람에게 황민화 교육을 시킨 분이 보았을까요? 억지로 황민화 교육을 받아야 한 분이 보았을까요? 아니면 이 땅으로 쳐들어와 이 땅을 짓밟은 일본사람이 보았을까요? 책은 남았으나 책 임자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아 여러모로 궁금증만 부풀어오릅니다.

지난 여름에 연세대학교 앞에 있는 헌책방에서 <배상규 옮김-교육실천자료,교육실천회(대정12년)>란 작은 책을 만난 적 있습니다. <교육실천자료>란 다름아닌 '교육칙어'를 풀이한 책으로, '일본천황폐하'께서 '황국신민'에게 '하사하신' 말씀을 담은 책입니다. <교육실천자료>라는 책 뒤를 보면, '쳠원은 이 책을 슉독하고 매일 일행식실행하야 주십시요'라고 적혀 있고 그 옆에 "기증자 양평군수"로 되어 있어요. "기증자 양평군수"란 말이 인쇄된 모습을 보고 한 번 더 놀랐는데요, 그때는 양평군수뿐 아니라 다른 군수도 이렇게 '교육칙어'를 나랏돈으로 찍어서 '황민화 교육'에 앞장섰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즘 친일부역 청산 이야기가 높은데, 이처럼 눈에 잘 드러나지 않으나 흔적으로 또렷하게 남아 있는 '황민화 교육' 문제도 낱낱이 짚고 살펴서 썩은 살을 도려내야지 싶습니다.

<4> 푸근함을 듬뿍 안고

고른 책을 보여 드리고 책값을 셈합니다. 아주머니가 부르는 책값이 제가 생각했던 값보다 훨씬 적어서, "이렇게 싸게 주셔도 돼요?"하고 물으니, "받을 값은 다 받았다"고 하셔서, 좀 비쌀지 모른다고 느껴서 군침만 삼킨 책 몇 권을 더 얹어서 삽니다. 반가운 책은 반가운 책대로 뿌듯하게 즐기고, 아주머니 인심은 또 인심대로 푸근하게 듬뿍 안고 책방 문을 나섭니다.

고른 책은 자전거 짐칸에 튼튼하게 맵니다. 자전거를 탔습니다. 짐칸에 실린 책 무게가 느껴지는군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넘는 언덕길 몇 곳에서 조금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기분 좋은 무게입니다. 뿌듯함과 푸근함을 듬뿍 안은 무게거든요. 집으로 돌아오고 보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습니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습니다. 그런데도 씨익 웃음이 났습니다. 다음에는 자전거 타고 조금 더 먼 나들이를 떠나 볼 생각입니다.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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