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회 한국일보문학상 후보작 선정 [04/11/09]
 
다양성 뿌리내려 문학적 지평 넓혀
개성 강한 수작들로 심사에 난항
9개작 추천… 장평부진 아쉬워
최종 수상작 이달 하순 발표

“우리 문학의 스펙트럼이 넓어졌다. 소설의 시각과 방법론, 소설을 통해 지향하는 바가 한층 다양해졌다.”

제37회 한국일보문학상 예심을 맡은 문학평론가 김동식, 김형중,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씨는 8일 저녁 한국일보사 12층 송현클럽에서 열린 후보작 심사에서 한국문학이 다양성의 굳건한 토대를 마련했다는데 입을 모았다. 후보작 선정은 이 다채로움을 확인하고 그 성취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작업이었다.

● 심사경과 및 결과

심사는 2003년 10월부터 2004년 9월까지 국내 20개 계간ㆍ월간 문예지에 발표된 중ㆍ단편 소설과 단행본으로 묶여 나온 장편소설, 같은 기간 출간된 소설집에 수록된 2002년 10월 이후 작품이 대상이었다.

심사는 3시간 가까이 난항했다. 당초 5편 내외를 염두에 두고 논의를 시작한 위원들은 가까스로 9편으로 심사를 매듭지었고, 이어진 뒤풀이 자리에서도 몇몇 작가와 작품들을 거론하며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선정된 작가와 작품은 강영숙의‘태국풍의 상아색 샌들’김경욱의‘장국영이 죽었다고?’김연수의‘거짓된 마음의 역사’김영하의‘은하철도999’박민규의‘카스테라’윤대녕의‘고래등’정지아의‘미스터존’천운영의‘명랑’한강의‘채식주의자’.

위원들은 “올해는 눈에 띄는 장편소설이 없었다”는 점을 아쉬운 대목으로 지적했고, 문학의 짧아진 순환주기를 감안할 때 예심에 아깝게 탈락한 새로운 작가들이 향후 2, 3년 내에 문단의 주력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최종심 결과는 이 달 하순께 확정, 발표할 예정이다.

● 후보작에 대하여

강영숙의 ‘태국풍의 상아색 샌들’은 작가 특유의 다국적(혹은 무국적) 감수성이 돋보인 작품으로 평가됐다. 가부장적 가족질서로부터 이탈을 추구하던 여러 여성작가들과 달리 애초부터 전통질서 바깥에서 소설을 썼던 작가의 낯선 감성은 한국적 리얼리즘의 껍질을 깨는 시도로 주목됐다.

김경욱의 ‘장국영이 죽었다고?’는 초기 습작의 테두리를 벗어난 듯한 작가의 기운이 느껴지는 작품으로 꼽혔다. 즉, 그가 즐겨 구사한 대중문화적 코드가 장식, 소품 혹은 배경의 의미를 넘어 세계와 세대 속에 존재하는 주체의 위치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틀로 변모하고 있다는 점이 호감을 샀다.

김연수는 소설 속에 역사를 담는 방식을 통해 드문 문학적 성취를 거둔 작가로 평가됐다. ‘거짓된 마음의 역사’는 허구적 텍스트와 역사적 사실의 결합이라는, 소설적 세계인식의 문제를 돋보이는 방식으로 제시한 작품으로, ‘부능쒀’와 질긴 저울질 끝에 본상 후보작으로 뽑혔다.

최근 여러 문학상을 통해 집중 조명을 받은 바 있는 김영하는 이번 심사에서도 빠지지 않았다. 지나치게 진지하거나 무겁던, 그래서 ‘고통의 문학’이라고까지 명명됐던 한국문학의 주류에 ‘즐거움의 코드’를 얹었다는 점, 그 도정에 ‘은하철도 999’가 빛난다는 평가였다.

박민규는 새로운 시도들을 통해 소설의 영역을 넓히는 작가로 심사 위원들의 주목을 끌었다. 특히 ‘카스테라’는 인터넷 문법을 넘나드는 독특한 글쓰기 스타일과 하위문화적 감수성을 통해 전통적 소설 장르 개념을 뒤집으려는 듯한 작가의 ‘창작론’으로 읽히는 작품이다.

예심을 통과한 작가 가운데 최고령인 윤대녕은 근작 ‘고래등’에서 변화의 긍정적 시도에 성공했다. 초기작 ‘은어낚시통신’에서 보였던 ‘존재의 시원 회귀’ ‘자기애’를 넘나드는 긴 모색기를 거쳐 존재론적 의미 너머의 운명과 사랑으로 작가의 눈이 확장되고 깊어졌다는 평가다.

정지아의 경우 자기세대에 대한 끈덕진 책임의식과 문학적 형상화 노력이 주목됐다. ‘미스터 존’은 운동권 후일담 소설들이 주춤대던 대책 없는 낭만화나 경험에의 함몰, 방향을 잃고 떠도는 식의 부정적 경향을 극복하고 윤리적 부채의식으로부터도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멍게 뒷맛’으로 지난해 본상 최종심까지 올랐던 천운영은 ‘명랑’으로 다시 본선에 올랐다. 체험하지 않고는 글을 쓸 수 없고, 체험의 부재를 체험의 생산을 통해 극복해 온 작가의 이번 작품은 체험적 글쓰기의 영역이 환상성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인상을 남겼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여성작가로서의 색깔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작품이라는 평가. 낡은 관습과 남성성을 상징하는 고기(육식성)를 극단적으로 거부하는 등장인물을 통해 치열한 작가적 문제의식을 극단으로까지 밀어올리는 뚝심이 돋보였다는 분석이었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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