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스승에게 길을 묻다  [04/11/09]
 
아이들 손에는 책 대신 핸드폰이 있습니다"
"책은 자연스럽게 人生문제를 푸는 비밀 열쇠죠"

박맹호(朴孟浩·70) 민음사 대표와 이갑수(李甲洙·45) 궁리 출판사 대표는 각별한 사제지간이다. 이 대표는 박 대표가 창간한 ‘세계의 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박 대표의 권유로 민음사에 입사해 편집장과 사이언스북스 대표를 지내는 등 약 8년간 출판을 배웠다. 인문학 대중화에 기여한 국내 대표적 단행본 출판인으로 꼽히는 박 대표는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1966년 민음사를 창립했다. 76년 문학계간지 ‘세계의 문학’ 창간과 함께 제정한 ‘오늘의 작가상’을 통해 한수산 박영한 이문열 조성기 등 수상자들을 배출했다. 1985년 대통령표창, 1990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서울대 식물학과를 나온 이 대표는 짧지 않은 방황 끝에 서른이 넘어 ‘천직’인 출판계에 입문했으며, 1998년 창립한 궁리출판 대표로 있다.

▲이갑수=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과 말 중에서 무게 있는 것들이 침전돼 책으로 남습니다. 평생 책을 만들어오면서 책은 무엇이었습니까?

▲박맹호=나에게 책은 천재들을 만나는 자연스러운 방법이었습니다. 가령 김수영과 니체를 만나는 것, 베토벤의 생애에 젖어 보는 것, 철학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 이 모두가 책을 통해 가능했습니다. 우리가 존경하고 흠모하는 인생의 교사들을 누구나 손쉽게 만나는 것, 그게 바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우리 사회는 평생교육을 부르짖고 있습니다만, 출판의 교육적 기능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식이나 교양의 전수가 칠판 앞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출판사도 진리를 전파하는 교육기구라 할 수 있겠는데요.

▲박=물론입니다. 학교에서도 많은 것을 배우지만 책을 통한 배움도 이에 못지않습니다. 우리는 책에서 인생의 다양한 좌절과 성취와 깨달음을 발견하고 그로부터 자극을 받습니다. 요즘 젊은 부모들이 아이들 과외에 치중하는 것을 봅니다만, 사람이 성숙해지는 것은 책을 만났을 때부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대부분 사람들이 학교를 떠나면 공부는 끝이라고 치부합니다. 학창 시절 교과서 읽기가 독서의 전부인 사람들도 많습니다. 책을 골치 아픈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한 말씀 하신다면?

▲박=책에는 어느 순간 전율로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책에 다가가야 할지 그 방법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책은 쉽고 재미있는 것부터, 예를 들면 대중소설부터 시작해도 됩니다. 책을 읽어라 읽어라 너무 강요하다 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납니다. 어린이들에게는 만화나 애니메이션같이 쉬운 것부터 시작해 사물의 본질을 터득해 나가라고 권유하고 싶습니다.

▲이=고려대 이남호 교수가 쓴 ‘박맹호론’을 보니 “민음사는 우리 사회의 결여된 부분으로 촉수를 지속적으로 뻗어나감으로써 새로운 출판시장을 개척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박=개척했다는 것은 좀 과분한 표현이고요. 출판이란 사회의 모든 현상을 체계화하고 에너지화하는 겁니다. 사물은 끊임없이 생성·소멸하므로 항상 새롭게 접근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따라서 출판 기획의 대상이란 거의 무궁무진하다고 하겠습니다.

▲이=출판의 어려운 상황을 정면 돌파하면서 새 국면을 전개해 왔고,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포착해 기민하게 대응한다는 세간의 평도 받으셨습니다. 이러한 것을 가능케 한 동력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박=초창기에는 돈은 안 되고 빚만 쌓이면서 집사람이 쓰러지기도 했지요. 이런 시기를 거치면서 저 나름대로 개안을 했다고 할까, 터득한 게 있습니다. 이왕 돈을 쓰려면 손해를 보더라도 제대로 좀 하자, 가치 있는 일을 하자, 내가 좋아하되 남들은 잘 안 하는 것을 하자고요. 그래서 제일 안 팔리는 시집·문학평론·창작물을 출판하기 시작했고, 독자들이 손쉽게 다가올 수 있도록 가격도 대폭 내리고, 신인들도 과감히 발굴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획들이 젊은 세대의 욕구와 감각에 맞았고 시대의 흐름에도 부응했던 것이겠지요.

▲이=어느 대담에서 하신 말씀을 보니 책은 폭풍 속에서 자라나야 한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한국 출판의 자생력을 강조한 말씀이겠지요.

▲박=물론 그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처럼 격변의 세기를 산 민족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10년 단위로 전쟁과 혁명을 겪었고, 이데올로기의 급격한 변화도 경험했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생존해 왔습니다. 바람에 흔들리긴 하지만 꺾이지 않는 갈대처럼, 험난한 순간들에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견뎌낸 책들만이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우리 출판도 한글 독자만을 상대로 하면 언젠가 한계에 부딪힐 것입니다. 세계를 무대로 시각은 높이고 시야는 넓혀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박=차근차근 단계적으로 해야 하겠지만 우리 아동도서 시장이 하나의 모범 사례가 될 것입니다. 우리 아동출판은 10년 만에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디자인·장정·일러스트 등 모든 분야에서 이미 세계적 수준입니다. 볼로냐 아동도서전에서 주빈국으로 초청받을 정도입니다. 또 하나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보다 더 우리말을 잘 구사하는 외국인들을 양성해 세계를 향한 문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야 외국인에게도 우리 책의 내용과 감동을 전해 줄 수 있을 겁니다.

▲이=내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행사에 관해 이를 근심스럽게 보는 시각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내년 행사와 관련해서 우리 출판계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박=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출판을 어떻게 세계에 보여줄 것인가입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기회입니다. 출판계가 대승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협조해 우리의 역량과 참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세로쓰기를 하는 일본책들과는 달리 우리 책들은 가로쓰기여서 장점이 많습니다. 우리 책의 외형, 작품화된 모양을 보여주는 데 우리 단행본 출판의 주역들이 적극 나서 주기를 바랍니다.

▲이=최근 들어 출판 불황, 특히 교양서 시장이 최악의 상황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출판인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노력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박=젊은이들을 보면 그들에게서 깜짝 놀랄 만한 재능을 발견합니다. 각자 타고난 재능이지요. 책은 그릇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디자인이 좋지 않으면 손이 가지 않습니다. 예술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디지털 시대에 인터넷이 할 수 없는 것을 만드는 것, 활자매체가 할 수 있는 예술품을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출판이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개인이 자율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면서 잘 노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책을 읽는 것처럼 잘 노는 것도 없을 텐데요. 저만 하더라도 어릴 적부터 수불석권(手不釋卷)해라, 즉 손에서 잠시도 책을 놓지 말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습니다. 해서 늘 장식으로라도 외출할 때에는 책을 들고 다녔습니다. 요즘 아이들의 손에는 책 대신 핸드폰이 있습니다.

▲박=노는 시간은 자기 충전의 시간, 지적으로 재무장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모니터를 통해 보고 읽는 것은 오래 남지 않습니다. 책은 자연스럽게 인생의 문제를 푸는 비밀 열쇠입니다. 당장 한 권의 책이라도 읽어 보면 우리 아이들도 이걸 알 수 있을 겁니다. 우리의 의무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미래로 가는 왕도(王道)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바로 책과 가까이 지내는 것입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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